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22부 : 대폭주-전뇌성의 침공 (7)
나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
“뭐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합니까?”
“떽! 이런 데라니! 신성한 조상들의 흔적을 두고.”
댁 조상도 아니잖아 -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하진 않았다.
로키가 만나자고 한 장소는 경복궁이었다.
로키의 말마따나 정말 조상이 돌보기라도 한 것인지, 경복궁은 차원문 사태에서도 파괴되지 않았다.
덕분에 원래도 유명한 관광명소였으나, 외국인 관광객들이 더욱 많이 찾게 되었다.
세계적인 차원문 사태로, 안타깝게도 무수한 유적과 명승지가 파괴된 까닭이다.
그 난리를 겪으면서도 건재한 장소에 대한 경의가 더해진 것이다.
또한, 우수한 기사단과 수경총의 존재로, 타국보다 인베이더 대응력이 우수하다. 한국 정부도 그런 사실을 부각하여 광고하고 있었다.
로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눈에 안 띄잖냐.”
“아…….”
확실히 그렇기는 했다.
로키와 동행한 인물은 모두 다섯.
그 가운데 넷은 동양인이 아니다.
이제 외국인이 흔한 시대가 되었다곤 해도, 나와 로키까지 포함해서 타 인종 네 명이 섞인 일행 여덟이 돌아다니면 시선을 끌 거다.
여기라면 외국인 단체 관광객 천지니까 우리가 특별할 것도 없다.
아니, 잠깐.
“눈에 좀 띄어도 상관없잖아요……?”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강림체이므로 정당한 신분도 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카하핫! 실은 영화에서 본 걸 그냥 따라 해 보고 싶었다! 이 세계의 영화라는 것은 재미있더구나! 나를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은 못마땅하지만 말이야.”
“…….”
초록 괴물이 신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기시지.
그때, 연신 두리번거리던 장신의 백인 남자가 탄성을 토했다.
“오, 아름답군! 매우 아름다워!”
“그렇죠? 경복궁은 대한민국에서도 특히 자랑하는 문화재입니다.”
내 말에, 백인남이 대꾸했다.
“응? 그게 아니라, 나는 이 나라의 여성들이 아름답다고 한 거다. 다들 맵시 있고 잘 꾸민 데다 피부도 좋아!”
“음…….”
그 언행에, 갑자기 떠오르는 신이 있었다.
“혹시, 제우스 님?”
“오호? 알아보겠는가?”
레이저를 안 데려오길 잘했네.
나는 제우스 옆에 서 있는, 도도한 인상의 장신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인은 긴 백금발을 하나로 묶은 포니테일 스타일이었다. 딱딱한 인상만 아니라면 훨씬 아름다워 보일 법했다.
대신, 단정한 입매와 침착한 눈빛에서 특유의 지성미가 느껴졌다.
“그쪽은 혹시 아테나 님이십니까?”
나를 잠시 바라보던 여인이 말했다.
“그렇다. 지혜로운 자여.”
아테나를 알아본 이유도 간단했다. 우선, 상당한 미인인데도 제우스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치고는 둘이 가깝게 붙어서 있고, 실제로도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그렇다고 헤라라 하기에는, 제우스의 두리번거림에 별 반응이 없다. 또, 미안한 말이지만 비너스로 예상하기에는 레이저보다 안 예뻤다.
이런 순간적인 추리 끝에 아테나일 거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쪽은 영 모르겠네…….’
구릿빛 피부에 이국적인 인상인데, 동남아시아 쪽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로키가 데려온 강림체들 가운데 유일한 아시안이라 할 수 있다.
내 시선을 알아챈 로키가 말했다.
“아, 그쪽은 찾아오기 진짜 힘들었다. 먼 데다가 인간도 워낙 많아야 말이지. 날씨는 또 어찌나 후덥지근한지…….”
이국적인 인상의 사내가 합장한 자세로 로키에게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수고를 끼쳤군요.”
이어, 내게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람. 인도에서 왔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시바 님을 모시고 있지요.”
“아…….”
시바의 강림체인가. 그런데 어쩐지 그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앗, 정우야! 어, 전부 꿈에서 본 사람들…….”
