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카스텔이 내민 건 자그마한 카드였다.
잘 말린 하얀 튤립이 붙어 있는 카드.
튤립 꽃송이를 가지고 새 모양을 만든 듯한 카드.
카스텔도, 사울에게도 낯선 카드였지만 아이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얀 튤립으로 만든 까마귀…….”
“이게 무엇인 줄 알겠어요?”
“…킬리안 비셔스의 것이 틀림없어요.”
킬리안 비셔스.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에서도 쫓는 거물 범죄자의 흔적이라는 말이었다.
하얀 튤립 꽃송이로 새 모양을 만들어 붙인 카드.
아름답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카드는 ‘하얀 까마귀’의 상징이다.
하얀 까마귀.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마저 쫓고 있는 율렌 섬 최악의 범죄자.
킬리안 비셔스가 이끄는 조직.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하얀 까마귀의 상징을 찾아낸 사울 일행은 즉시 마린다의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에서 가장 큰 사울의 방에 일행 모두가 모여 앉았다.
“킬리안 비셔스…….”
사울은 하안 까마귀 카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전생 때는 킬리안 비셔스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 없다.
그가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건 6년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였기 때문이다.
왕자로 다시 태어난 뒤 그의 악명은 여러 번 들어 보았다.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 어디에서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중립 지역’에 본거지를 건설한 뒤 암흑가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
그가 어느 정도의 악당인지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죄를 다 저지른 자’
‘범죄 왕국의 제왕’
왕국 정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루시아 누님도 킬리안을 언급한 적 있었다.
‘킬리안 비셔스 같은 자는 하루 빨리 잡아 왕국 수도 광장에서 목을 매달아야 해.’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녀마저 주목하는 거물 범죄자 킬리안 비셔스.
그가 이끄는 조직 하얀 까마귀.
그 흔적을 마주한 아이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설마 하얀 까마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전에는 이런 것을 발견한 적이 없나요?”
“전하. 그러니까…….”
큰 충격을 받은 아이나는 말투를 고치는 것도 잊었다가 사울의 눈짓에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해요. 도련님.”
“괜찮아요. 계속하세요.”
“이 카드는 하얀 까마귀에서도 지위가 있는 조직원만 가질 수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어요. 저희 영지 내에서 이 카드가 발견된 일은 거의 없고요.”
“드물다는 건 처음은 아니라는 말이군요.”
“네. 반 년 쯤 전에 발견한 적이 있어요. 그 때 체포한 하얀 까마귀 조직원들은 모두 처형하거나 감옥에 보냈지요. 하지만 윗선에는 닿지 못했어요. 왕국군에 협조를 부탁했지만 큰 소득은 없었고요.”
듣고 있던 사울은 이런 일에 경험이 많을 것 같은 카스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혹시 하얀 까마귀를 상대해 본 적 있나요?”
“네.”
“그래요? 잘 되었군요. 어떻게 그들을 상대했나요?”
“적의 위치를 알고 찾아갔습니다. 이후 모두 체포하려 했지만 적들이 반항했고, 모조리 현장에서 처리했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네.”
카스텔의 경험은 지금 상황에서 큰 도움이 못 될 것 같다.
사울은 다시 아이나에게 물었다.
“이런 악당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가만 있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습니다. 영지에 하얀 까마귀가 나타난 이상, 그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보아하니 이것저것 남은 게 많군요. 잘 하면 하얀 까마귀의 윗선의 흔적도 찾을 수 있겠어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저는 영지의 기사들과 힘을 합쳐 본격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할 생각입니다.”
“직접 나서려고요?”
“네. 이 영지에 해를 끼치는 자를 막아내는 건 제 임무니까요.”
아이나의 표정에 담겨 있는 건 단순한 호승심이 아니었다.
이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자는 받은 만큼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법.
아이나는 귀족의 의무와 책임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위험한 일인데,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협조를 구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제 의무이니 끝까지 할 겁니다.”
결의에 찬 아이나의 말에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나도 돕겠어요.”
아이나의 입에서 말리는 말이 나오기 전에 사울이 한 번 더 말했다.
“왕국에 큰 해를 끼치는 범죄 조직을 몰아내는 건 내 의무니까요.”
“.....”
귀족에게 따르는 의무보다 왕족에게 따르는 의무가 더 크다.
방금 전 귀족의 의무를 이야기 한 아이나는 왕족의 의무를 꺼내 든 사울을 말릴 수 없었다.
“위험하실 텐데…….”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 지 잘 알아요. 약속하지요. 신중하게, 그리고 나 자신의 안위를 우선하면서 움직이겠다고.”
“…네. 도련님.”
그러자 카스텔도 말을 보탰다.
“이제 중요한 건 정보입니다.”
“정보?”
“네. 정보를 알아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이런 일에서 정보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바른 정보를 알고 그에 따라 움직여야 잘못된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다.
“살아남은 도적들은 어떻게 되었지요?”
“근방의 영주군이 부대로 끌고 갔어요.”
“그럼 곧 심문을 하겠군요.”
