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칼립소는 상처를 ‘재생’시킨 데서 그치지 않고 더욱 놀라운 재주를 선보였다.
팔다리를 몇 번 흔들자 그녀의 팔다리 모두 괴상한 방향으로 꺾여 나가고, 동시에 길어졌다.
길어지면서 동시에 얇아진 팔다리 앞에서 사슬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딱 맞는 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이 얇아져 반지가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칼립소는 손쉽게 사슬을 풀었다.
“후우…….”
사슬에서 벗어난 칼립소는 입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몸수색을 당하고 무기를 빼앗겼을 때도 들키지 않은 철사였다.
칼립소는 자신이 갇힌 철창 자물쇠를 만져 보았다.
철창은 튼튼했지만, 자물쇠는 흔해 빠진 물건이었다.
칼립소는 손재주를 발휘해 어렵잖게 자물쇠를 땄다.
지금 이 주변에 마나를 다루는 자는 없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병사 따윈 상대가 아니다.
칼립소는 냉소를 흘리며 조용히 움직였다.
철창 밖으로 나가니 한 병사가 졸고 있는 게 보였다.
칼립소는 조용히 병사에게 다가가 뒤에서 목을 휘감았다.
익숙하면서 날카로운 솜씨에 순식간에 병사의 목이 꺾였다.
칼립소는 병사가 들고 있던 창을 부러뜨려 단검처럼 손에 쥐었다.
이후에는 그녀의 독무대였다.
늦은 새벽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던 병사도, 용케 깨어 있던 병사도 칼립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요새를 지키고 있던 십여 명의 병사들 전원이 살해당했다.
어렵잖게 요새를 쓸어버린 칼립소는 하얀 까마귀 조직원들이 갇힌 감옥으로 향했다.
칼립소를 본 조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셨군요!”
“빨리 우릴 구해 주십시오!”
조직원들의 요구에 칼립소는 냉소와 함께 창날을 던졌다.
“으아악!”
철창 안으로 들어간 창날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묶인 채 철창에 갇혀 있던 조직원들은 손도 못 쓰고 모조리 죽었다.
칼립소는 자신의 손에 돌아온 창날을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너희들까지 함께 탈출시켜 줄 시간이 없거든.”
설령 아군이라도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칼립소의 기본적인 일 처리 방식이었다.
냉소와 함께 칼립소는 요새를 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 * *
먼동이 터오를 무렵에야 잠들었던 사울은 조금 늦게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급한 아이나의 목소리가 사울의 단잠을 깨웠다.
“큰일입니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던 사울은 이어진 아이나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 다크 엘프가 탈옥했답니다!”
“뭐라고요?”
놀란 사울은 잠옷 차림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다크 엘프는 분명 단단히 묶어서 감옥에 처넣었다.
상대가 마나를 다루는 것이 염려되어 일부러 마법 사슬로 꽁꽁 묶기까지 했다.
그게 불과 몇 시간 전인데 탈옥했다니.
사울은 일단 투구를 쓰고 아이나에게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예요?”
“저도 이제 막 보고를 받았어요. 그 다크 엘프가 요새를 피바다로 만든 뒤 도주했다고…….”
“피바다?”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 그리고 하얀 까마귀 조직원들까지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대요.”
“세상에.”
탈옥하는 놈이 경비병을 죽이는 건 잔인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조직원까지 모조리 죽였다고?
실전 경험이 적지 않은 아이나도 질린 표정이었다.
“…….”
전생 덕분에 사울은 아이나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분명 잔인한 짓이지만, 탈옥한 다크 엘프 입장에서는 영민하게 움직였다고 할 수 있다.
감옥을 쓸어버릴 힘이 남았다면 혼자 도망칠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혼자 도망치는 게 더 성공 확률이 높을 테니까.
이왕 혼자 도망칠 것이라면 남은 도적들의 입을 막아야 했을 것이다.
“잔인한 것.”
혀를 내두른 사울의 눈에 카스텔의 모습이 비쳤다.
카스텔은 말없이 사울을 응시했다.
카스텔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라 느낀 사울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 하고 싶은 거예요?”
“절반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반은 제 잘못입니다. 심문할 때 다크 엘프의 살을 발라내서라도 입을 열게 해야 했습니다. 아니면 도망치지 못하게 확실히 불구로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무슨 짓이든 해서든 불게 만들거나,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손을 썼어야 했다.
실로 섬뜩한 말이었지만, 현재 상황을 보면 맞는 말이었다.
“일단 나가지요. 직접 현장을 봐야겠어요.”
사울 일행은 곧바로 요새로 향했다.
요새에 도착하니 병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상황을 수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자를 발견한 아이나가 그를 붙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다크 엘프의 짓인 것 같습니다.”
“보고는 들었다. 정말 요새에 있던 모두가 죽은 건가?”
“네.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부터 감옥에 갇혀 있던 놈들까지 모두 죽었습니다.”
