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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4화 (4/232)

4화

목표를 세운 사울은 일단 지금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살폈다.

왕실의 곁가지라지만 그래도 국왕의 친아들이다.

사울 면전에서 고개 빳빳이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다르센 왕국 통틀어 열 명이 넘지 않는다.

배경 하나는 하급 귀족이었던 전생에 비해 훨씬 나은 셈이다.

이어 사울은 자신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같은 나이 또래보다 작고 허약한 몸.

다행히 아직 사울은 어렸고, 특별한 병을 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잘 먹고 부지런히 운동하면 훨씬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마법이었다.

전생의 롤랜드는 마법 천재는 아니라도 수재 소리는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몸의 마법적 재능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마법 천재는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울은 아직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사울이 ‘희대의 마법 천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생의 마법 지식은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 있다.

“가지지 못한 걸 탓해 봐야 의미 없지.”

일단 사울은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결심한 사울은 그레이를 불렀다.

“그레이. 내가 결심한 게 있어.”

“무엇입니까? 전하.”

“그동안 내가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던 것 같아.”

사울의 말에 그레이가 눈을 끔뻑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쓰러지고 나서야 깨달았어. 지금처럼 궁전 구석에서 책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쌓고 배우며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많은 것을 배우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다.

나라를 위한 충성이나 왕족의 의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것일 뿐.

어쨌든 거짓은 아닌 사울의 말에 그레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소피아 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돌아가신 어머니 이름까지 꺼내며 눈물을 내비치는 그레이의 모습에 사울은 조금 씁쓸했다.

‘그레이가 내 정체와 내 목표를 알게 된다면…….’

더 출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울에 대한 충성심으로 여기까지 온 그레이다.

그런 그레이가 사울의 전생에 대해 알면 혼란스러워하고, 또 상처받을 것이다.

사울의 복잡한 속내를 알 리 없는 그레이가 신이 나 물었다.

“바로 폐하께 청을 넣겠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싶으십니까?”

“음… 일단 몸부터 좀 단련하고 싶어. 그 다음에는 무술과 마법을 배우든가.”

사울의 말에 그레이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치나 다른 학문을 익히시려는 게 아닙니까?”

정치?

사울은 물론 롤랜드와도 큰 인연이 없던 분야다.

물론 롤랜드도 정치와 전혀 인연이 없지는 않았다.

하급 귀족이 출세하려면 줄을 잘 잡거나, 최소한 썩은 동아줄이 무엇인지 구분할 줄 아는 정치 감각이 필요했다.

롤랜드의 삶에서 정치란 딱 그 정도였다.

마법사 장교로서 출세하는 데 방해되지 않을 정도의 처세술 말이다.

지금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이왕 왕자로 태어난 이상 정치를 배우고 왕위 계승권까지 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왕위 계승권을 노린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었다.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힘 있는 친척도 없는 사울이 세력을 모으려면 어떻게든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

두각을 나타내려면 역시 마법 쪽을 노리는 게 수월할 것이다.

전생에 익힌 마법 지식이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안일하게 살아왔지만 이젠 아니야. 복수를 하려면 강해져야 할 테고, 그러면 날 노리는 놈들도 많겠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 해.’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말했다.

책벌레

“마법 쪽에 흥미가 가서. 그러니 준비해 줘.”

“아, 알겠습니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고 즉각 사울의 명령을 이행하러 갔다.

그런 그레이의 모습에 사울은 쓴웃음을 흘렸다.

* * *

왕실 시종장 알레프는 상아 궁에서 온 연락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울 왕자께서 무술과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하신다고?”

“그렇습니다.”

“그 책벌레 왕자님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르센 왕실 시종장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알레프는 하얗게 센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울 왕자가 얼마 전 머리를 다쳤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후 완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요청이 왔다.

일단 알레프는 국왕에게 연락을 넣었다.

얼마 후, 국왕 마렌이 알레프를 불러들였다.

“폐하.”

국왕의 집무실에 들어선 알레프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으리으리한 탁자 위에 깨끗이 정리된 문서들이 쌓인 게 보였다.

그중 한 장의 문서를 읽던 마렌은 잠시 문서를 내려 두고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울이 무술과 마법을 배우기 원한다고?”

“네. 시종 그레이가 제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그레이가 한 말이면 틀림없겠군.”

잠시 생각하던 마렌이 피식 웃었다.

오랫동안 마렌을 모셔 온 알레프도 그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 지 읽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이럴 때는 그저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답이다.

마렌이 입을 열었다.

“조만간 내 자식들을 만날 자리를 가지겠다. 그 아이도 참석시키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마렌이 직접 아들 문제를 결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명령을 받들고 나서는 알레프에서 눈길을 거둔 마렌은 다시 문서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국정을 살피면서도 마렌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연약한 아이가 갑자기 마법과 무술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후훗. 오래 살고 볼 일이군.”

* * *

아바마마의 초대는 갑작스러웠다.

“폐하께서 이틀 뒤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국왕의 ‘초대’는 ‘명령’과 동의어다.

죽을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면 국왕의 식사 초대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초대를 받은 순간 사울은 긴장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전생을 알고 초대한 것일 리는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종종 있는 일이었다.

국왕 노릇 하느라 바쁜 아버지라도, 가끔은 자녀들을 불러 함께하는 시간을 만들고는 했다.

