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21부 : 어스의 탄생 (7)
내가 감았던 눈을 뜨자, 먼저 온 동료들이 모두 날 보고 있었다.
“정우야!”
“괜찮으신가요.”
“…….”
탈출 게이트를 통과하여 나온 곳은 넓은 원형 로비 같은 장소였다. 그 안은 희미한 조명만 비칠 뿐, 살짝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시설이라고 할 만한 것은 딱 하나 거대한 문이었다. 형태나 크기로 보아, 우리가 타워형 던전으로 진입할 때 통과했던 문으로 짐작되었다.
문 바깥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말소리 등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어쩐지 익숙한 소음이다. 문 너머는 목동인 거다.
최혜인 기사가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1층에 있던 롬 제국은 사라진 모양이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타워형 던전에 들어와서 제일 먼저 대면한 것은 롬 제국이라는 나라였다.
롬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과 비슷한 분위기였으며 마신 키마리스가 통치하고 있었다. 잘 닦인 가도와 큰 시장, 탄탄한 건물이 늘어선 성채 도시였다.
한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흔적조차 없다. 그 거대한 나라가 통째 사라진 듯했다.
손태준 단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롬 제국이 사라졌다기보다는 공간 자체가 축소되었다. 끝까지 보이진 않지만, 여기는 잘해야 백화점 로비 정도 크기다. 아마, 공간이 서로 뒤바뀐 게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조금 안심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롬 제국은 다른 공간 어딘가에 여전히 건재해 있다는 뜻이니까.
다소 악연으로 시작했으나, 키마리스 황제는 목동 아파트 단지의 생존자들을 내주었고 근위 기사 라칸도 우리를 도왔다.
그 모두가 사라져 버리는 것보다는 다른 차원에서 건재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 안에서 서둘러 누군가의 모습을 찾았다. 바로 레이저다.
김태훈과의 대화 중, 나는 인베이더의 정체를 확인했다. 놀랍게도 인베이더는 전뇌성의 주민들이 넘어오면서 변한 모습이었다. 믿기 어렵지만 그랬다.
그들은 가진 마력의 정도, 성향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거기에 맞는 인베이더로 변했다.
개체 수가 많은 중소형 인베이더는 일반적인 시민들.
날렵하고 시야가 넓은 것은 파이오니어라 불리는 정찰대.
그보다 좀 더 강한 트레일블레이저급은 전초 기지 확보를 위한 것.
즉, 마포 카페 거리에 무리 지어 있던 세눈박이 늑대들이 트레일블레이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필드 보스는 길드장이거나, 그들의 언어로는 레이드 마스터였다.
레이드.
우리의 세계, 통칭 1,000번 차원은 그들에게도 사냥과 유희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나는 레이저 또한 넘어오면서 인베이더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녀도 비슷한 걱정을 하는 듯했다.
그래서 레이저가 보이지 않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런 나를 보던 이진욱이 놀리듯 말했다.
“뭐야, 누구를 그렇게 애타게 찾아? 혜인이라면 여기 있는데?”
“하지 마십시오.”
“켁.”
최혜인 기사에게 옆구리를 쥐어박힌 이진욱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하지 말라던 최혜인이 약간 볼멘소리였던 것을 이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들어도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저 씨는 어디에 있어요? 분명히 먼저 보냈는데.”
그때, 등 뒤쪽에서 수줍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여기 있어요.”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키가 조금 작아지고, 머리카락 색깔도 짙어진 레이저가 서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작아져서 곧바로 눈에 띄지 않은 듯했다.
다음 순간, 나중에 생각해도 이불킥 할 짓을 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끌어안아 버린 것이다.
“어?”
레이저는 잠깐 당황하는 듯했으나, 금세 나를 마주 안았다.
주위에서 휘파람 소리(이진욱이겠지)며 야유하는 소리(윤성이와 설아 같다), 헛기침하는 소리(당연히 류경재 총경)가 들려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행이다…….”
나는 레이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살짝 떨려 나오는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성별은커녕 인종 - 아니, 종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 존재를 마음 깊이 품게 되어버렸다고.
