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 完 (001-231)_(2022_T)
1화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
두 나라는 삼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싸워 왔다.
이에 두 왕국이 위치한 율렌 섬 나아가 세계 전체가 두 나라를 이렇게 불렀다.
[삼백 년 적국] 이라고.
삼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진 원한과 다툼이 만들어 낸 별칭이었다.
삼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가멜다 왕국의 마법 장교 롤랜드 또한 삼백 년 적국이 만들어 낸 전란에 휩쓸려 생명이 꺼지기 직전이었다.
“지원군은 아직인가!”
피투성이가 된 채 롤랜드는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의 곁에 남은 건 소수의 병력 그리고 굳게 잠긴 내성 문뿐이었다.
롤랜드 자신과 소수의 병력, 내성 문이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이 마주하던 최전선 볼페르트 요새의 마지막 보루다.
저 내성 문이 깨지면 볼페르트 요새는 순식간에 적군에게 함락될 것이다.
이에 롤랜드와 마법사들은 남은 마나를 쏟아부어 성문이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게 전력을 다했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롤랜드는 점점 깨닫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오늘 볼페르트 요새가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요새 외부는 모조리 적군에게 함락되었다.
유일한 희망은 저 내성 문이 열리기 전에 지원군이 와서 적들을 물리쳐 주거나, 적들이 최소한 내성 문 안의 생존자들이라도 살려 주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뿐.
“빌어먹을, 빌어먹을!”
금방 꺼질 것 같은 희망 속에서 어떻게든 내성 문이 파괴되지 않게 마나를 쏟아부었다.
하지만 조금 전 어깨에 적병의 칼을 맞은 탓에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줄곧 놓은 적 없던 검도 어느샌가 놓쳐 버렸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하급 귀족의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이렇게 끝나는 건가.
이번 임무만 무사히 끝나면 롤랜드 본인, 가족들, 나아가 가문 전체의 영광을 약속 받았다.
그런 약속을 믿고 목숨 걸고 싸워 왔고 여기까지 왔다.
자신과 가족, 가문의 영광을 위해 언제나 전장에서 앞장서 싸웠다.
그리고 언제나 죽음을 각오했다.
어제 외성이 함락된 순간 최후를 직감하고 유서까지 남겼다.
하지만 역시 죽고 싶진 않았다.
아직 결혼도 못 했고 어머니와 여동생도 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살아 나가야…….
“……!!!”
이를 악물며 버티던 롤랜드의 눈이 커졌다.
롤랜드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의 가멜다 왕국 군 마법사들, 아니, 마법사가 아닌 자들도 느꼈을 것이다.
내성 문 밖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나를.
콰앙-
롤랜드를 비롯한 마법사들 여럿이 부수지 못하게 막아 내던 내성 문이 순식간에 박살 났다.
집채만 한 몬스터? 거대한 공성 병기?
아니, 그보다 더한 게 나타났다.
박살난 내성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긴 흑발을 휘날리는 마법사였다.
얼굴에는 검은 철 가면을, 몸에는 망토를 쓰고 있어 얼굴도, 나이도, 하다못해 성별도 알아볼 수 없는 존재.
하지만 롤랜드는 저 마법사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르센 왕국이 자랑하는 대마법사이자, 율렌 섬 최강의 전투 마법사로 불리는 자. 카스텔.
가멜다 왕국에서는 저 무시무시한 마법사를 이렇게 불렀다.
검은 흉성이라고.
마법 한 방으로 내성 문을 파괴한 카스텔은 가면을 쓴 얼굴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롤랜드 쪽에 멎었다.
가면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힘든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우두머리군.”
“…….”
가멜다 왕국의 생존자들 중 우두머리라고 알아봐 주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싸워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검은 흉성’은 ‘촉망받는 젊은 마법 장교’ 롤랜드 따위가 상대할 적이 아니라는 것을.
롤랜드가 상대할 수 없다면, 이 자리의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지금이야 말로 볼페르트 요새가 함락 당하는 순간인 것이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추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죽는다면 명예롭게 죽어야 한다.
다르센 왕국과의 전쟁에서 죽은 아버지와 두 형님을 위해서라도.
고향에서 아직 살아 있는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추하게 죽는다면 왕국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을 외면하거나 박해할지 모른다.
자신은 죽어도 가족들, 나아가 가문을 위해서라면…….
롤랜드는 몸속의 모든 마나를 끌어 모아 지금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시전했다.
거대한 불꽃 폭풍으로 적들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마법, 파이어 스톰.
