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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25화 (25/232)

25화

방에 가니 그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레이는 마치 실종된 사람이 돌아온 듯 크게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괜찮아. 크게 힘든 일도 아니었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그레이도 듣는 귀가 있습니다. 훈련도 아니고 진짜 도적놈들과 싸우셨다고요!”

그레이는 사울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러다 왼쪽 발목에 감은 붕대를 발견하고 눈이 커졌다.

“그, 그 상처는 뭡니까?”

“이 붕대? 별 것 아냐. 도적들과 싸우다 잘못 부딪쳐서 멍이 들었거든.”

“그런 상처를 입으시고도 계속 싸우셨다는 말씀입니까?”

“별 것 아니라니까.”

“전하 제발 스스로를 잘 돌보십시오!”

그레이의 잔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이번에는 사울도 그레이의 잔소리를 참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왕자의 몸으로 꽤나 위험한 일을 하고 돌아온 건 사실이니까.

한동안 잔소리를 계속하던 그레이가 지친 뒤에야 사울은 말했다.

“알았어. 새겨들을 게.”

“정말 제 말을 새겨들으셨다면 지금이라도 왕궁에…….”

“그건 안 돼.”

“…….”

“아무튼 더 조심할 테니까. 내가 없던 사이 별 일은 없었어?”

“왜 없었겠습니까. 감찰관이 전하를 뵙고 싶다고 청을 넣어 왔습니다.”

“감찰관이? 그래서?”

“일단 전하의 몸이 불편하다고 속여 넘겼습니다. 다시 찾아오거나 청을 넣지는 않았습니다만…….”

“알았어. 그리고 내게 편지가 왔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습니다. 전하.”

그레이가 편지를 내밀었다.

곱게 봉인된 옅은 분홍색 편지 봉투만 봐도 누가 보낸 것인지 짐작이 갔다.

지금 왕실에서 이 분홍색 편지 봉투를 쓰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누님이 보내셨군.”

정보부 일로 바쁠 루시아가 일없이 그냥 안부 인사 차원에서 편지를 보냈을 리 없다.

일단 사울은 편지를 뜯어보았다.

역시 남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보낸 따뜻한 편지가 아니었다.

평범한 안부 인사처럼 시작하던 편지는 머잖아 본색을 드러냈다.

[사울. 왕실에 해를 끼치거나 분수를 넘어선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네 기행에 대해 뭐라 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왕실에 폐를 끼치거나 분수를 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귀에 거슬리지만 기억해 둘 만한 잔소리를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홉킨스 가문의 영지는 국경 지역이면서 통제가 느슨한 곳이니 분명 나라와 왕실에 문제가 될 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왕자의 몸으로 그곳까지 갔다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 중 국가나 왕실의 안위에 해를 끼칠 만한 모든 것들을 내게 보고하거라. 편지를 써서 감찰관에게 전달하면 그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럼 건강 조심하거라.

루시아 다리우스]

“누님도 참.”

사울의 씁쓸한 미소에 그레이가 놀라 물었다.

“루시아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더러 첩자 노릇을 하라는군요.”

“네?”

“좋은 소식이 있다면 더 이상 감찰관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누님에게 포섭이 된 모양이니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웬만하면 간섭하지 않을 거예요.”

“왕녀 전하께서 벌써 거기까지……?”

“누님이 철두철미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요. 아무튼 감찰관을 불러요. 그도 내게 할 말이 있을 것 같으니.”

“네, 전하.”

곧 부름을 받은 감찰관 피에르가 사울의 방에 들어왔다.

피에르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사울이 말했다.

“누님에게 명령을 받은 게 있지요?”

“네, 전하.”

“그럼 말 해 봐요. 감찰관은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지요?”

“전하께서 비밀리에 어떤 활동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감찰관도 사울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시아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 전부터 짐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감찰관이 사울의 행동을 짐작하고 있다면 굳이 숨길 필요는 없었다.

물론 방해 받을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이 왕실에서 허락한 일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왕녀 전하께서 전하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아는 것을 정직하게 왕실에 보고하겠습니다.”

이런 피에르의 말은 사울에게 압박감을 안겨다 주기에 충분했다.

방해는 하지 않겠지만 자신의 행동을 모두 왕실에 보고하겠다.

이는 곧 왕실에 대한 보고를 이용하여 사울을 컨트롤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울은 윗선에 하는 보고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전생에 자신을 방해하던 선배를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방법으로 날려 버린 적이 있었으니까.

피에르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을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사울에게 불리한 이야기들을 뽑아내어 왕실에 보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울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감찰관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감찰관은 왕실과 홉킨스 가문의 소통, 그리고 왕실에서 홉킨스 가문을 제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니 말이다.

쳐내야 할 적이 아니라면, 친구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감찰관 덕분에 홉킨스 가문과 왕실 사이가 평온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과찬이 아니에요. 나는 감찰관을 존중하고 있고 많은 도움을 받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전하를 돕는 건 제 의무이니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존중의 뜻을 표한 덕분인지 피에르의 표정은 밝았다.

저 밝은 표정이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밝혀질 것이다.