어릴 때부터 배워온 성별 개념을 완전히 떨치지 못했고, 무엇보다 나는 현재 남성이므로 레이저를 여자로 느끼고 그녀라 칭하긴 하지만. 사실 다 상관없었다.
먼저 내게 호감을 표한 레이저의 한결같은 애정과 헌신에 마음을 연 것이다.
“이제 애정 행각은 그쯤하고, 서둘러 의논 마치고 나가자.”
손태준의 말에 나는 머쓱해서 떨어졌다.
“의논하실 일은?”
거기에 대한 답은 류경재 총경이 대신했다.
“우선, 남은 인원도 자네 능력으로 되살릴 수 있느냐 하는 거네.”
말하는 그는 살짝 긴장해 있다.
그의 입장에서 남은 인원이란 당연히 이혜림 순경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류경재 총경은 수하를 끔찍이 아꼈다. 그녀의 죽음을 알고 분노에 각성할 정도로.
“시도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요?”
“부탁하네.”
류경재 총경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 그래도 되는데.
나도 여기서 가족을 살릴 예정이거든.
던전 내부에서는 가능함을 이미 확인했으나, 나가서도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가 똑같이 작동할지 알 수 없다.
던전 내부와 바깥은 다른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이니까.
이왕이면 똑같은 조건에서 실행하는 편이 안전하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하이퍼 메모리 리더기를 실행했고, 전뇌 패드에 뜬 이름들을 터치했다. 그러자 손태준이나 최혜인 등과 똑같은 과정을 거쳐, 모두가 살아났다.
이혜림 순경도, 나의 부모님과 여동생 정아도.
“이혜림!”
류경재 총경이 어리둥절한 이혜림 순경을 보고 반색했다. 찰나의 시간 후, 이혜림 순경은 자기 목을 어루만지면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아, 내, 목, 목이…….”
하이퍼 메모리는 사망 직전까지의 행동과 의식 데이터를 기록하여 저장한다. 이혜림 순경은 끔찍하게 죽기 직전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혜림아!”
류경재 총경이 그녀를 힘껏 안았다. 내가 레이저를 포옹한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그는 이혜림 순경을 안은 채, 왼팔로 등을 감싸고 오른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아기 달래듯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다 해결했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일 먼저 내가 무사한 모습부터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손을 조금씩 떨었다.
나는 그런 두 분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아버지, 엄마. 이제 끝났어요. 곧 집에 돌아갈 수 있어요.”
아버지가 근심 어린 투로 말했다.
“아파트가 폭삭 주저앉았는데, 정부에서 시세대로 보상해 주겠냐?”
음, 죽었다 살아났는데 집값 보상 걱정부터 하시는군.
아마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겠지. 이것이 K-가장이다.
엄마는 내게 물었다.
“정우야, 네가 뭔가 한 거지? 그 이상한 동네에서 우리 찾아냈을 때처럼.”
“응, 엄마.”
“그렇구나. 잘됐다.”
엄마는 눈물을 조금 글썽였을 뿐, 어떻게 죽었던 사람을 살렸냐는 둥 자세한 사정은 캐묻지 않았다. 나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눈빛과 목소리였다.
그런 뒤에야 다른 곳에 시선이 멎었다.
“저 아가씨는…….”
바로, 여전히 내 옷자락을 꼭 쥐고 옆에 서 있는 레이저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갑자기 내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나는 살짝 허둥지둥하면서 말했다.
“아, 엄마. 기억나지? 그때 소개했던 외국인…….”
“아아, 그래. 염색한 거니? 모습이 좀 달라져서.”
엄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하게 웃었다.
정아의 상태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녀는 죽음 당시의 기억으로 공포에 떨기보다, 먼저 부모님의 안위를 확인한 뒤에는 무르를 찾았다.
“오빠, 무르는?”
“미안……. 무르는 우리와 달라서, 마계에 속한 존재라. 너나 엄마, 아버지처럼 곧바로 살려내지 못했어.”
“곧바로……?”
