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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26화 (26/232)

26화

그의 손끝에서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빛이 흘러가 범죄자들을 덮쳤다.

가느다란 빛에 맞은 범죄자들은 몸 곳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범죄자들은 악명 높은 킬리안의 ‘죽음의 실’이 자신들을 휘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미줄처럼 가늘지만 도끼로도 베기 힘들 만큼 튼튼한 실.

이 날카로운 실 아래 죽어 나간 사람들은 셀 수도 없다고 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범죄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처량해졌다.

“사, 살려 주시오!”

“두목! 제발!”

마침내 킬리안의 입이 열렸다.

“살고 싶으면 너희들의 가치를 증명해라.”

“네?”

“말해라. 너희들이 어떻게 갈레트 지방 일을 망쳤는지. 가치 있는 정보가 있다면 살려 주겠다.”

“아, 알겠습니다! 그, 그러니까 모든 게 정체불명의 투구 전사 때문입니다!”

“투구 전사?”

킬리안의 질문에 살 희망을 느낀 범죄자들이 저마다 주워섬겼다.

영주군 편인 것 같지만, 자세한 정체는 알 수 없는 투구 전사가 갈레트 지방의 하얀 까마귀 조직을 박살내고, 조직원들을 베거나 체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군.”

다 들은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 듯한 그의 표정에 범죄자들은 희망을 느꼈지만, 그 희망은 순간에 그쳤다.

“먼저 죽은 놈들이랑 똑같은 이야기로군.”

“네?”

“쓸모없는 놈들.”

킬리안은 파리를 쫓는 것처럼 가볍게 손짓했다.

목숨을 구걸하며 주워섬기던 범죄자들 모두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악명 높은 ‘죽음의 실’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죽어 나간 범죄자들을 바라보는 킬리안의 눈빛이 살기에 번득였다.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는 정체불명의 투구 전사를 향한 살기였다.

“……!”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이 만든 시체를 내려 보던 킬리안이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킬리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가 꺼낸 것은 나뭇잎을 잘게 썰어 뭉쳐 만든 덩어리였다.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씹은 킬리안의 눈빛이 순간 몽롱해졌다.

무언가에 취한 듯 하면서도 한결 편해진 얼굴이 된 킬리안은 다시 시체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두들 이미 죽었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킬리안은 자신을 뒤따르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그 중 시선을 받은 것은 부하들의 선두에 선 안경을 쓴 남자였다.

나이는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젊은 나이에 가는 얼굴선, 안경까지 쓴 모습은 범죄자보다는 학생이나 젊은 학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역시 하얀 까마귀에 소속된 범죄자였다.

하얀 까마귀의 서열 2위.

킬리안 만큼은 아니지만 율렌 섬에 이름이 알려진 거물 범죄자, 제온이었다.

“두목. 저것들을 모두 치우겠습니다.”

“그래.”

킬리안의 허락에 제온은 뒤따르던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부하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지 망설이지 않고 시체들을 치웠다.

자신의 조직원이었던 시체들이 실려 나가는 광경에도 킬리안은 물론 제온마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갈레트 지방에 무언가 골칫거리가 나타난 모양인데.”

“이미 보고 드린 적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정체도 모르는 놈들이 내 일을 방해한다고. 명색이 하얀 까마귀라는 것들이 정체도 모르는 것들에게 무더기로 당할 줄은 몰랐지만.”

제온은 킬리안의 분노를 이해했다.

들어 온 정보에 따르면 ‘투구 전사’에서 주로 움직이는 건 고작 두 명이라고 했다.

사내 하나, 계집 하나에 크게 하는 일 없는 정체불명의 구경꾼 여자까지 3인조로 다닌다던가.

그 3인조 때문에 죽거나 감옥에 간 조직원만 수십 명이다.

율렌 섬 최고의 범죄조직이라 불리는 하얀 까마귀에서도 수십 명의 인명 손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저들이 큰 실책을 저질렀다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실책과는 별개로 투구 전사라는 자들이 상당한 실력자인 것 역시 틀림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그것들과 부딪치는 족족 생포되거나 죽고, 간신히 도망친 녀석들이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쓸모없는 놈들.”

대화 도중 또 다른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빨간 쇼트 드레스를 걸친 여성이었다.

새로 등장한 여성은 여러모로 눈에 띄었다.

짙은 갈색 피부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 늘씬한 몸에 길고 뾰족한 귀까지.

인간과 닮았지만 보다 정령에 가까운 엘프족.

그 중에서도 어두운 피부색으로 다크 엘프라 불리는 그녀는 하얀 까마귀의 서열 3위 칼립소였다.

“두목 말과 제온의 말 모두 맞아요. 실수한 멍청이들은 제거해야 마땅하지만 문제의 근원을 놔두면 결국 죽여야 할 멍청이들이 늘어날 거예요.”

칼립소의 말에 킬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갈레트 지방에 힘들게 개척한 조직 절반이 그 투구 전사라는 연놈들 때문에 박살 나 버렸잖아요? 이대로 가면 나머지 절반도 마찬가지로 박살 날 거예요.”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하지만 지금 갈레트 지방에 있는 우리 조직원만으로는 투구 전사들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칼립소의 말에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책은?”

“위험한 싹은 단숨에 뽑아야지요.”

그런 칼립소의 말에 제온이 반대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곤란합니다. 갈레트 지방은 아직 영주의 지배권이 굳건하며, 근방에 왕국군도 주둔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가 영주군과 왕국군의 협공을 받기라도 한다면…….”

제온의 반대에 칼립소가 강경하게 말했다.

“자기 말인즉, 힘들게 개척한 우리 조직이 다 박살나도 상관없다는 거네?”

