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대충 전투 복장으로 갈아입은 사울은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얼굴이나 머리보다는 복장과 무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최고급 양모로 만들어진 바지와 셔츠, 그리고 얇은 코트.
장식을 적게 붙여 왕자의 옷치고는 비교적 검소하게 만들어졌지만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숨길 수 없다.
왕자가 행사에 입고 나가기에는 곤란하지만, 평상시나 여행 시에는 문제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 옷은 왕자의 흔한 평상복 같은 게 아니었다.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동원되어 제작한 ‘마법 갑옷’이라 부를 만한 물건이다.
옷의 무게나 두께는 평범한 옷과 큰 차이가 없지만 웬만한 판금 갑옷 못지않은 방어력을 자랑했고, 마법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하나같이 웬만한 저택 한 채 가격을 자랑하는 고급 장비들이며, 전생에는 꿈도 못 꾼 물건들이다.
전투용 복장을 입고, 마법 검까지 손에 쥐니 확실히 실전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다시 한번 거울을 살펴본 사울은 검을 허리에 찬 채 천막을 나왔다.
“전하.”
아이나가 달려와 사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이나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가죽 갑옷 차림이었다.
명색이 귀족의 물건이라 아이나의 갑옷에도 마법의 힘이 조금 느껴졌다.
“마법 갑옷이군요. 무게를 줄이고 강도를 높인 건가요?”
“그렇습니다. 전하.”
갑옷이나 무기, 혹은 장신구를 마법이나 연금술로 강화시키는 건 흔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무게를 줄이고 강도를 높이는 건 가장 일반적인 ‘마법 강화’ 과정에 속했다.
마법 강화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기에 일반 병사들은 대장장이가 만든 일반적인 무기와 갑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부대 지휘관급만 되도 마법으로 강화시킨 장비를 한둘 정도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아이나도 영주의 딸답게 기본적인 마법 장비는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막에서 나온 사울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마을을 살폈다.
많아 봐야 스무 가구 정도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천막을 높은 곳에 쳤기에 마을의 집들은 물론, 주변에 목책을 세워 방벽을 만든 것까지 잘 보였다.
마을인 동시에 작은 요새라고 할 만한 구조였다.
“저 목책은 몬스터들 때문에 세운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전하. 저희들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서는 도적들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야수나 몬스터들은 영주군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요.”
“과연.”
후환을 두려워하는 도적들은 대개 여행객을 털지 마을을 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몬스터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마을을 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작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도적보다 마을 자체를 공격할지 모를 몬스터가 더 위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보통 몬스터 사냥은 영주 군의 몫이지요?”
“네.”
“분명 왕국 군도 근처에 주둔하고 있을 것인데. 그들의 도움은 받지 않나요?”
“왕국 군은 주로 국경 경비 임무에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자치도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지에서 날뛰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은 결국 영주의 몫이다.
그리고 오늘은 왕자님과 영주의 딸이 친히 그 몬스터를 처리하러 왔다.
아이나는 이런 일을 여러 번 해 본 눈치였다.
방심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전혀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사울 역시 전생에 몬스터를 사냥해 본 경험이 있었다.
몬스터 사냥은 인간 적들과 싸우는 것과는 또 다르다.
짐승에 가까운 존재지만, 일반 짐승보다 훨씬 강한 말 그대로 ‘괴물’들이다.
또한 특정 지역에서 발붙이고 사는 토박이 몬스터들은 대개 그 지역 지리에 익숙한 놈들이었다.
어지간한 실력자라도 몬스터 사냥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하물며 왕국 수도를 나온 적도 거의 없는 왕자가 몬스터 사냥에 나선다?
누구라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의 선생님이자 측근, 호위를 겸하는 존재가 없다면.
“…….”
자신의 천막에서 나온 카스텔이 조용히 사울 뒤에 섰다.
아이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카스텔에게 동경의 눈빛을 보내며 인사했다.
“카스텔 씨.”
끄덕.
카스텔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까닥거렸다.
작위도 없는 평민이 귀족의 딸을 대하는 태도로서는 상당히 무례했지만, 누구도 카스텔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이 자리의 모두들 카스텔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카스텔이 있기에 몬스터를 상대할 전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카스텔의 약점만 아니라면 그녀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몬스터 토벌을 진행해도 문제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한 한 내가 많이 싸우는 게 좋겠지. 그리고 영주 딸의 실력도 확인하고 싶으니…….’
결심한 사울이 말했다.
“선생님, 이번 몬스터 토벌은 내게 맡겨 주세요.”
“물론입니다. 전하의 목숨이 위태롭지 않는 한 저는 나서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땐 카스텔과 말이 잘 통했다.
반면에 아이나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실력을 얕보면 곤란해요.”
“…알겠습니다.”
상대가 왕자가 아니었다면 한 소리 했을 표정이다.
사울은 속으로 가만히 웃으면서도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자신만만해 놓고 실패한다면 그보다 큰 망신은 없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 마을에 다녀온 영주군의 병사 한 명이 보고해 왔다.
“아가씨. 인근 산에 몬스터 한 무리가 있답니다.”
“무슨 몬스터지?”
“고블린과 그들이 키우는 호그라고 합니다.”
고블린은 사람보다 작지만 재빠르며, 지능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악한 녀석들이다.
호그는 고블린과 공생 관계에 있는 멧돼지 몬스터다.
보통 멧돼지보다 1.5배에서 2배는 큰 덩치에 육식성이며, 인육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
호그가 딸린 고블린 무리가 인간을 약탈하거나 습격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마을 주변에 터를 잡고 지속적으로 습격하거나 아예 마을을 전멸시키는 사례도 있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보고를 듣고 상황을 정리한 아이나가 사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말투나 표정은 예의 발랐지만, 큰 기대는 없는 느낌이다.
