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부터 사울은 루시아를 꺼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누님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바마마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속이 깊다 못해 음험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무튼 인사를 나눈 네 명의 왕자와 한 명의 왕녀는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나이도 어리고 서자인 사울은 탁자 제일 구석에 앉아야 했다.
푸대접이 아니라 왕실 예절 상 당연한 일이다.
아바마마를 제외하면 올 사람은 모두 온 것 같다.
몸이 연약하여 먼 곳에 요양을 떠난 왕자나 어린 나이에 큰 잘못을 저질러 신전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왕녀는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을 테니까.
잠시 후, 식당 문이 열리며 마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렌은 신하들과 간단한 국정 회의를 할 때 입는 간소한 예복 차림이었다.
아마 국정 회의를 마치고 바로 온 것일 테다.
사울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왕실의 금지옥엽이라지만 상대는 아버지이자 국왕이다.
예의는 반드시 지켜야 했다.
“아바마마. 어서 오십시오.”
장남인 실베스터가 먼저 인사를 하고, 사울을 비롯한 나머지도 따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런 자리는 오랜만이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사울의 예절은 완벽했다.
다른 왕자, 왕녀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렌은 국왕의 눈으로, 또 아버지의 눈으로 자녀들을 스윽 훑어보고는 상석으로 향했다.
“…….”
지나가다 사울과 눈이 마주친 마렌이 미소를 보였다.
“……!”
마렌의 미소를 본 순간, 사울은 깨달았다.
이 자리는 자신 때문에 만들어 진 자리임을.
사울은 한층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의 말실수가 상상 이상의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사울이 마음을 다잡는 사이 마렌은 상석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 앉았다.
곧 시녀들이 준비된 요리를 내왔다.
최고의 요리사들이 최고의 재료로 만든 최고의 요리들이었다.
평소 사울이 먹는 식단도 충분히 고급이었지만 지금 나오는 요리들은 사울 눈에도 사치스러운 진수성찬이었다.
“자. 일단 먹자구나.”
“네, 아바마마.”
모두들 식사를 시작했다.
사울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눈앞의 음식을 즐겼다.
보이는 것만큼 맛도 훌륭했다.
사울은 음식 맛을 즐기는 건 물론 평소보다 많이 먹으려 노력했다.
몸을 키우기 위해 식사량부터 늘리기로 한 참이었으니까.
그런 사울에게 조나단이 한마디 했다.
“평소보다 많이 먹는구나.”
“네. 형님. 좀 더 건강해지고 싶어서요.”
“좋은 일이다. 건강해지려면 많이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만한 게 없다.”
조나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시선 역시 사울 쪽을 향해 있었다.
지금 모인 건 사울 때문이라는 것을 모두들 깨달은 것이다.
사울은 모르는 척 계속 식사를 했다.
그때 마렌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얼마 전 사울이 부상을 입었다 완치되었다. 이건 그런 사울의 완치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다.”
마렌의 말에 왕자와 왕녀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사울에게 말했다.
“축하한다. 사울.”
“축하해. 사울.”
사울은 먹던 음식을 재빨리 삼킨 뒤 인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고마워요. 형님, 누님.”
“그리고 말이다, 사울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
“본격적으로 무술과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구나.”
이미 말을 들은 조나단과 냉정한 루시아는 놀라지 않았지만, 실베스터와 카리스는 조금 놀랐다.
“사울이 무술과 마법을 배운다고?”
“진담이냐?”
형님들의 의아한 표정에 사울은 확실히 자신의 뜻을 밝히기로 했다.
“저는 진지합니다. 아바마마.”
“기특하군. 이런 난세에서는 왕자나 왕녀도 무술이나 마법을 배우고, 또 써야 할 때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책만 보던 네가 왜 갑자기 그런 기특한 생각을 품게 되었느냐?”
어차피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사울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이번에 다치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뭐랄까…….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 말입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어린애가 하기에는 너무 조숙한 말이었을까.
하지만 사울은 이왕 꺼낸 말이니 그대로 밀어붙였다.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고, 저도 큰일 날 뻔 했지요. 언제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제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게 허락되는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이 말도 너무 조숙했을까.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마렌이 크게 웃기 전까지는 말이다.
“후후, 하하하하!”
마렌의 호쾌한 웃음소리는 누가 봐도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이에 모두들 안심하고 따라 웃었다.
“기특하구나. 그래, 맞는 말이다. 분수를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 능력을 닦고 높이 올라갈 생각을 해야지. 그를 위해 무술과 마법을 익히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가멜다 왕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는 검과 마법보다 중요한 게 없을 테니까.”
“네. 제 소원은 가멜다 왕국 국왕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 아바마마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하. 그거 참 장한 소원이로구나.”
이런 사울의 말에 모두들 납득한 모양이었다.
실베스터도, 카리스도, 조나단도 사울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건 루시아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안경 너머의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루시아가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냉정함으로만 따지면 닳고 닳은 군주 마렌을 능가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루시아는 다른 왕자보다도, 마렌보다도 더 주의해야 할 상대일 수 있다.
사울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그런 누님을 마주했다.