“누가 참석하지?”

“다른 왕자님들과 왕녀님 몇 분도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알았어.”

아바마마로도 모자라 형제자매들까지 참석하는 저녁 식사 자리.

기억을 되찾기 전의 사울은 이런 모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특별히 사이가 나쁜 형제자매는 없었지만, 좋은 형제자매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키진 않지만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초대이니…….”

이틀 후, 사울은 초대 장소인 흑장미 궁으로 향했다.

주로 국왕이 손님을 대접할 때 쓰는 장소로서, 화려함이나 규모는 상아 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이름처럼 검은 장미를 묘사한 장식품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미 몇 번 와 본 곳이지만, 기억을 되찾고 처음 보는 흑장미 궁의 모습은 또 다른 멋이 있었다.이에요

‘확실히 화려한 궁전이야. 왕궁의 화려함으로만 따지면 가멜다 왕국 이상일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울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상대를 알아본 사울이 먼저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다르센 왕국의 4왕자.

사울 바로 위의 형 조나단 다리우스였다.

사울과 함께 아직 두 명뿐인 ‘후궁 소생의 왕자’이기도 했다.

조나단은 또래보다 작고 가느다란 체구의 사울과는 외모부터 확연히 달랐다.

열두 살의 나이에 열다섯 살은 되어 보이는 덩치를 자랑했다.

문무를 겸비한 아버지 마렌 왕의 재능 중 ‘무’를 이어받은 듯 검의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조나단은 사울의 인사를 선선히 받아 주었다.

“그래. 오랜만이다. 다친 곳은 괜찮으냐?”

“네. 이제 다 나았어요.”

“허구한 날 서재에 틀어박혀 있으니 그런 사고를 당하는 거지. 검이라도 배우는 게 어떠냐?”

“네. 검과 마법, 둘 다 배워 볼 생각이에요.”

“잘 생각했다. 명색이 왕자라면 전장에는 안 나가도 자기 몸은 지킬 줄 알아야지.”

기억대로 조나단은 사울을 썩 나쁘게 보지 않았다.

이렇게 만나면 안부를 주고받고 간단한 덕담도 나누는 사이다.

사울과 조나단 모두 왕실의 서자들이다.

왕국 법에서 적서 차별은 인정하지 않았다.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원칙하에 후궁 소생의 자녀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부여되었고, 능력과 세력만 있으면 왕위 계승권 1위, 곧 태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원칙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후궁 소생의 서자들은 왕비 소생인 적자들보다 여러모로 불리했다.

지금은 사망한 전 왕비의 아들이자 1왕자인 실베스터 다리우스.

후궁 출신이지만, 전 왕비가 숨을 거두며 새로 왕비가 된 제비아 다리우스의 아들인 2왕자 카리스 다리우스.

왕비 소생이자 1왕자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실베스터.

‘지금 살아있는’ 왕비 소생인 카리스.

왕국 사람 대부분이 둘 중 한 명이 차기 국왕으로 유력하다고 점치는 이유였다.

결국 사울과 조나단은 후궁 소생일 뿐이다.

태생적으로 한 계단 낮은 취급을 받는 서자들인 탓일까.

사울과 조나단 사이에는 무언가 통하는 공감대가 있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식당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두 왕자였다.

두 왕자를 본 사울과 조나단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형님.”

“형님.”

1왕자 실베스터 다리우스.

2왕자 카리스 다리우스.

이미 열아홉, 열일곱 살인 두 왕자는 어린 사울과 조나단과는 달리 청년티가 났다.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들답게 둘 다 왕국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들었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온 두 왕자는 사울과 조나단의 인사를 선선히 받아 주었다.

“오랜만이다.”

“다친 곳은 괜찮으냐?”

실베스터와 카리스의 질문에 사울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네, 다 나았어요. 고맙습니다, 형님들.”

실베스터도 카리스도 사울의 인사에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왕자는 국왕의 장남과 차남이며 후궁이 아닌 정실 소생이다.

왕실에서도, 귀족들도 실베스터나 카리스 둘 중 한 명이 차기 국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었다.

그 탓에 실베스터와 카리스의 사이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입으로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눈빛은 달랐다.

서로를 적대하는 건 아닐 지라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 입장에서는 눈에, 나아가 머리에 담아 둘 만한 광경이었다.

두 유력 왕위 계승권자가 서로를 경계하고 있다.

언젠가 이용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는 사이 또 한 명이 식당에 들어왔다.

안경을 낀 차가운 인상의 소녀.

국왕 마렌의 세 번째 자식이자 장녀로서 왕국의 1왕녀인 루시아 다리우스다.

카리스처럼 현 왕비 제비아 다리우스의 소생이라 태어날 때부터 왕위 계승권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한 왕녀다.

하지만 루시아는 정계 진출을 타진하는 대신 왕국 정보부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점쳐지고 있었다.

루시아가 먼저 두 오빠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울과 조나단도 루시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누님.”

“반갑습니다, 누님.”

“그래. 오랜만이야.”

사울의 앳된 얼굴과 조나단의 다부진 얼굴을 바라보는 루시아의 눈빛은 항상 그렇듯 차가웠다.

피붙이를 대하는 눈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사울 같은 보잘 것 없는 왕자가 아닌,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은 두 오빠를 보는 눈빛마저 차가운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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