하지만 불꽃 폭풍은 카스텔의 손짓 한 번에 소멸되었다.
“제법이군.”
말과 함께 카스텔이 다시 손을 뻗었다.
눈부신 빛이 폭발하는가 싶더니, 여러 갈래의 빛이 자신과 주변을 덮쳤다.
“…….”
몸속에 무언가 뚫고 들어온 느낌이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생각보다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잘 가라.”
카스텔의 마지막 말과 함께 롤랜드의 시야가 어둠에 떨어졌다.
그리고…….
“이런 미친.”
침대에 누워 거울 속 자신 얼굴을 바라보던 다르센 왕국의 5왕자, 사울은 중얼거렸다.
자신의 전생을 떠올린 탓이었다.
다르센 왕국의 적국, 가멜다 왕국의 마법 장교 ‘롤랜드’였던 시절을 말이다.
* * *
율렌 섬.
‘삼백 년 적국’이라 불린 가멜다 왕국과 다르센 왕국의 피 튀기는 전란이 이어진 땅.
가멜다 왕국과 섬을 양분하며 삼백 년 동안 싸워 온 다르센 왕국.
그 다르센 왕국의 왕궁에서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왕자님이 다치셨다고?”
“어서 치료 마법사를 불러!”
다르센 왕국의 5왕자 사울 다리우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시녀와 시종들이 부산을 떨고, 치료 마법에 능한 마법사가 사울의 집인 ‘상아 궁’에 달려왔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침대에 누운 사울은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 사울을 진찰한 치료 마법사에게 나이 든 시종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떻습니까?”
치료 마법사가 대답했다.
“큰 부상은 아닙니다.”
“다행이군요, 어서 치료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치료 마법사의 두 손이 빛났다.
하얀 치유의 빛이 사울의 머리, 나아가 온몸을 뒤덮었다.
“으음…….”
사울이 신음을 흘렸다.
당장 깨어나지는 못했지만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눈을 뜨실 겁니다. 며칠 동안 제가 이곳에 머무르겠습니다.”
나이 든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입니까? 급히 달려오느라 이야기도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만.”
“왕자님 서재의 책장에서 책이 쏟아졌지 뭡니까. 하필 그게 왕자님 머리에…….”
“저런.”
황당한 사고 내용에 치료 마법사는 혀를 찼다.
다행히 그의 장담대로 사울 왕자는 오래잖아 깨어났다.
“왕자님이 깨어나십니다!”
치료 마법사가 달려가 보니 사울 왕자가 눈을 뜬 모습이 보였다.
절세미인이던 어머니를 빼닮은, 옅은 금발 머리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소년.
나이를 먹으면 더욱 남자답게 변하겠지만 이대로만 자라 주면 여심을 흔드는 미청년이 될 것이다.
“…….”
천천히 눈을 뜬 사울 왕자는 몇 번 눈을 끔뻑였다.
그리곤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참이나 말없이 머리를 부여잡는 그의 모습에 나이 든 시종이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요?”
“다소 혼란스러우신 모양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눈빛이 맑아지고 있으니 곧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울 왕자는 한참이나 혼란스러워 했다.
무슨 일인지 입을 열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라던 마법사가 먼저 걱정이 되어 다시 마법을 쓰려는 찰나였다.
사울 왕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이 든 시종이 사울의 속내를 읽고 재빨리 말했다.
“거울을 가져다 드려라.”
사울 왕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 닮은 자기 얼굴을 소중히 여긴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 얼굴 생각이 먼저 난 것이리라.
곧 시녀 한 명이 냉큼 손거울을 바쳤다.
사울 왕자는 거울을 받아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 정말…….”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사울 왕자가 손거울을 놓았다.
그리곤 현기증이라도 느낀 듯 천천히 침대에 쓰러졌다.
주변에서 다시 난리가 났다.
“어서 물과 약을 가지고 와라!”
“치료 마법을 다시 시전하겠습니다!”
소란 속에서 사울 왕자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몰아친 폭풍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사울의 머릿속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것들이 떠올랐다.
사울 다리우스.
다르센 왕국의 5왕자.
사고 이전까지만 해도 이 하나의 기억만이 사울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정체성이 떠올랐다.
롤랜드 제니스타.
가멜다 왕국의 귀족이자 왕국 군 소속 마법 부대 장교.
중앙 정계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 하급 귀족이었지만 왕국에 충성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맞다.
그날이 왔었다.
롤랜드 최후의 날 말이다.
요새 사수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중 ‘검은 흉성’ 카스텔이 등장했다.
