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200년 전까지만 해도 다르센 왕국 영토의 절반 이상은 영주들이 다스렸다.
영주는 왕실에 충성하면서 그 대가로 자치권을 얻어 영지를 다스리며 지방의 작은 왕으로 군림했다.
이런 상황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간 전쟁이 격화되면서 서서히 바뀌었다.
총력전을 벌이던 두 나라 모두 왕실에서 영주들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갖춰 나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그 일을 해냈다.
이후 율렌 섬에서 ‘영주’라는 존재는 대부분 사라졌다.
지금은 영주라는 존재 자체가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시대다.
다르센 왕국에서 영주는 두 명밖에 없었다.
그중 한 영주가 다스리는 곳이 바로 사울이 목적지로 삼은 갈레트 지방이었다.
갈레트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던칸 홉킨스 남작은 왕실에서 온 연락에 크게 놀랐다.
“지금 뭐라고 하셨소?”
소식을 가져온 남자, 왕실 감찰관 피에르가 말했다.
“사울 다리우스 왕자님께서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고 하십니다.”
익숙한 피에르의 사무적인 말투에 영주 던칸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님을 확인했다.
차라리 귓병이 생긴 게 나았을지 모를 일이지만.
사울 다리우스?
이름은 들어 보았다.
후궁 소생의 왕자라던가.
그 외에 특별한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후궁 소생이든 뭐든 왕자라면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거물이다.
그런 거물이 갑자기 이 갈레트 지방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니.
“왕자님이 여행이나 요양을 하러 오신다는 말이오?”
던칸의 말에 피에르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듣기로는 영주님을 돕기 위해서 오신답니다.”
“날 돕는다고?”
던칸에게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갈레트 지방 전체가 홉킨스 가문이 다스리는 영지라고 하지만, 영주의 통치력이 제대로 미치는 곳은 영지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 절반은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의 땅이거나 쓸모없는 땅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중립 지대다.
도움이라면 언제나 필요했다.
문제는 뭣도 없는 왕자가 이곳에 오는 건 도움이 아니라 짐덩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 왕자님이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오? 우리 영지에 기부라도 하신다는 말이오?”
왕실에서 홉킨스 가문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파견된 감찰관 피에르도 던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입장을 바꿔 자신이 영주였어도 비슷하게 반응했을 테니까.
하지만 왕실 감찰관 피에르는 어디까지나 왕실을 대변하는 자였다.
감찰관의 임무는 영주에게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아가 감시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뭐요? 그럼 결국 영지에서 왕자님 대접이나 하라는 말 아니오?”
“진정하십시오. 왕자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분이 함께 오신답니다.”
“믿을 만한 분이라니. 검은 마녀라도 데려 온답니까?”
콧방귀를 뀌던 던칸은 피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카스텔이 온다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연락을 받기로는 왕자님의 호위 겸 선생으로 따라온다고 합니다.”
“선생? 검은 마녀가 왕자 가정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는 말이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그저 왕실에서 연락을 받았을 뿐입니다.”
“으음…….”
던칸은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검은 마녀가 같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 틈을 노려 피에르는 이야기를 진전시키기로 했다.
“검은 마녀는 이 영지의 은인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왕자님과 함께 오시는 겁니다. 그런 분들의 대접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는 수 없지.”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왕자님이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십시오. 왕실에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피에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홀로 생각하던 던칸은 자신의 두 자녀를 불렀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먼저 도착한 건 던칸의 하나뿐인 아들 칼랜드 홉킨스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칼랜드는 이미 던칸의 후계자로 낙점 받았고, 소영주라 불리며 여러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칼랜드의 복장만 봐도 그가 무슨 일을 하다 달려왔는지 알 만 했다.
“재판을 하다 온 거냐?”
“네, 아버님. 중요한 용무가 있다고 하셔서 재판을 멈추고 달려왔습니다.”
“그래, 네 동생도 오면 이야기를 하마.”
이어 던칸의 하나뿐인 딸 아이나 홉킨스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님, 부르셨어요?”
평범한 귀족 차림인 던칸이나 칼랜드와는 달리 아이나는 꽤 눈에 띄는 차림이었다.
몇 달 전 성인식을 치른 귀족 아가씨라면 으레 입고 다닐 드레스 차림이 아닌, 화려한 장식 하나 찾아보기 힘든 ‘실전용’ 가죽 갑옷 차림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주의 딸이 아니라 새내기 여자 병사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 다치지는 않았느냐?”
“그깟 도적놈들이나 깡패 따윈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만만한 아이나의 말에 던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랜드는 차기 영주가 되기 위한 후계자 수업을 착실히 받고 있고, 아이나는 전사의 길을 걷고 있다.
예로부터 갈레트 지방은 무와 마법을 중시했다.
아이나가 귀족 영애의 신분으로 무와 마법을 익힌다고 흠이 되는 건 아니다.
귀족으로서 예절이 다소 부족하고 지나칠 만큼 올곧은 성품은 걱정이 되었지만.
던칸은 두 자녀들을 스윽 훑어본 뒤 주변도 살폈다.
주변에 자신과 두 자녀만 있다는 것을 확인한 던칸이 입을 열었다.
“왕실에서 통보가 왔다.”
“왕실에서? 무슨 일입니까?”
대답한 칼랜드는 물론 아이나의 표정도 진지해졌다.
“사울 다리우스라고 들어 보았느냐?”
이번에는 아이나가 먼저 대답했다.
“다리우스라면 왕실의 성인데… 사울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요.”