“조직은 지켜야지. 하지만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투구 전사라는 놈들이 나타난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갈레트의 하얀 까마귀 절반이 박살났어. 신중하게 움직였다 나머지 절반이 박살나면 무슨 소용이야?”

“한 지역에서의 확장에 실패하더라도 조직 전체가 타격을 입고 무너지는 것 보다는 나아.”

“정말, 자기와는 말이 안 통하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무식한 다크 엘프 같으니라고.”

“말 다했어?”

잠시 조직의 2인자, 3인자가 말다툼하는 것을 지켜보던 킬리안이 문득 말했다.

“그만.”

두목의 한 마디에 제온도 칼립소도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말을 멈췄다.

킬리안은 2인자, 3인자를 번갈아보다 칼립소를 쳐다보며 말했다.

“칼립소.”

“네.”

“네가 말한 그 위험한 싹을 단숨에 뽑을 자신이 있나?”

“물론이지요. 두목.”

“그럼 바로 출발해라. 그 싹을 뽑아 버리고 와라.”

킬리안의 결정에 제온이 놀라 말했다.

“두목. 이건…….”

킬리안은 그런 제온의 말을 잘랐다.

“이미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칼립소. 일단 투구 전사인지 뭔지 하는 연놈들이 누구인지 알아봐라. 산 채로 잡아올 수 있으면 잡아오고, 생포가 어렵다면 그것들의 모가지를 따서 가져와라.”

“네, 두목.”

명령을 내린 킬리안은 다시 품속에서 작은 풀 뭉치 같은 것을 꺼내 씹으며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제온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비웃던 칼립소에게 물었다.

“정말 자신 있는 거야?”

“잡아 오는 건 몰라도 죽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적을 얕보면 안 돼. 한 달 만에 우리 조직을 절반이나 날려 버린 놈들이야. 게다가 비르도 놈들에게 죽었다고 해.”

“그 멍청한 오크와 이 칼립소 님을 동격으로 보는 건 아니겠지?”

제온도 칼립소가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는 알았다.

하얀 까마귀에서 킬리안을 제외하면 칼립소보다 강한 자가 없었으니까.

투구 전사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는 비르와는 격이 달랐다.

제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네가 강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리는 적의 정체를 모르고, 하다못해 놈들이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지.”

“마나를 다루는 자가 투구를 썼다면 정체를 숨겨야 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영주군과 함께 행동한다면 영주의 비호를 받는다는 뜻이지. 영주 놈이 용병이라도 데려 온 것 아닐까?”

칼립소의 말에 제온이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용병이라면 투구까지 쓰면서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다. 그 정도 실력에 영주의 비호를 받고 있다면 우리 보복이 두려워서 얼굴을 가린 것 같지는 않고.”

“그렇다면?”

“얼굴을 가린 이유가 있을 거야. 무언가 큰 이유가.”

“그걸 나더러 알아보라고?”

“그래. 두목은 일단 잡아 오거나 죽이라고 했지만… 먼저 놈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두목에게 보고해.”

칼립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군이 아니라 왕실 기사단에서 실력자를 파견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야?”

“그걸 알아보자는 말이다. 투구 전사라는 놈들의 정체부터 알아낸 뒤 두목에게 보고해. 잡아오거나 없애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칼립소는 제온의 말을 엉뚱하게 알아들었다.

“좋아. 일단 그것들의 투구부터 벗길게. 그리고 죽이면 골치 아픈 녀석들이라면 바로 죽이진 않을 테니까.”

“아니, 정체가 무엇이든 보고부터…….”

“두목은 내게 일을 맡겼으니 내가 알아서 해.”

그 말을 끝으로 칼립소는 자신의 무기인 단검을 챙겨 들고 나가 버렸다.

홀로 남은 제온은 두통이 온 듯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정말 두목이나 저 녀석이나… 괜히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 * *

영지 내의 하얀 까마귀를 처리하는 일을 계속 맡기로 한 사울은 마린다의 여관에 쭉 머무르며 악당들을 상대해 나갔다.

아직까지는 순조로웠다.

착실히 범죄자들을 상대하며 실전 경험을 쌓는 것은 물론, 하얀 까마귀에 대한 정보도 얻어 나갔다.

정보를 얻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울과 아이나가 도적들을 쓰러뜨리면 상황을 지켜보던 카스텔이 나서 정보를 캐냈다.

이후 살아남은 녀석들은 감옥으로 보내면 끝이었다.

이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서 사울 일행은 꽤 많은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킬리안 비셔스가 이 지방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도 동의했다.

“맞아요, 도련님.”

이젠 정체를 숨길 때 쓰는 투구, 그리고 정체를 숨길 때 바뀌는 아이나와 카스텔의 말투에도 익숙해졌다.

덕분에 사울이나 아이나, 카스텔에 대한 정보는 아직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았다.

대신 ‘투구 전사’ 라는 소문이 생겼다.

영주가 고용한 막강한 두 용병이 범죄자들을 쓸어버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카스텔도 한마디 했다.

“제가 그 자들이라면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죽이려 할 겁니다.”

사울의 말에 아이나도, 카스텔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숨긴 정체불명의 적이 나타났다면 먼저 적의 정체부터 밝히려 할 것이다.

문제는 정체를 어떻게 밝히느냐이다.

하얀 까마귀라면 어떻게 정체불명의 적을 찾으려 할까.

곰곰이 생각하던 사울이 입을 열었다.

“하얀 까마귀가 영주의 부하를 매수할 수 있을까요?”

“네?”

“말 그대로예요. 영주의 부하 중 하얀 까마귀의 첩자가 있거나 혹은 그들에게 매수되었다면 우리 정체가 생각보다 빨리 드러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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