일단 사울은 본론을 꺼냈다.

“이 영지에 하얀 까마귀가 들어온 것 같아요.”

“하얀 까마귀……. 킬리안 비셔스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하얀 까마귀의 악명은 피에르도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놈이 여기에서도 골칫거리라는 말은 들었지만……. 혹시 홉킨스 가문에서 그 놈들과 내통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너무 나간 피에르의 말에 사울이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닐 거예요. 하얀 까마귀의 존재를 알아내는 데 영주의 딸이 큰 활약을 했으니까.”

“아이나 씨 말입니까? 하긴, 이곳 사람들이 꽉 막히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피에르가 물었다.

“그럼 어떡하시겠습니까?”

“이왕 시작한 일이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야지요. 감찰관도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날 많이 도와줘요. 그대의 공을 잊지 않고 아바마마께 말씀드릴 테니.”

자신에게 잘 협조하면 꽃길을 걷게 해 주겠다는 말.

피에르는 사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피에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사울 왕자는 궁전 안에서 마법만 배운 애송이라고 들었는데… 그렇지가 않군. 어린 녀석 치고는 제법인데.’

듣던 대로 사울이 애송이면 적당히 구워삶아 뜻대로 움직일 생각도 한 피에르는 자신의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알겠습니다. 전하. 제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요. 고마워요, 감찰관.”

비굴함까지 느껴지는 미소와 함께 피에르가 사울의 방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사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정치꾼을 상대하는 건 피곤해.’

정치를 완전히 등한시할 수는 없겠지만 역시 정치 놀음보다는 마법을 쓰고 검을 휘두르는 게 더 좋았다.

사울도 생각을 정리했다.

하얀 까마귀에 킬리안 비셔스.

생각보다 큰 건수다.

이 사건을 해결하면 그 성과를 바탕으로 좀 더 큰일을 맡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멜다 왕국을 상대하는 일 말이다.

“맡은 일은 확실히 처리해야지.”

이 모든 게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다.

당면한 과제를 성공시켜야 미래의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

사울은 결의 어린 눈빛으로 마법 검을 바라보았다.

* * *

영주 저택에 돌아온 사울은 하루만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마린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하얀 까마귀에 대한 사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투구로 정체를 숨긴 사울과 아이나는 하얀 까마귀에 소속된 도적들에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움직이며 영지의 범죄자들을 체포하고 베어 나갔다.

그동안 영주는 자신의 저택에서 군대를 움직이고 명령을 내렸다.

어느새 사울과 아이나는 ‘정체불명의 투구 전사’라 불리며 영지의 범죄자들에게 공포의 이름이 되었다.

실제로는 사울이나 아이나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인 카스텔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 채 사울과 아이나의 명성만 높아졌다.

물론 두 사람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은 채 말이다.

“투구 전사라는 놈들 들어 봤나?”

“빌어먹을, 내 친구도 그놈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끌려갔어. 망할 영주 놈이 강한 용병이라도 데려왔나?”

영지의 도적과 깡패들 사이에서 정체불명의 투구 전사에 대한 악명이 높아지는 가운데, 그 이름은 영지 바깥까지 퍼졌다.

마침내 하얀 까마귀 측에서도 그 이름을 알게 되었다.

* * *

중립 지대.

율렌 섬에서 다르센 왕국의 힘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가멜다 왕국의 힘도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곳.

중립 지대라 불리는 곳은 그 자체로 특별한 곳이었다.

삼백 년 동안 다퉈 온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적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 앞다투어 영토를 넓혔다.

가능성이 있는 땅은 불모지라도 개척하여 율렌 섬 거의 전역을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나라가 개척하지 않은 중립 지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곳들이었다.

두 나라 모두 가치 없게 여기는 땅.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을 위해 남겨둔 땅.

이 세계 대부분이 숭상하는 빛의 교단의 영토로 남겨진 땅.

이런 특별한 곳만이 율렌 섬에서 오래 다퉈 온 두 나라의 묵인 하에 중립 지대로 남게 되었다.

두 나라 모두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런 중립 지대에 주목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하얀 까마귀의 두목, 킬리안 비셔스였다.

킬리안 비셔스는 중립 지대의 버려진 군사 기지를 자신의 소굴로 만들었다.

킬리안 비셔스의 소굴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사람 살려!”

이미 몇 명이나 목숨을 잃은 가운데, 살아남은 범죄자들은 목숨을 구걸했다.

그런 범죄자들 앞에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몇 명의 부하들을 뒤따른 채 모습을 나타낸 남자.

헝클어진 은발에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

어딘지 모르게 몽롱한 표정이었지만 눈빛만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붙잡혀 온 범죄자들은 이 남자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하얀 까마귀의 두목, 킬리안 비셔스.

율렌 섬에서 큰 세력을 가진 범죄자.

이름 그 자체가 욕으로 쓰일 만큼의 악당.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두 나라 모두가 쫓고 있는 율렌 섬의 공적.

그리고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범죄자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사람.

“사, 살려 주십시오!”

“두목!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범죄자들의 목숨 구걸에 킬리안이 피식 웃었다.

“살려 달라고?”

킬리안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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