조금 더 생각하던 칼랜드는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5왕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맞다. 5왕자 사울 다리우스. 그가 우리 영지에 온다는구나.”
“5왕자라면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만.”
“얼마 전에 성인식을 치렀다고 들었다.”
칼랜드와 아이나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렀다면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다.
그런 왕자가 영지에 온다는 건 한 가지 의미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놀러 오는 건가요?”
아이나의 노골적인 말에 칼랜드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 딴에는 우릴 도와주러 온다는구나. 마법을 쓸 줄 안다던가.”
“아니, 그 왕자라는 사람은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건가요?”
“이곳이 왕궁처럼 태평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검은 마녀와 함께 온다는구나.”
검은 마녀라는 말에 칼랜드와 아이나 모두 크게 놀랐다.
“카스텔 씨가? 사실입니까, 아버님?”
“틀림없다. 왕자의 호위 겸 선생이라던가 뭐라던가.”
“왕자에 카스텔 씨까지 오신다니… 잠깐.”
무슨 이유에서인지 칼랜드의 표정이 굳었다.
반면에 아이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들과 딸의 온도 차에 던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언가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던칸의 말을 알아들은 칼랜드가 표정을 풀었다.
아이나는 오빠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
“카스텔 씨에 왕자님까지 오신다니, 대체 무슨 이유일까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아무튼 아이나, 나와 칼랜드는 영지 안에서 왕자를 맞이할 테니 네예의없다가 병력과 함께 영지 변경에서 왕자 일행을 맞거라. 명심해라. 상대는 왕자와 이 영지의 은인인 검은 마녀다. 예에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
던칸의 말에 아이나가 눈을 크게 뜨며 자기를 가리켰다.
“제가요?”
던칸도 아이나가 왜 이러는지 잘 알았다.
왕자와 검은 마녀 같은 거물을 맞이하려면 영주 본인이나 자녀가 나가야 격이 맞다.
하지만 아이나는 범죄자를 체포하거나 때려잡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일은 여러 번 해 봤지만 중요한 손님을 처음 맞이하는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나아가 그런 일에 적합한 인재도 아니었다.
지금 아이나의 모습을 봐도 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평민들만큼 예의 없지는 않지만 귀족 영애 기준으로는 몸가짐이 가지런하지 못하다.
저 아이가 왕국 수도의 사교계에 간다면 천하의 왈가닥이라고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저 아이에게 왕자를 맞이하라고 시키면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나았다.
자신이나 칼랜드가 이 저택을 떠났다 만에 하나의 일을 당하는 것 보다는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던칸이 말했다.
“너도 이제는 이런 일을 경험해 볼 때가 되었다.
“아버님, 하지만…….”
“홉킨스 가문의 딸이 영지 범죄자를 때려잡고 몬스터를 베어 넘기는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지 않느냐. 좋은 경험을 한다 생각하고 네가 한번 이 일을 맡아보거라.”
결국 아이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님.”
아이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나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다시 칼랜드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 설마 왕실에서 무언가 눈치를 챈 것일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구나.”
“그럼 대체 왜…….”
“일단 지켜보자꾸나. 왕자와 검은 마녀가 함께 온다는 건 분명 무언가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니.”
“…….”
“명심하거라. 절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네 동생도 지금은 아무것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족한 네 동생을 보냈다. 우리 일을 전혀 알지 못하니 그쪽으로 실수할 일도 없을 테니까. 너도 네 동생이나 손님들이 무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단단히 입단속하거라.”
“네, 아버님.”
* * *
‘좋다, 마음껏 강해져 보거라.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강한 왕족은 많을수록 좋을 것이니. 네가 네 형이나 누나보다 더 유능하고 많은 이들의 인망을 얻는다면 왕관을 물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성인식 날 아바마마의 말씀을 떠올리던 사울은 점점 바깥 풍경이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한참 숲이 이어지다 점점 나무들이 작아지는가 싶더니 초원이 펼쳐졌다.
갈레트 지방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사울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레이에게 물었다.
“갈레트 지방에 가 본 적 있어?”
“없습니다, 전하.”
“거친 땅이라고 들었어. 네가 따라올 필요까지는 없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자님이 가시는데 이 그레이도 당연히 따라가야지요.”
나이는 먹었지만 그레이는 여전히 정정했고 행동이나 목소리도 또렷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따라오겠다는 걸 말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어 사울은 그레이 옆에 앉아 있던 카스텔에게도 물었다.
“선생님은 갈레트 지방에 가 본 적이 있지요?”
“네, 전하.”
“건조하고 거친 곳이라지요?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종족과 맹수에 몬스터까지 출몰한다는데 사실인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본 것은 전장과 폐허뿐이었으니까요.”
사울은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렸다.
6년 전쟁 당시 카스텔이 갈레트 지방을 위기에서 구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것이 굳이 카스텔을 데려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자신의 스승이며 측근이자 호위로서 아직 쓸모가 많다는 이유가 더 컸지만.
한참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마차 주변에서 사울을 호위하던 기병 한 명이 사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전하, 곧 영지에 도착합니다!”
“알았어.”
영지 입구에 작은 요새가 있다고 들었다.
영주가 특별히 보낸 사람이 영지 입구에서부터 사울을 안내할 것이라던가.
오래잖아 요새가 보였다.
말이 요새지 다 무너져 가는 성터에 가까웠다.
몇몇 병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버려진 요새는 아닌 것 같지만 많은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어쨌든 요새에 도착한 마차가 멈췄다.
사울이 마차에서 내리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영주의 환영단이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