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6화 (16/232)

16화

다행히 사울의 걱정은 기우였다.

잠시 생각하던 카스텔이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전하 역시 자질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아직 미흡한 부분도 많지만.”

“그래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지요. 잘 알았어요.”

상황을 수습한 사울은 아이나를 생각했다.

자신보다 불과 몇 달 앞서 성인식을 치렀다는 소녀.

확실히 장래가 기대되는 소녀였다.

‘내 편이 될 사람은 많을수록 좋지. 지금 내 편이라 할 사람은 그레이와 카스텔이 전부이니.’

지금 사울의 목적은 가멜다 왕국의 여러 귀족들, 나아가 가멜다 왕국에 복수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는 믿을 수 있고 실력도 뛰어난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아이나의 실력이라면 틀림없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서두를 필요는 없다.

사울은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영주 저택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 * *

무사히 몬스터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사울은 환영 인사를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승전 축하드립니다. 전하.”

직접 마중 나온 영주 던칸이 고개를 숙였다.

사울도 답례하며 말했다.

“따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력이 대단하더군요.”

“부족한 제 딸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피곤해서 조금 쉬고 싶어요.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전하.”

빨리 쉬고 싶다고 사전에 언급도 했었기에 던칸은 곧장 사울을 손님방으로 모셨다.

사울이 자기 일행과 손님방으로 물러가고, 던칸은 자기 딸을 돌아보았다.

“수고 많았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일단 내 방으로 가자꾸나.”

던칸은 아이나와 칼랜드, 몇몇 측근과 함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모두들 왕실과는 관련이 없는 홉킨스 가문의 일원이거나 충복들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데리고 자신의 방에 도착한 던칸은 본론을 꺼냈다.

“아이나.”

“네, 아버님.”

“그래. 사울 왕자의 실력은 어떻더냐?”

“상당했어요.”

“굉장했다고?”

“네. 대형 호그 세 마리를 마법으로 상대하며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걸 보았어요. 카스텔 씨의 도움도 받지 않고요.”

아이나의 말에 모두들 놀랐다.

호그 세 마리를 순식간에 쓰러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애송이 왕자가 그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다니.

“아가씨, 정말입니까?”

“네. 제가 그분을 챙겨 줄 필요도 없더군요. 몬스터를 직접 마주하고 싸우면서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는 모습이었어요.”

아이나의 말에 영주의 심복들이 한마디씩 했다.

“놀랄 일이군. 분명 사울 왕자는 전장에 나가 본 적이 없을 건데.”

“알아보니 전장에 나가는 건 고사하고 어릴 때는 나약한 책벌레였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던데.”

“남들 몰래 실전 경험을 쌓고 이곳으로 온 거 아닐까요?”

한참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칼랜드가 뒤늦게 말했다.

“아이나.”

“네, 오라버니.”

“사울 왕자의 실력이 너와 비교하면 어떻더냐?”

“네? 그야…….”

잠시 생각하던 아이나가 말했다.

“쉬운 상대는 아닐 것 같아요.”

여동생의 말에 칼랜드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부심 강한 여동생이다.

다르센 왕국을 통틀어 저 나이에 저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나 전사는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런 여동생이 겸손이 아닌 진심으로 저렇게 말 할 정도면 정말 상당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칼랜드도, 나아가 던칸도 아이나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표정이 심각해졌다.

“자기 주제도 모르고 앞뒤 못 가리는 녀석은 아니라는 말이지.”

“네, 아버님.”

“그렇다면 네 계획은 쓸모가 없어졌구나. 왕자에게 전장의 냉엄함을 알려 줘 쫓아 보낸다는 계획 말이다.”

“말씀대로입니다. 솔직히 그 부분에 더 놀랐습니다. 분명 첫 번째 실전이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토록 몬스터 앞에서 침착할 수 있는지…….”

칼랜드도 의문을 표했다.

“왕실에서 무슨 의도를 가지고 왕자를 보낸 것일까요?”

한참 생각하던 던칸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왕실에서 우릴 견제하거나 우리 것을 빼앗으려고 갓 성인식을 치른 왕자를 보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구나. 하지만 아이나 말대로라면 아무 이유 없이 우리 영지에 온 것 같지도 않고……. 짐작조차 가지 않는구나.”

영지 운영, 왕실과의 관계, 이종족 문제, 미개척 지역 및 몬스터 문제, 적국 가멜다 왕국과의 문제까지.

수많은 문제들을 겪으면서도 영주 자리를 지켜 온 던칸으로서도 이번 일은 짐작하기 힘들었다.

모두들 고민하던 중, 문득 칼랜드가 말했다.

“아버님. 이왕 이렇게 된 일, 사울 왕자에게 계속 아이나를 붙여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아이나가 사울 왕자와 친해지면 왕자와 나아가 왕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둘 다 나이도 같고, 정혼자도 없으니 친해진다고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동갑 운운에 정혼 이야기까지 나오자 아이나의 표정이 변했다.

“오라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괜찮지 않느냐. 나이도 같고 사울 왕자는 정혼자는커녕 따로 만나는 영애도 없다고 들었다. 너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단순히 서로 교제를 나누는 건 아무 문제가 없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지만…….”

아이나는 당황했다.

이런 이야기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당혹스럽게도 던칸의 심복들이 칼랜드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그것도 한 방법이겠군.”

“아가씨가 왕자와 교제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일 아니겠습니까. 왕실과 홉킨스 가문을 잇는 새로운 연줄이 생기는 겁니다.”

오라버니의 한마디에 이야기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나는 아버지에게 눈길을 보냈다.

영주인 아버지의 한마디면 이 논의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던칸마저 딸의 기대를 저버렸다.

“괜찮은 생각이군.”

“아버님?”

