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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게이머는 파멸을 거부한다-289화 (289/303)

289화

21부 : 어스의 탄생 (6)

“또 그러네.”

그레모리가 내게 말했다. 마신 그레모리가 아니라, 흰 연구복 가운을 입은 여성이다.

응? 마신?

뜬금없이 마신이라는 명칭이 왜 튀어나왔지? 녀석은 식물학자일 뿐인데.

아까 그레모리가 괜히 지옥이니 마계니 하는, 구닥다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해서다.

“뭘 또 그런다는 거야?”

“너, 또 잠깐 멍해졌어. 너무 피로가 쌓인 거 아니야?”

“아, 요즘 이상하게 가끔 그래. 아무래도 두뇌를 네트워크에 업로드하는 과정을 연구 중이다 보니, 의식이 잠깐 분리되는 느낌이랄까.”

그레모리는 내 농담에 웃지 않았다.

“너, 진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어디까지 말했더라?”

다시 말하지만 이런 대화가 즐거웠다. 누군가와 얘기하는 게 오랜만이었고, 그레모리는 썩 괜찮은 대화 상대다.

“아, 그렇지. 개연성과 섭리……. 즉, 상상력과 망상, 공포 같은 것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지 않으면, 세계가 초현실주의 화풍이나 추상화처럼 되어 버린다고 했지.”

“으응. 그런 곳에서 정상적인 사고로 살아가긴 어렵겠네. 죄다 미쳐버릴걸.”

“그래서 네트워크 자체에 기준을 두는 거야. 허용되지 않은 신호를 걸러내거나 제한하는 방식으로. 예컨대 아무리 메타버스 세계라고 해도, 식인이라는 행위와 키워드는 제한한다. 동족을 먹지 않는 것은, 인류가 이성과 교양을 가지고 존속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니까. 제한의 형태는 패킷 삭제야. 도를 넘으면 그런 신호를 계속 생산하는 의식 자체가 삭제되겠지.”

“삭제, 즉 섭리에 의한 소멸이라……. 뭔가 오싹하네. 역시 네가 구상하는 세계는 내 취향에 안 맞아.”

“뭐, 누가 이기나 보자고. 어느 쪽이든 상대를 살려주게 되는 거니까 원망하지 않기.”

내 말에 그레모리는 웃었다.

*

“솔로몬 리, 뭔가 떠올랐나?”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 여자는 어디 가고, 갑자기 잘생겼으나 어두운 기운이 풀풀 풍기는 청년이 날 다그치고 있다.

아, 이건 대마신 바알이구나.

그 여자? 그건 누구였더라.

내 표정을 보던 바알이 혀를 찼다.

“쳇, 완전하지 않군. 모처럼의 기회였는데…….”

그런 바알을 향해, 복부에 큰 상처를 입은 김태훈이 악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만둬!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피하기에는 바알도 부상이 심했다. 그는 몸으로 김태훈의 돌격을 받아내며 내뱉었다.

“잘 알지. 이제라도 비정상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거다.”

“비정상? 뭐가 비정상이라는 거지? 난, 그저 세계를 유지하려고 온 힘을 다할 뿐인데!”

억울하다는 듯 외치는 김태훈을 향해, 바알이 날카롭게 일침을 가했다.

“섭리와 개연성에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 어째서 너희가 인위적으로 우주를 조절하려고 하는 거지?”

“……!”

“네가 유지하고 지키려는 세계는 너희들만을 위한 세계겠지.”

잠깐 경직되었던 김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누구야?”

바알이 뭔가 대꾸하기 전.

탈출 게이트를 찾아 움직였던 윤성이와 설아가 돌아왔다. 둘은 뭔가 열심히 외쳐대고 있었다.

“찾았어! 이제 나갈 수 있어!”

“바로 근처에 있어요!”

그러다, 둘은 김태훈의 모습을 보고 굳어버렸다.

“어……?”

“태훈 오빠, 날개가…….”

김태훈이 나직이 혀를 찼다.

“쳇. 시스템이 타워형 통로를 개방해버렸나……. 우선 저 둘부터 처리해야겠군.”

그사이, 나는 일행의 위치를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곧장 연속해서 블링크를 발동했다.

먼저, 김태훈이 처리하겠다고 지껄인 윤성이와 설아부터.

팟!

“우왓?”

둘의 손을 잡은 다음, 손태준과 이진욱의 사이로 이동했다.