잠깐 뭔가 생각한 정아가 말했다.
“그럼, 언젠가 마계에서 살아나기는 한다는 거지? 완전히 죽은 거 아니지?”
“응. 훗날에 확실히 다시 살아날 거야. 나와 떨어졌을 때 너도 봐서 이젠 알겠지만, 무르는 특별한 존재거든.”
“그럼 됐어. 다행이다, 정말…….”
정아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냥 어린애의 한때 감정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르에 대한 정아의 마음이 생각보다 깊은 것 같다. 조금 걱정이다.
이렇게 해서 모두를 되살려냈고, 나가서 할 말도 입을 맞추었다. 어차피 정부와 언론 대응은 손태준 단장과 류경재 총경이 다 할 거여서 크게 상관없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엄마 괜찮겠지?”
“우리 엄마도 걱정이야. 말이 변호사지, 나 없으면 밥도 잘 못 해 먹는데…….”
윤성이와 설아는 곧 있을 어머니와의 재회에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모두가 있는데 단 한 사람, 김태훈만 없었다. 그 사실에 가슴이 아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역시 타워 고층으로 갈수록 김태훈에게 의지하고 기대는 바가 컸다.
마지막 순간, 김태훈이 그런 식으로 변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본래 모습이었겠지만.
다들 의식적으로 김태훈의 얘기를 꺼내지 않다가, 류경재 총경이 한숨 쉬며 말했다.
“음, 일단……. 그 친구는 전사한 거로 하는 게 좋겠지. 상부에 보고는 해야 하니까.”
모두 묵묵히 동의해서 김태훈은 던전 내 전사자로 처리하기로 했다.
던전 내 전사자는 시신도 없다. 유품 하나만 있으면 그런 것으로 처리된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그게 더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함께 공략에 들어간 파티원이 다른 이들을 해치려 한 것이니까.
“전리품도 문제 아닌가?”
이진욱이 중얼거렸다. 던전이 나타나자마자 공략하는 제일 큰 이유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얻는 전리품에 대한 기대도 만만치 않다.
아예 전리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외부에 내놓기에는 곤란한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내 하이퍼 메모리와 리더기라거나.
‘이걸 내놓으면 난리가 나겠지.’
내 주변인 한정이기는 하나, 인간의 존재 자체를 일정 시점으로 계속 저장하는 장치다.
진실을 알게 된 나한테는 그저 세이브 데이터를 읽어오는 것뿐이지만, 외부에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적의 아이템이 될 것이다.
의외로 받아들이는 자체는 무난하리라 예상된다. 이미 마력, 아이템, 스킬 같은 것들이 ‘개연성’을 갖고 통용되는 세상이니까.
아무튼, 빈손으로 나왔다가는 진위를 의심받고, 김태훈의 죽음까지 파헤치려 들 수도 있다.
“제가 다크 스톤을 좀 내놓을게요. 뭐하면 쓸 만한 아이템도 몇십 개 정도.”
이진욱이 살짝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 남자,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어, 그래도 되나?”
“상관없어요. 어차피 나한테는 남아돌고, 수경총과 군대 전력을 강화하기도 해야 하니까요.”
“그렇지…….”
이건, 대폭주에 대한 얘기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김태훈의 말을 들었다.
그나저나 나도 변했다. 스캐빈저라고까지 불리던 내가, 다크 스톤과 아이템을 선선히 내놓을 생각을 다 하다니.
마음을 굳힌 까닭이다. 나는 진짜이든 가상이든 간에 나의 세계를, 1,000번 차원을 다른 세상의 침략자들로부터 지켜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모든 사항을 정리하고 점검한 뒤.
“그럼, 나가볼까.”
손태준 단장의 말을 끝으로, 거대한 문을 힘주어 밀었다.
문틈으로 빛이, 익숙하게 잘 알던 그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달간의 던전 공략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앞으로 더 큰 사태가 기다리고 있지만, 어쨌든 해냈다.
곧, 요란한 박수갈채와 팡파르, 카메라 플래시가 우리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