“다 홉킨스 가문을 위한 것이다. 왕자와 친교를 맺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없던 기회라도 만들어야 할 판에 우리 영지에 왕자가 스스로 굴러들어 왔으니 네가 그와 친교를 맺으면 좋지 않겠느냐?”

가문을 위한 일.

아이나가 마냥 고집을 부리지 못하게 만드는 데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아이나가 주저하자 칼랜드도 거들었다.

“오해하지 말거라. 왕자를 유혹하거나 혼인 약조를 받아 내라는 게 아니다. 그저 왕자를 따라다니며 그와 친해지면 된다. 그 이상은 요구하지 않으마.”

칼랜드의 말에 아이나는 안도했다.

드레스보다 갑옷이 익숙하고, 꽃보다 도끼와 방패가 익숙한 그녀에게 왕자를 유혹하라는 건 불가능한 임무였다.

기적처럼 사울 왕자가 아이나에게 반하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왕실에서 홉킨스 가문과 혼인을 맺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언제나 왕실의 견제 대상인 홉킨스 가문의 딸과 왕자를 결혼시켜 홉킨스 가문의 위상을 크게 높여 주는 일을 왕국이 할 리가 없었다.

어린 아이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친구가 되는 정도면 충분하다.

현실적으로 그 이상은 가능하지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귀족 영애지만, 전사로서의 모습이 더 익숙한 아이나도 이 정도는 납득할 수 있었다.

성공한다면 홉킨스 가문에 큰 보탬이 될 테니까.

“네, 아버님. 가문을 위한 일이라면요.”

아이나의 결심에 던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임무가 막중하다. 어떻게든 우리 가문을 위해서 그 왕자와 친해지고 가까워지거라. 네 미모면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

“정말, 아버님도.”

짓궂은 던칸의 말에 아이나가 조금 얼굴을 붉혔다.

비록 가죽 갑옷 차림이었지만,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그런 딸의 모습에 던칸이 말했다.

“이왕 왕자와 친해질 것이라면 네 오라버니가 성인식 날 선물로 주었던 것을 요긴하게 쓰려무나.”

‘오라버니의 성인식 선물’ 이야기를 들은 아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네? 아버님. 오라버니의 선물이라면…….”

그 말에 칼랜드가 씩 웃었다.

“그래. 그게 좋겠구나.”

“오라버니?”

“사울 왕자는 수도에서 수많은 귀족 영애들과 만나고 교제했을 것인데, 너도 왕자와 교제하려면 수도의 귀족 영애처럼 격을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오라버니의 성인식 선물이 아무래도 내키지 않은 듯 아이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그녀의 편은 없었다.

* * *

첫 번째 실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울에게 돌아온 건 칭찬이나 휴식이 아닌 가혹한 수업이었다.

카스텔은 첫 번째 실전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고쳐 주겠다는 명목 하에 더욱 엄격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언제나 그렇듯 마나가 부족해지면 마나를 채워 주고 체력이 부족해지면 체력을 채워 주며 한계까지 굴리는 무지막지한 수업이었다.

“헉…헉……. 망할.”

왕자 체면도 잊고 절로 막말이 나올 만큼 고된 수업.

카스텔은 사울이 정말 한계에 가까워진 다음에야 수업을 마쳤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휴…….”

사울은 왕자의 체면도 잊고 바닥에 퍼질러 앉았다.

더 이상 카스텔의 마법도 도움이 되지 않았고 휴식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사울이 잠시 숨을 돌리자 카스텔이 말했다.

“계속 이곳에 머무르실 생각입니까?”

“그래야지요. 겨우 한 번의 실전만 겪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나 지성을 가진 이종족과도 싸워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전장에서 종종 몬스터가 동원되는 경우는 있지만, 결국 전장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건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쓰는 인간, 혹은 지성을 가진 이종족이다.

진정한 실전 경험을 쌓으려면 역시 지성을 가진 인간과도 싸워 보아야 할 것이다.

훈련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실전에서 말이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왕자의 몸으로 인간과 실전을 치른다?

다르센 왕국 신민이 왕자와 실전을 벌이자며 무기를 들이대면 그것만으로도 반역죄가 될 수 있다.

웬만큼 간 큰 범죄자라도 사울 ‘왕자’를 상대로 검을 들이댈 녀석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르센 왕국에 속하지 않은 적을 찾아야 할 것인데, 역시 쉽지 않은 문제다.

가멜다 왕국과의 휴전 조약이 아직 유효한 상황이라 가멜다 왕국과 싸울 수도 없으니까.

“몬스터라면 모를까, 인간이나 이종족들은 나와 싸우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다고 가멜다 왕국에 싸움을 걸 수도 없고.”

“정체를 숨기면 됩니다.”

“정체를… 숨겨라?”

“네. 저처럼 가면을 쓰고 이름을 바꾼다면 왕자님의 정체를 모르지 않겠습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눈앞의 카스텔만 해도 그렇다.

특유의 가면과 복장 없이는 아름답지만 멍한 인상의 여자일 뿐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구도 맨얼굴의 카스텔을 ‘검은 마녀’ 혹은 ‘검은 흉성’이라 생각 못 할 것이다.

사울도 마찬가지다.

왕궁 밖에서는 사울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주변을 정리하고 얼굴을 가리는 투구 하나만 써도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것이다.

“괜찮은 생각인데요.”

“저도 경험해 보았습니다. 실전 감각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을 때 종종 가면을 벗고 움직이지요.”

“그래요? 선생님과 싸운 재수 없는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모두 현장에서 처형해도 무방한 자들이었습니다.”

“…….”

굳이 더 물을 필요는 없다.

불쌍한 ‘현장 처형 대상자’들은 문자 그대로 현장에서 처형당했겠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