심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방식도 있지만 악질 도적들에게 그런 심문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순히 불면 모를까, 아니라면 각종 ‘신체적 폭력’이 동원될 게 뻔하다.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보편적인 일 처리 방식이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사울은 카스텔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정보를 얻는 일을 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사울 일행은 자신들이 붙잡은 도적들이 감금된 영주군 부대로 향했다.
마린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요새에 수십 명의 영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영주군은 사울 일행의 선두에 선 아이나를 보고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수고가 많군요.”
영주군은 아이나 뒤의 사울과 카스텔을 보고 물었다.
두 사람은 후드를 눌러 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도적들의 심문을 위해 데리고 왔어요.”
“알겠습니다.”
아이나는 투구를 벗었고, 사울과 카스텔은 투구가 아닌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사울이나 카스텔이 도적들과 싸운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직접 도적들을 심문하려면 권력이 필요했기에 아이나는 얼굴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곧 사울 일행은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지하 감옥에 도적들이 갇힌 게 보였다.
모두들 수갑과 족쇄를 차고 짐승처럼 내팽개쳐진 꼴이 꽤나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사울은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도적 소굴에서 본 해골 더미는 저들의 짓이 분명했다.
저런 대접을 받아도 싼 녀석들이다.
사울은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카스텔에게 말했다.
“선생님.”
카스텔이 조용히 지하 감옥의 도적들에게 다가갔다.
도적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온 카스텔을 알아보지 못했다.
“넌 뭐 하는 계집이야?”
악이 받친 도적들의 무례한 말버릇에도 카스텔은 화를 내지 않았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말 해.”
물론 도적들은 즉각 반발했다.
“뭐야? 우리가 왜?”
“미친년이 개소리를 지껄여.”
“어차피 우린 목이 매달릴 건데 왜 자백을 해야 하지?”
“우릴 풀어 준다면 생각해 볼 수 있지.”
영주의 딸인 아이나의 권력이라면 도적들의 목숨만은 구명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카스텔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들이 아는 모든 것을 자백해.”
말과 함께 카스텔이 손짓을 하며 눈을 번득였다.
동시에 마나의 흐름이 지하 감옥을 흔들었다.
마법사인 사울은 물론, 아이나마저 느낄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크윽…….”
감옥에 갇혀 있던 도적 전원이 마법에 반응했다.
눈을 부릅뜬 채 몸을 비트는 움직임이 꽤나 처절했다.
도적들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듯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하나 둘 술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세세한 심문을 위해 고통으로 정신력을 약화시키고 세뇌한 결과였다.
마법이 제대로 걸린 것을 확인한 카스텔이 말했다.
“너희들이 아는 모든 것을 정직하게 말해라.”
“…네.”
보고 있던 아이나가 종이와 펜을 들고 다가갔고, 사울도 그 뒤를 따랐다.
이미 정신 줄을 놓은 도적들은 사울과 아이나의 질문에 술술 다 털어놓았다.
너무 술술 털어놓는 모습에 아이나가 의심스러워할 정도였다.
“정말 이들이 사실대로 말하는 걸까요?”
아이나의 의심에 카스텔이 단언했다.
“이자들이 처음부터 잘못 알았다면 모를까, 거짓말은 하지 못해요.”
“그, 그렇군요.”
도적들은 모르는 건 모른다고 했지만, 아는 건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다 불었다.
그 모든 것을 기록한 아이나가 사울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보통 일이 아니군요.”
도적들이 지껄인 장황설을 요약하면 이랬다.
하얀 까마귀가 이 영지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고, 본인들은 그 첨병이었다는 것.
아이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렇게 하세요.”
아무리 아이나가 나이보다 의젓하고 조숙하며 실력까지 뛰어나다 해도 올해 성인식을 치른 소녀에 불과하다.
이런 일은 좀 더 경험을 갖춘 영주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사울은 왕자 입장에서 제안을 했다.
“원한다면 인근 왕실 군대나 중앙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왕실 군대라면…….”
아이나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왕실의 도움을 받는다는 건 왕실에 빚을 진다는 뜻이다.
홉킨스 가문과 왕실의 미묘한 관계를 생각하면, 왕실에 빚을 지는 건 피하고 싶어 할 것이다.
홉킨스 가문에서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킬 만큼 상황이 급하지는 않다.
사울은 손을 내저었다.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언제나 그대와 영주님을 존중하고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럼 아버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아이나는 아직 인사불성 상태이던 도적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설마 저들이 이대로 죽게 되는 건 아니겠지요?”
카스텔이 걱정 말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체에 큰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처형장에 갈 때까지 숨이 붙어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아마 재판을 받겠지만, 재판 결과가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는 녀석들이다.
자기들 소굴에 해골을 수북이 쌓아 둔 녀석들에게 동정할 필요는 없다.
사울 일행은 그대로 지하 감옥을 나섰다.
* * *
영주의 저택으로 돌아온 사울 일행은 먼저 영주를 찾아갔다.
딸에게서 하얀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던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얀 까마귀 놈들이 나타났다고?”
“네, 아버님. 전하와 카스텔 씨도 함께 확인했어요.”
아이나의 말에 던칸은 사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이 저택이나 사제타에는 문제가 없었나요?”
“네. 그리고 수도에서 전하께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요?”
지금 사울에게 중요한 편지를 보낼 사람이라면 왕실 가족들 정도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사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