“모두 붙어요!”

다행히 머뭇거리거나 따지지 않고 잽싸게 내 말을 들었다. 뒤이어, 레이저와 최혜인이 있는 곳으로.

그쯤 되자 김태훈이 움직였다.

“어딜!”

그런 그의 앞을, 이레네가 나타나 가로막았다.

“더, 못…… 갑니다…….”

“비켜! 되다 만 디지털 차일드 주제에…….”

김태훈은 가속하여 이레네를 어깨로 쳐내버리려 했다.

그러자 이레네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김태훈의 바로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속도를 미처 못 줄인 김태훈의 날갯죽지를 베어버렸다.

“으악!”

바알이 히죽 웃었다.

“평소에 쓰는 트랜스폼이 아니니까 조절이 어렵겠지, 아서.”

“네놈, 나를 알아……? 진짜 누구냐, 너.”

“누구긴 누구야.”

나는 눈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반사됨을 깨닫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느 틈에 수많은 도검과 창 따위가 바알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저건, 분명 바알의 성채 주변 - 도산검림에 있던 무기들.

바알은 김태훈과 싸우면서 은밀히 저 무기들을 불러온 것이다.

아니, 이레네가 차원 통로를 이용해서 날라 온 거라고 해야겠지. 그걸 띄운 것이 바알이고.

“72마신의 위계 1위, 마신 위의 마신, 마신 최고의 검객, 바알이지.”

광오한 말끝에 바알이 권능을 발동했다.

권능, 만천화우!

투콰콰콰콰콰콰콱!

도검과 병장기의 폭우가 쏟아졌다. 그 빗줄기는 고스란히 김태훈을 향했다.

이레네는 이미 차원 너머로 숨은 뒤였다. 부녀간의 호흡이 훌륭하구나!

“크윽!”

김태훈은 그 범위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이레네에게 날개를 잃은 터라 땅에 내려서야 했다.

그가 두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수십 자루의 병장기가 전신에 내리꽂혔다.

“윽, 방어구를…….”

참고로, 김태훈이 착용했던 방어구는 한참 전에 내가 거둬들였다.

견디다 못한 김태훈은, 날개로 몸을 덮어 만천화우를 막았다.

그 틈에 바알이 내게 소리쳤다.

“어서 게이트로 나가! 퀘스트는 이미 완료했다. 내가 이제부터 100년간 마계의 패자가 됐어.”

“아,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일이 아니야. 이 던전은 너의 세계와 연결되는 통로다. 네가 퀘스트를 깨면서 올라오는 자체가, 통로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행위였어. 그러나 나가려면 어쩔 수 없으니 처음부터 외통수였던 셈이다.”

“무슨, 뭘 위한 통로라는 거죠?”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대폭주.”

“……!”

대폭주. 빅뱅 뒤에 벌어진, 인베이더의 대규모 습격 사건.

빅뱅에서도 살아남은 우리 가족을 그 이벤트 때 다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인 대부분이 대폭주 때 사망했다.

그랬나. 그 대폭주는, 원래의 역사와 달리 이 타워를 통해서 발현하는 거였나.

“최상층, 그러니까 마계를 통해서 나가야 하니, 지배자가 된 내가 어느 정도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너희 세계의 시간으로 6개월이 한계다. 그 안에 최대한 대비해라.”

“알겠어요.”

나는 탈출 게이트로 향하기 전, 잠깐 망설이다가 바알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나를 도운 거죠? 김태훈과의 전투도 그렇고, 대폭주에 관한 것까지…….”

바알이 내가 손에 든 것을 가리켰다.

“그 물건.”

“이거. 하이퍼 메모리랑 리더기요?”

“그래. 그건, 단순히 세이브 데이터를 저장하기만 하는 물건이 아니다. 메모리를 꽂은 순간, 우리의 기억도 돌아오는 코드가 삽입되어 있었거든. 72마신을 봉인한 솔로몬 왕이,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봉인을 풀어줬다고나 할까.”

무슨 말인지 의미를 모르겠다.

다만, 이 리더기의 작용에 의해 마신들이 - 최소한 바알 일파는 아군이 됐음은 이해했다.

“어서 가! 곧 다시 보자.”

“그럼, 부탁드립니다.”

바알과 이레네가 전력을 다해서 김태훈을 저지하는 사이.

나는 그의 바람대로, 윤성이와 설아를 따라 탈출 게이트로 달렸다.