저런 유주연의 상태와는 다르네.
저렇게 갑자기 바뀌어 버리는 건, 무슨 해결책이 없는 건가?
전뇌성과 싸우다가 유주연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시바는 흔히 파괴신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분명 파괴의 신이긴 하나 이는 다면성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오히려 전능신에 가깝다.
무엇보다, 파괴의 신답게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신화대로라면 말이지.
람이라는 자가 말했다.
“저는 시바 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저의 목숨을 담보로 시바 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뭘 기도하셨는데요?”
“그야 당연히, 인베이더를 세상에서 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지요.”
말하는 람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그의 옆에 있던, 붉은 피부에 단발의 여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기사야.”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난다.
분명, 인도에 시바의 화신이라 불리던 S급 기사가 있었지.
‘김태훈과 비슷한 형태인가.’
그렇다면 전투에 더욱 도움이 되리라. 강림한 신이 잠들어도, S급 기사 자체는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인베이더에게 가족을 모두 잃었대.”
“아……. 유감입니다.”
“감사합니다.”
람은 내게 가볍게 묵례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생명까지 건 것도 이해가 간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처음으로 나타난 미지의 던전에 망설임 없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숙연해져 있는데, 붉은 피부의 단발 여자가 알아서 자기를 소개했다.
“참, 나는 아미라라고 해. 리비아 사람이고, 이상형은 BTX의 건우. K팝 좋아해.”
BTX는 요즘 제일 잘나가는,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한국 보이 그룹이다. 이 무렵에는 미국 차트에서 8주째 1위를 지키는 중이다.
“아, 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
“원래 K팝이랑 드라마로 조금 알았는데, 여신님이 강림하고 나서 언어 천재 됐어!”
그럴 수 있다. 강림체가 되면 신체 능력뿐만 아니라 머리가 좋아지기도 하니까.
“네, 아미라 씨. K팝의 나라에 잘 오셨어요.”
“하하, 너무 신나!”
마지막으로, 갈색 머리카락의 백인 남성이 남았다. 그도 살짝 어눌하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말했다.
“반가워요. 노아라고 합니다. 한세대학교 4학년입니다.”
“유학생이시군요. 한국에는 언제 오셨나요?”
“작년에 왔어요. 편입했습니다. 기사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나는 노아라는 남자가 든 지팡이를 가리켰다. 원목으로 만들어졌고, 몸체가 새끼줄처럼 꼬인 나무 덩굴로 되어 있었다.
“그건 대체 뭔가요?”
“이건 제 아이템입니다! 아이템 덕분에 한국의 훌륭한 신, 모실 수 있었습니다.”
“오호…….”
나는 이미 진실의 눈으로 아이템을 파악했다. 그래도 노아가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물었다.
“혹시, 아이템과 모시는 신의 이름이?”
“네. 이 지팡이는 점지의 지팡이고, 제게 오신 신은 삼신할머니입니다!”
……역시.
하긴, 한국의 신이 꼭 한국인에게만 강림하라는 법은 없다.
당장 로키만 해도, 북유럽인이 아니라 토종 한국인인 유주연을 강림체로 점찍었으니.
그래도 이건 언밸런스가 좀 심하네. 백인 남성에게 삼신할머니가 깃든 데다, 아이템도 하필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점지의 지팡이라니…….
<점지의 지팡이>
삼신할머니가 사용하는 지팡이의 복제판입니다. 근원적 생명력이 깃들어 있으며 파괴할 수 없습니다.
타입 : 지팡이
기능 : 최상급 생명력 회복.
사용자의 생명력 200% 증가.
사용자의 매력 수치 100% 증가.
내구도 : 파괴 불가
소유주 : 노아 데이비스
가치 : 갓 등급
특수 옵션 : 잉태
지정한 대상을 잉태시킵니다. 24시간 이내에 1회만 사용 가능합니다.
보고 또 봐도 특수 옵션은 변하지 않았다.
잉태라니! 그러니까, 분명 임신시킨다는 그 뜻 맞지……?
역시, 삼신할머니의 아이템답다.