“자. 그럼 이 자리는 사울 왕자의 완치, 그리고 새로운 전진을 위한 기념 연회라는 것으로 하자.”
“네, 아바마마!”
아바마마도, 형제자매도 사울을 축하해 주었다.
사울은 복잡한 마음속에서도 어색한 미소로나마 모두에게 답했다.
* * *
자녀들과 연회를 마친 마렌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내일 아침이 되기 전 처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마렌은 자정이 되기 직전에야 일들을 거의 마쳤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 뿐이다.
마렌의 머릿속에 사울의 말이 떠올랐다.
‘제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게 허락되는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사울의 말을 떠올린 마렌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마치 사람이 변한 것 같다.
분명 사울은 이런 말을 하는 녀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쁜 쪽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직 어리고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
무언가 목표를 세웠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마렌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을 울렸다.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알레프가 재빨리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래. 여기 검토를 마친 문서들이다.”
“곧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밖에 하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하나 더 있다. 사울 말이다.”
“왕자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셨습니까?”
“그래. 녀석도 슬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는데, 늦지 않게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지. 이 난세에 고귀한 핏줄로 태어났으면 그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사울 왕자님이 무술과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적절한 선생 감을 찾아볼까요?”
“애써 찾을 필요는 없다. 기특한 아이이니, 최고의 선생을 붙여 주고 싶으니까.”
“최고의 선생이라면…….”
마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마녀의 몸이 다 나았다지?”
“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알레프는 황급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네, 폐하. 이제 움직이는 데 별 문제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 가멜다 왕국이나 당장 휴전 조약을 깰 마음은 없다. 따라서 검은 마녀가 당분간 나설 자리도 없지. 그러니 그녀를 내 아들의 스승으로 삼는 게 어떤가?”
“…….”
처음에 알레프는 마렌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검은 마녀.
분명 적국인 가멜다 왕국에서는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검은 흉성’ 이라고.
* * *
며칠 후.
사울이 머무는 궁전에 통보가 왔다.
“오늘 날 가르칠 선생님이 온다지?”
“네. 전하.”
“뭐 하는 사람이라고?”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라고 들었습니다.”
오늘부터 사울은 마법을 배우기로 했다.
아바마마께서 친히 이름난 실력자를 보내 주신다고 했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보내 주실 정도면 그렇게 실력 없는 녀석이 오지는 않겠지. 전생의 내 실력 정도만 되어도 배울 만 하겠는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사울은 상아 궁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눈에 띈 궁의 경비병 한 명을 차출해 도우미 역할을 맡기고 운동을 시작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괜찮아. 운동하는 거나 잘 도와줘.”
사울도 무리해서 운동 할 생각은 없었다.
어리고 약한 몸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체력과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간단한 운동 위주로 해나갔다.
본격적으로 마법과 무술을 배울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몸은 만들어야 했으니까.
“후우…….”
가벼운 운동이었는데도 오래잖아 체력의 한계가 느껴졌다.
역시 또래보다 몸이 허약한 탓인지 가벼운 운동에도 체력의 부담이 느껴졌다.
운 좋게 드래곤의 피라도 구해 마시지 않는 한 단숨에 체력을 높일 방법은 없다.
중요한 건 노력과 인내다.
운동을 마치고 목욕 후 옷을 갈아입으니 때마침 연락이 왔다.
“전하. 선생님께서 곧 오신답니다.”
“알았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바로 모셔.”
“네.”
왕자의 몸이니 평상복 차림으로 선생을 맞아도 무례는 아닐 것이다.
사울은 응접실에서 책을 보며 선생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응?”
기대감 속에서 책장을 넘기던 사울은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무언가 강력한 존재가 다가오는 느낌.
이상하게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
“어서 오십… 꺄악!”
“기,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녀와 시종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자객을 맞이한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할 만큼 놀라는 목소리.
대체 누가 오고 있다는 말인가.
“저, 전하.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경비병의 목소리에 사울은 심호흡과 함께 말했다.
“모셔.”
문이 열리고, 선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을 본 사울의 눈이 커졌다.
“아니?”
사울은 하마터면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다만, 마음의 준비를 했기에 크게 숨을 내쉰 것으로 끝났다.
천천히 들어오는 선생의 모습을 본 순간, 전생에서 보았던 광경이 겹쳐졌다.
롤랜드 최후의 날.
마법 한 방으로 굳게 잠긴 내성 문을 박살 내며 등장한 긴 흑발을 휘날리는 마법사.
얼굴에는 검은 철 가면을, 몸에는 망토를 걸친 마법사.
다르센 왕국이 자랑하는 대마법사이자, 율렌 섬 최강의 전투 마법사로 불렸던 자.
“검은 흉성.”
‘검은 흉성’이라 불린 전투 마법사.
다르센 왕국에서는 ‘검은 마녀’ 라고 불리는 자.
카스텔.
“…….”
사울이 무심결에 내뱉은 ‘검은 흉성’이라는 말을 들은 카스텔이 가면을 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사울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라에서 카스텔은 저주스러운 ‘검은 흉성’이 아닌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검은 마녀’로 통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사울은 말실수를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감추며 생각했다.
‘선생이라는 게 저놈, 아니, 저년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