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약간의 소동 후, 사울 일행은 무사히 동굴에 도착했다.
멀리 동굴이 보이자 카스텔이 먼저 말했다.
“제 걱정은 말고 두 분은 전투에 집중하십시오.”
카스텔의 발작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사울이 아이나에게 말했다.
“그럼 가요.”
“네.”
예전처럼 사울과 아이나가 앞장서고 카스텔이 뒤따랐다.
아이나와 사전에 알아낸 정보와 조금 전 도적이 말한 정보가 모두 옳았다.
동굴 입구에 가까워지면서 몇몇 도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하는 연놈들이냐!”
사울이 얼른 대답하지 않자 도적들이 알아서 결론을 냈다.
“침입자다! 죽여라!”
조금 전 덮쳤던 도적들이 여자 운운한 것에 비하면 그나마 덜 천박한 태도였다.
하지만 실력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울의 검과 마법, 아이나의 도끼와 방패 앞에 도적들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지금까지 만난 도적들의 실력이 형편없었지만, 사울은 방심하지 않았다.
자신과 적들의 실력 차이가 크지만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라도 칼이나 화살에 정통으로 맞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자신이 강하다고 전장에서 방심하다 죽는 인간들을 수없이 봐 왔다.
아이나 역시 방심하거나 흥분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소녀 치고는 놀라운 침착함이었다.
동굴 입구를 정리한 사울과 아이나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서도 몇 명의 적들이 나타났지만, 오래잖아 정리되었다.
대충 모든 적들이 쓰러진 가운데, 마침내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튀어나왔다.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두목은 지금까지 본 도적들과 달랐다.
다른 녀석들보다 크고 강해 보이는 건 물론, 종족부터가 달랐다.
인간보다 큰 체구에 돼지를 섞은 듯한 얼굴.
아래쪽 송곳니 한 쌍이 길쭉하게 삐져나온 입.
짙은 올리브색 피부.
인간은 아니지만 지성을 가진 소위 ‘이종족’에 해당하는 오크 족이다.
다르센 왕국, 아니 율렌 섬에 거주하는 자들을 다 합쳐도 만 명을 넘지 않는다는 이종족.
그 중 다수를 차지하는 세 종족이 오크, 엘프, 드워프다.
오크와 엘프 그리고 드워프 등 대다수의 이종족들은 인간들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인간은 이종족을 곱게 보지 않았고 이종족 역시 인간을 곱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오크가 인간들로 구성된 도적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건 정말 보기 힘든 일이었다.
이런 변방에서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크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울의 말에 오크 두목이 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인간 놈!”
‘인간족’ 사울이 ‘오크 족’인 자신을 종족 차별한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하지만 사울은 종족 차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도적 두목이자 적이니 그에 걸맞게 상대해 줄 뿐이다.
“죽어라!”
오크 두목이 사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쥔 거대한 양손 도끼가 사울에게 날아들었다.
사울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마법으로 대응하려 했다.
그 때 아이나가 사울 앞을 막아섰다.
아이나의 방패와 오크 두목의 도끼가 부딪쳤다.
깡!
요란한 쇳소리가 동굴을 뒤흔들었다.
방패를 쥔 아이나의 몸이 크게 뒤로 밀려났다.
아이나의 방어는 완벽했다.
다만 오크 두목의 공격이 더 강했을 뿐이다.
‘대단한 힘이군.’
사울은 적이 만만찮은 상대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더더욱 자신이 나설 차례다.
“물러나세요.”
“도련님?”
“내가 상대하지요.”
아이나는 어떻게든 자신이 강적을 상대할 생각인 듯 했다.
하지만 사울은 상대가 강적이기에 자신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경험은 강적과의 전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물러나세요. 내가 상대할 테니.”
“…네, 도련님.”
아이나가 순순히 물러나려는 순간 오크 두목이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사울은 이미 준비해 두었던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손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가 오크 두목을 덮쳤다.
위력이 대단치는 않아도 당장의 공격을 방해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틈을 타 아이나는 문제없이 물러났다.
사울은 오크 두목에게 마법 검을 겨누며 말했다.
“누가 더러운 오크 아니랄까봐, 하는 짓도 더럽기 짝이 없구나.”
사울은 이종족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비하적인 발언이 오크를 자극하기에 좋다는 건 잘 알았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 개자식이!”
분노한 오크 두목이 사울에게 달려들었다.
사울은 빈틈을 노려 라이트닝 볼트를 시전했다.
오크 두목의 몸에 전격이 꽂혔다.
“크윽!”
놀랍게도 오크 두목은 전격을 맨몸으로 받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신음하면서도 도끼를 떨어뜨리기는커녕 빠르고 날카로운 동작으로 사울을 노렸다.
사울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조금 전 본 도끼의 위력을 볼 때, 일반적인 마법 방어막으로는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간 사울의 마법 검이 빛났다.
보석뿐만이 아니라 검 전체가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사울은 빛나는 마법 검을 들어 날아오는 도끼를 막았다.
챙!
조금 전 도끼와 방패가 부딪쳤을 때보다 훨씬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울이 마나를 검에 집중시켜 최대한 검에 전달되는 충격을 줄인 결과였다.
그 광경을 본 오크 두목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군.”
오크 두목은 더 이상 사울을 얕보지 않았다.
모욕을 당한 것마저 잊은 듯, 냉정한 표정으로 도끼를 겨누었다.
끝까지 흥분해서 날뛰었다면 상대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젠 꼼수가 아닌 정당한 실력대결로 이길 수밖에 없다.
사울은 마나로 은은하게 빛나는 검을 치켜들며 동시에 마법을 준비했다.