그나저나, 그런 지팡이를 유학생 노아 데이비스가 들고 있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거기에 더해, 그가 아까부터 나를 흘끔거리는 것도 신경 쓰인다.
“저, 노아 씨.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참 매력 있는 분이다 싶어서요. 초면에 죄송합니다.”
“칭찬인데요, 뭐.”
내 말에 노아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음, 역시 그쪽인가.
본인이 먼저 말하지 않았으니 굳이 언급할 마음은 없지만.
어째서 아이템이 반응했는지는 알겠다.
‘모성애……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어쨌든 아이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는 거군.’
물론, 점지의 지팡이를 여성이 손에 넣었다면 해당 여성에게 삼신할머니가 강림했을 확률도 높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든 노아가 손에 넣었고, 삼신할머니는 그가 당신의 강림체로 합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 이제 이동할까요?”
내 물음에, 아미라가 펄쩍 뛰었다.
“안 돼에에! 나 아직 경복궁 구경도 못 했는데!”
“한정식집으로 갈까 하는데, 다들 괜찮으시죠?”
“빨리 가자.”
어느 틈에 앞서가는 아미라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쾌활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이 가운데 제일 위험한 신이 내린 이는 바로 저 아미라일 것이다.
‘세크메트, 라…….’
세크메트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신으로, 암사자의 머리를 지닌 여신이다.
여신이면서도 ‘강력한 자’라는 칭호를 가질 만큼, 가공할 권능을 가졌다. 주된 특기는 무려 전쟁과 역병.
나는 이집트 신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인류가 태양신 라에게 반역을 꾀하자, 라는 세크메트를 지상으로 내려보내 단죄하도록 했지.’
그 결과, 인류는 사막이 피로 물들 지경으로 학살당했다. 나중에는 주신 라마저 당황하여 만류했을 정도지만, 세크메트는 무시하고 학살을 이어나갔다.
‘그걸 어떻게 해결했더라……. 아!’
방관할 수 없게 된 라는 인간들에게 술과 석류, 꼭두풀로 빚은 술을 7천 병이나 뿌리게 했다.
세크메트는 그 술을 인간의 피로 착각하여 모조리 마시고는 취해 잠들었고, 그런 세크메트를 라가 강제로 귀환시켰다.
일설에는, 그 냄새에 홀려서 닥치는 대로 마시다가 취했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미라의 붉은 얼굴은-
‘술 마신 거였어?!’
냄새가 풍길 만도 한데, 얼굴만 좀 붉어졌을 뿐 멀쩡하다. 7천 병을 마셔야 취할 정도니, 어지간해서는 표도 안 나겠지.
‘……한정식집에서 술 못 마시게 해야겠네.’
얼마 후, 종로의 한정식집에서 식사하면서 강림체들과 천천히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 강림체들의 면면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강림체 유주연, 한국인. 내 친구이며 강림한 신은 로키다. 내가 준 로키의 단도를 매개체로 강림했다.
강림체 발터, 독일인. 강림한 신은 제우스.
독일군 장교이며 대 인베이더 전에서 ‘제우스의 번개 반지’를 습득, 제우스의 강림체가 되었다.
강림체 메리언, 영국인. 옥스퍼드 대학 우수 장학생이며 영국 양궁 국가대표이기도 하단다.
고고학과 활동의 일환으로 그리스에 갔다가 ‘아테나의 헌터보우’를 습득, 아테나가 강림했다.
강림체 람, 인도인. 시바 신의 화신이다. 아이템이 아닌, 목숨을 담보로 한 기도를 통해 강림체가 되었다.
강림체 아미라, 리비아인. 강림한 신은 세크메트다. 원래 모델로 활동했던 모양이다. 어쩐지 외모가 화려하더라니.
아미라는 자국의 극단주의 종교를 피해, 옆 나라 이집트로 도피 겸 여행을 떠났다. 거기서 버려진 신전의 유물을 훔쳤다가(…) 세크메트의 화신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강림체 노아, 미국인.
그는 식사 도중에도 왼손에서 지팡이를 떼놓지 않았는데, 지팡이의 용두가 어쩌다 나를 향할 때마다 식은땀이 흘렀다.
‘삼신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