뛰어난 스승을 두었다지만 그래 봐야 실전 경험 없는 애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잘못된 대답을 하면 더욱 애송이 취급을 받을 것이다.
사울은 전생의 기억과 이번 생에서 얻은 지식을 조합하여 모범 답안을 찾았다.
“이왕 토벌에 나선 것이니 몬스터들을 전멸시켜야 하겠지요. 토벌에서 살아남은 몬스터가 있다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테니까요.”
“말씀대로입니다.”
“데려온 병력으로 고블린 무리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포위하고, 실력 있는 우리가 직접 무리를 쓸어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울의 의견은 이런 소규모 몬스터 토벌전에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검증된 전략이었다.
이런 사울의 정론에 아이나도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도 찬성합니다.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사울은 아이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았다.
계획대로라면 사울이 선봉에서 직접 몬스터와 싸우는 위험한 역할을 수행할 테니까.
그러자 카스텔이 나섰다.
“전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카스텔이 나선다니 아이나도, 토벌대의 다른 사람들도 사울의 뜻을 꺾지 못했다.
곧 사울의 작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의 병력이 천천히 고블린 무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고블린 무리는 마을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은 황무지에 터를 잡고 있었다.
조잡한 천막까지 세우고 터를 잡은 고블린 무리의 모습에 아이나가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우리 가문이 다스리는 마을을…….”
아이나는 화난 표정으로 고블린 무리를 지켜보면서도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전하. 조만간 포위망이 완성될 겁니다.”
“고블린들도 눈과 귀가 있고 생각 할 줄 아니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 채겠지요. 포위망이 완성되는 대로 공격하는 게 좋겠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송이 왕자가 좋은 의견을 계속 낸 탓이리라.
사울은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이번 작전에서 자신이 끝까지 지휘를 할 수도 있다.
능력과 경험이 충분하기에 일을 망치지 않을 자신도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실전부터 너무 돋보이는 건 의심을 살 수 있다.
지금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또 아이나의 능력도 보고 싶었다.
“나머지는 맡기지요. 아이나.”
“…네, 전하.”
사울의 허락을 받은 아이나는 본격적으로 지휘에 나섰다.
예상대로 포위망은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잠시 후 고블린 무리 가운데서도 움직임이 관찰되었다.
언뜻 봐도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
“저들도 우리 움직임을 눈치 챈 거겠죠?”
“네, 전하.”
대답하는 카스텔의 표정에 걱정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제자의 실력을 믿는 것일까.
‘첫 번째 실전에서 꼴사납게 카스텔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
사울은 검을 손에 쥐었다.
검집에 들어 있는 마법 검을 거꾸로 쥐어 마법 지팡이로 사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마법 검 손잡이 끝의 보석이 은은히 빛나기 시작했다.
아이나도 마찬가지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 손에는 도끼, 다른 손에는 방패.
침착하게 무기를 빠르고 정확하게 뽑아 들어 실전 자세를 취하는 것만 봐도 실전에 익숙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포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알았다.”
보고를 들은 아이나가 사울에게 물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네. 그대도요.”
“감사합니다. 그럼……. 공격하라!”
아이나의 명령에 영주군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블린 무리를 포위한 병력은 무기를 치켜들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아이나의 곁에 있던 병력은 말을 타고 달리는 아이나 곁에 바짝 따라붙어 같이 달렸다.
사울과 카스텔 역시 말을 몰아 그들을 따랐다.
“키에엑!”
고블린 무리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생에 고블린 무리를 몇 번 상대해 본 사울은 이 울음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적이다! 맞서 싸워라!’
해석하면 대충 이런 뜻일 것이다.
겁먹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맞서 싸우겠다는 신호다.
앞서 몬스터 무리로 달려간 아이나가 가장 먼저 말에서 뛰어내렸다.
아이나 뒤에 있던 호위 병력 중 절반은 말에서 내렸고, 나머지는 말에 탄 채 상황을 관망했다.
마법이나 마나를 전혀 못 쓴다면 말 위에서 싸우는 게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마법이나 마나를 쓸 줄 안다면 말은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는 찾기 어렵다.
땅에 발을 디디고 마나를 다루는 게 훨씬 안정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마법사나 마법 혹은 마나를 다루는 전사들이 그러하듯, 아이나는 말에서 내려 고블린 무리와 마주했다.
상대가 고귀한 영주의 딸임을 알 리 없는 고블린들은 괴성과 함께 아이나를 덮쳤다.
역시 말에서 내린 사울도 마법을 준비했다.
혹시나 아이나가 위기에 빠지면 도와주려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꽥!”
고블린 한 마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아이나에게 창을 내질렀다.
아이나는 방패를 쓸 것도 없다는 듯 도끼를 휘둘러 맞섰다.
정확히 휘둘러진 도끼가 날아오는 창날을 쳐 냈고, 이어 몸을 날린 아이나가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머리에 도끼를 맞은 고블린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저 나이에 대단한데.’
아이나의 실력에 사울은 감탄했다.
자신처럼 전생 기억을 가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 순수한 본인 실력일 터.
사울보다 몇 달 앞서 성인식을 한 소녀가 벌써 저런 실력을 보여 주는 건 상당한 재능과 노력이 겸비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사울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고블린이 눈에 띄었다.
총 두 마리다.
한 마리는 양손에 각각 칼을 들었고, 다른 한 마리는 창을 들었다.
고블린이 던진 창이 사울에게 날아왔다.
사울은 준비하고 있던 마법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