등 뒤에서 김태훈의 무서운 포효가 들려왔다.

“곧 개기일식이 시작될 거다! 탑을 통해 이클립스가 강림할 거야. 그때는, 차라리 내 손에 편하게 죽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 거다, 멀린!!”

두고 보자는 놈 무섭지 않더라.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무서웠다. 등에 소름이 돋고 전신이 차게 식었다.

“저기!”

그러다 윤성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고 정신 차렸다. 거기에는 던전 이탈 게이트 특유의 형태를 한, 빛나는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모두 들어가요. 서둘러!”

동료들은 하나둘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누군가는 감개무량한 기색이었고, 또 누군가는 긴장한 듯했다. 설아는 벌써 눈물을 글썽였다.

마지막에는 나와 레이저, 둘만 남았다.

레이저는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타워형 던전 밖으로 나가보는 게 태어나 처음일 테지.

나는 레이저의 등에 손을 얹고 힘주어 말했다.

“괜찮아요. 곧 다시 만나. 나의 세계에서.”

“……네!”

레이저가 게이트 안으로 사라지고, 숫자 셋을 센 다음 나도 뒤를 따랐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살아남은 동료와 되살아난 동료, 새로 얻은 동료를 모두 데리고 던전을 이탈했다.

*

대한민국 서울의 목동에, 처음 보는 형태의 타워형 던전이 모습을 드러낸 지도 어느덧 30일이 지났다.

공략을 천명하며 호기롭게 진입한 기사들 - 사신 기사단장 손태준, 부단장 이진욱, 단원 최혜인.

그리고 공무원의 희망이니, 화염의 기사니 하는 별칭으로 불리는 수경총의 류경재 총경과 그를 서포트하는 이혜림 순경.

그 밖에 새로 각성한 신진 기사로 알려진 세 청년 등.

이들은 공략 마지막 날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타워형 던전 앞에는 오늘도 세계 각국의 기사들과 서번트가 잔뜩 모여 있었다. 아니,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수가 많았다.

오늘이 바로 공략 시한인 한 달의 마지막 30일 차인 데다, 타워형 던전이 아침부터 이상 징후를 보인 까닭이다.

타워 주변에 섬광이 번득이고, 천둥 번개가 쳤다. 또 미미하게 진동하기도 했다.

이에 속칭 타워 경비군도 새벽부터 진을 친 상태였다.

그 인파 안에는 중국의 대표 기사 류페이와 일본의 기사 나가모토도 여전히 끼어 있었다.

나가모토는 일본 내 기사단 상위 세 개에 속하는 메이지 기사단의 에이스고, 류페이는 중국 공산당 소속의 국가 기사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거치면서 둘은 어느 정도 유대감을 쌓았다. 처음에는 시종일관 나가모토를 무시하던 류페이도 이제 순순히 대화에 응하곤 했다.

나가모토가 류페이에게 말했다.

“어이, 류페이. 오늘이 공략 마지막 날이야. 무사히 돌아올까?”

“……그러길 바라야겠지. 아니…….”

류페이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나가모토는 류페이의 마음을 짐작했다.

이대로 공략대가 무사히 나온다면, 가뜩이나 기사 육성과 던전 공략에 앞선 한국은 더욱 우위에 서게 된다.

인접국인 중국의 처지에서는 그게 마음에 안 들 것이다.

그렇다고 같은 기사 된 입장에서, 못 나오길 공공연히 빌기에도 뭐하다.

던전을 공략하여 인류를 구한다는 자부심은,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기사의 공통된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 이해한다네, 친구.’

며칠 전부터는 새로운 기사도 방어선에 합류하였다. 다소 경력이 흥미로운 기사다.

김철수라는 이름의 청년인데, 원래는 경력이라고는 군필뿐인 취준생이라고 했다.

그는 타워형 던전이 출현하기 직전, 근처의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인베이더의 습격을 받았다.

당시 김철수를 구해준 이가, 타워 공략을 위해 진입한 기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 사건 이후, 김철수는 기사의 자질에 눈을 뜨고 각성했다. 특히, 이제까지의 기사들과는 사뭇 다른 기운이 풍겨 나왔다.

나가모토는 그를 흥미롭게 주시했다.

‘이건 마치, 우리나라의 무녀 같기도 한데……. 신성력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어어, 나온다!”

모두의 시선과 방송국의 카메라가 일제히 타워 1층의 문을 향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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