검은 흉성에게 맞서 보았지만 상대는 너무나도 강했다.
결국 롤랜드는 카스텔에게 패했고, 죽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눈을 떴다.
적국이었던 다르센 왕국의 왕자가 된 채로.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은 사울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마 자신이 미친 걸까?
하지만 양쪽의 정체성과 기억이 뚜렷한 걸 보니 미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다.
과거의 자신은 롤랜드였지만, 지금 자신은 사울 왕자라는 것.
전장에서 전사한 롤랜드가 적국의 왕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머리의 상처를 기점으로 까맣게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도 떠올리고 말이다.
일부 마법사들이 주장하는 전생이니 환생이니 하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당한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다.
죽은 롤랜드가 사울 왕자로 환생했다는 것 말이다.
가멜다 왕국의 귀족이 적국 다르센 왕국의 왕자로 환생한 것이다.
‘이런 미친.’
어린 왕자가 남들 앞에서 내뱉으면 안 될 상스러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두 가지 정체성 모두가 현실이다.
하지만 이 믿기 어려운 현실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란 말인가.
“…….”
혼란스러워 하던 롤랜드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녀와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롤랜드’에게는 낯선 광경이다.
저택 통틀어 일하는 하인은 시종과 시녀 한 명씩 총 두 명뿐이었다.
시종과 시녀는 병든 어머니를 돌봐 드려야 했기에 자기 일은 스스로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사울’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죽은 후궁의 아들로서 왕실의 곁가지 취급을 받는 사울이지만 엄연히 국왕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다.
사울만을 받드는 시종과 시녀들이 있는 게 당연했다.
모두들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이대로 입 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거죠?”
사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시종과 시녀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이 든 시종이 그런 사울에게 질문했다.
“전하, 기억이 안 나십니까?”
“음…….”
롤랜드의 정체성과 사울의 정체성이 뒤얽힌 와중에도 ‘그 일’에 대한 기억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던 사울은 자신의 궁에 마련된 서재에서 책을 찾던 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커다란 책장과 충돌했고, 그 충격으로 책장 위에 꽂혀 있던 책 몇 권이 사울의 머리에 떨어졌다.
머리에 피가 터져 나올 만큼 상처가 컸고, 그 충격으로 태어나기 전 기억을 되찾았다.
기억을 떠올림과 동시에 사울은 실수를 깨달았다.
‘하급 귀족 롤랜드’는 웬만하면 존댓말을 썼다.
혹여나 다른 사람에게 밉보여 약점이 잡히거나 출셋길이 막히는 걸 피하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반면에 ‘사울 왕자’는 시녀와 시종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아랫것들을 나쁘게 대하진 않았지만, 말 그대로 아랫것들처럼 대했다.
지금 이 몸은 ‘롤랜드’가 아니라 ‘사울’의 것이다.
행동도 사울 왕자처럼 해야 한다.
“그레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사울의 말투가 바뀌자 나이 든 시종 그레이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책이 쏟아진 것 까지는 기억나는데.”
“안심하십시오. 치료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조금 전 거울을 보았을 때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마법으로 치료하더라도 큰 상처를 바로 말끔히 낫게 하기는 어렵다.
이마의 은은한 통증은 아직 상처가 덜 나았다는 증거겠지.
“그랬군.”
눈앞의 나이 든 시종, 그레이는 사울의 기억 속에서 존재감이 컸다.
지금 사울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사울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난산 끝에 사울을 낳은 어머니는 이윽고 산욕열에 시달렸다.
심한 산욕열은 마법으로도 고치기 어려웠고, 결국 사울을 남긴 채 어머니가 먼저 떠났다.
이후 사울은 배경도 뭣도 없는 왕실의 곁가지로서, 존재감 없이 10년의 삶을 보냈다.
어머니가 쓰던 이 ‘상아 궁’을 물려받아 책이나 공상에 빠져 지내던 얌전한 소년.
그것이 사울 다리우스였다.
시종 그레이는 사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어머니를 보좌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사울을 보좌했다.
사울 기억 속에서 그레이는 아들에게 무심한 ‘국왕이자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왕자님’이 누구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그레이가,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롤랜드니 전생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저들이 사울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고 유폐될 것이다.
사울의 말을 믿으면 적국 귀족의 혼을 이어받은 왕실의 위험 분자라며 유폐시키는 건 물론,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거둘지 모른다.
‘지금은… 모른 척 하자.’
결심했다.
지금은 철저히 적국의 왕자, 사울 다리우스가 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