동시에 오크 두목의 도끼에도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어 오크 두목의 쥔 거대한 양손 도끼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사울의 키보다도 더 큰 양손 도끼에 불길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이런 느낌… 오랜만이야.’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낀 사울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본능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다.
잘못되면 카스텔이나 아이나의 도움을 받을 새도 없이 죽을 것이라고 말이다.
본능적인 생명의 위기감.
다시 태어난 후 처음 느끼는 감각이다.
익숙하지 않다면 이 감각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두렵지 않았다.
도적놈 따윌 두려워해서 이번 삶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심한 사울이 손짓을 했다.
“와라.”
도발적인 말투에도 오크 두목은 흥분하는 대신 침착하게 몸을 날렸다.
빠르고 정확하며 말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강력한 일격.
사울도 모든 정신을 집중하며 검을 휘둘렀다.
힘으로는 오크 두목 쪽의 절대적인 우위다.
사울은 자신이 우위인 스피드와 마법으로 오크 두목을 상대해 나갔다.
스피드에 우위인 사울의 검이 몇 차례나 오크 두목을 찔렀다.
간간히 날리는 마법도 어김없이 오크 두목의 몸에 적중했다.
인간이라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공격이었지만, 오크 두목은 죽지 않았다.
몸에 상처가 늘어가면서도 굴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때문에 사울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화르륵!
불붙은 도끼날이 사울의 검을 튕겨 내고 사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기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주변에 진동했다.
검을 놓쳤지만, 사울은 당황하지 않았다.
검 대신 자신의 양손에 모든 마나를 쏟아부어 준비한 마법을 시전했다.
“워터 스피어!”
사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물의 창이 오크 두목을 덮쳤다.
오크 두목은 도끼를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그의 도끼와 불꽃보다 사울의 마법이 더 강력했다.
이 한 방을 위해 지금까지 모아 둔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 낸 결과였다.
“크억……!”
오크 두목이 휘두르던 양손 도끼보다 거대한 물의 창이 그의 복부를 꿰뚫었다.
몇 번의 마법 공격도 버틴 그였지만 이 정도의 상처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오크 두목이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울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정말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괜찮아요?”
아이나의 말에 사울이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 잘못되시면 어쩔까…….”
아이나는 말끝을 흐리며 카스텔 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아이나가 싸움에 끼어들려던 찰나 카스텔이 말린 모양이었다.
“알 만하네요, 고마워요, 선생님.”
사울이 위험해 보인다고 섣불리 도와주지 않은 게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머리카락은 좀 탔지만 제대로 실전을 치를 수 있었으니까.
카스텔은 태연히 사울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 오크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오크가? 어떻게요?”
“살펴봐야겠습니다.”
카스텔은 오크 두목에게 다가갔다.
죽은 오크 두목은 여전히 도끼를 쥔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아니, 죽은 줄 알았다.
번쩍.
갑자기 오크 두목이 눈을 떴다.
그리고는 도끼를 들어 코앞에 다가온 카스텔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 했다.
화르륵.
카스텔의 손짓 한 번에 오크 두목의 머리가 불타올랐다.
머리 부분만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제야 오크 두목은 완전히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아이나가 자신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사울도 아이나 못지않게 놀랐다.
분명 오크는 일반적으로 인간보다 튼튼한 종족이다.
하지만 지금 저 오크 두목의 맷집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었다.
갑옷도 입지 않았는데 보통 사람이었다면 몇십 번 죽을 공격을 몸으로 받고도 살아남은 데다 복부가 완전히 꿰뚫리고도 멀쩡히 도끼질을 하려 들다니.
카스텔도 놀란 듯 시체를 살피는 눈동자가 떨렸다.
“…….”
잠시 후.
시체를 살핀 카스텔이 말했다.
“보통 오크의 육체는 이렇게 강인하지 않습니다. 이 오크가 마나를 다루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강한 육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카스텔의 말에 사울은 무언가를 떠올렸다.
“설마… 마법이나 연금술로 육체를?”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나는 사울과 카스텔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육체 그 자체를 마법이나 연금술로 개조했다는 뜻이에요.”
“마나를 통해 육체를 단련하는 게 아니라요?”
“다른 개념이에요. 마나를 통해 단련하는 건 마나로 몸을 보호하거나 일시적으로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지만, 개조는 영구히 몸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니까요.”
비로소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나의 눈이 커졌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너무 위험하고 비윤리적인 짓이라 왕국에서 엄격히 금지했는데…….”
“그럼 가멜다 왕국 놈들의 짓이 아닐까요?”
우리나라가 아니라면 적국부터 의심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나 연금술로 인체를 개조하는 실험은 가멜다 왕국에서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요. 그 금기를 깼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고요.”
“그럼 대체?”
“나도 잘 모르겠군요.”
잠시 주변을 살피던 카스텔이 말했다.
“나중에 영주 군이 수색하겠지만 우리가 먼저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나도 찬성했다.
“그렇게 해요.”
곧 사울 일행은 동굴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격렬했기에 동굴 안팎에 살아남은 도적들이 많지 않았다.
살아남은 녀석들도 모두 마법으로 깊이 잠재웠기에 수색을 방해하는 녀석은 없었다.
동굴 곳곳에서 눈에 띄는 물건들이 나왔다.
약탈품이 분명한 금화와 은화 무더기.
심지어 죽은 지 오래된 시체들을 버려둔 곳까지 있었다.
“이런 잔인한 놈들.”
동굴 구석에 쌓인 해골 무더기를 본 사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에 전장에서 뒹굴던 그도 저 해골 무더기가 도적에게 당한 무고한 피해자라 생각하니 기분이 씁쓸해졌다.
“이것 좀 보십시오.”
카스텔의 목소리에 사울은 발걸음을 옮겼다.
도적들의 약탈품이 쌓인 창고에 서 있던 카스텔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