듣고 있던 사울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요? 분명 그 다크 엘프는 큰 부상을 입은 데다 마법 사슬로 단단히 포박한 상태였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침입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자 카스텔이 나섰다.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잠시 후, 요새 안에 들어갔다 온 카스텔이 말했다.
“외부인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럼 역시?”
“그 다크 엘프가 외부 조력 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탈옥한 것 같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건 모르겠습니다.”
미련이 남은 사울 일행은 요새 안팎을 직접 살펴보았다.
하지만 잔인한 광경만 목도했을 뿐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곧 일단의 병력이 다크 엘프 추적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다크 엘프는 모습을 감추었다.
* * *
하얀 까마귀의 본부가 위치한 중립 지대는 척박한 곳이다.
거주하는 인구가 적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나 다른 적들의 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조직에서는 본부를 지키는 병력은 실력자 위주로 뽑았다.
그 때문에 율렌 섬을 주름잡는 범죄 조직, ‘하얀 까마귀’의 본부는 항상 다수의 정예 병력이 주둔했다.
깡패나 도적 무리 주제에 ‘정예 병력’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우습다 여길 수도 있지만, 하루가 멀다고 전투가 벌어지는 곳이라 본부를 지키는 병력의 실력은 왕국의 정예병 못지않았다.
그만큼 싸우는 데 이골이 난 하얀 까마귀 조직원들은 언제나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따라서 본부에 누군가 접근하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저건 뭐야?”
“뭐 하는 자식이 겁도 없이 혼자서…….”
험한 소리와 함께 창칼을 뽑아 ‘누군가’에게 다가간 조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모두가 잘 아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부두목?”
하얀 까마귀에서 두목이라 불리는 건 오직 킬리안 비셔스 한 명뿐이다.
그리고 부두목이라 불리는 건 서열 2위인 제온과 3위인 칼립소뿐이다.
나타난 건 칼립소였다.
항상 입고 다니는 뇌쇄적인 드레스 차림 대신 누더기를 걸친 거지꼴이었지만, 틀림없는 칼립소였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칼립소는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을 부라렸다.
“두목은?”
“그러니까 부두목과 이야기를…….”
“내가 돌아왔다고 알려.”
“네, 넵!”
제온은 조직원에게 너그러운 부두목이었지만, 칼립소는 아니었다.
수틀리면 문자 그대로 칼 맞을 위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조직원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덕분에 칼립소는 바로 킬리안 앞에 설 수 있었다.
“…….”
제온과 ‘사업 이야기’를 하다 칼립소를 맞이한 킬리안은 칼립소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와 먼지로 더럽혀진 몸.
몸에 걸친 건 거지나 입을 법 한 누더기.
어떻게 봐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몰골은 아니다.
문득 킬리안이 손을 휘둘렀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빛이 칼립소를 덮쳤다.
어차피 지친 몸으로는 피하기도 어렵다.
칼립소는 가만히 자신을 덮친 실을 받아들였다.
“윽…….”
가느다란 실이 온몸을 파고드는 느낌에 칼립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함부로 움직이면 살이 찢기는 수준을 넘어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것이다.
나아가 킬리안이 잔인한 마음을 먹으면 그대로 토막이 날지도 모른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되어 신음하는 칼립소에게 킬리안이 물었다.
“꼴을 보니 실패했군. 그것도 비참하게.”
“…네.”
“데리고 간 부하들은 어떻게 되었나?”
“모두 처리했어요.”
“처리했다고?”
“저와 부하들 모두 죽거나 붙잡혔고, 저 혼자만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후환을 남길 수는 없었어요.”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킬리안은 금방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러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킬리안은 포박을 조금 느슨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 칼립소를 용서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났으면서 혼자 거지꼴로 돌아오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긴 이야기예요.”
“시간은 많다. 지껄여 봐라.”
“그러니까…….”
칼립소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킬리안보다 곁에 있던 제온이 더 놀랐다.
“네가 손도 못 쓰고 당했다고?”
“그래.”
“네가 방심한 것 아닌가?”
“싸울 때 방심하는 건 너 같은 샌님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누굴 상대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듣고 있던 킬리안이 다시 물었다.
“칼립소.”
“네. 두목.”
“네가 실수했나?”
“아니요.”
“그럼 내 생각보다 네가 약한 건가?”
“그렇지 않아요. 그 투구 전사라는 연놈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놈들 곁에 달라붙어 있는 미지의 실력자가 ‘진짜’예요.”
“지금 네 말이 변명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믿지?”
“그 실력자는 아마 두목보다도 강할 테니까요.”
이런 칼립소의 말에 킬리안의 눈이 번뜩였다.
보고 있던 제온은 숨을 멈췄다.
혹시 두목이 자제력을 잃기라도 하면 칼립소는…….
“그렇단 말이지.”
다행히 킬리안은 자제력을 잃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하는 제온에게 킬리안이 물었다.
“제온.”
“네. 두목.”
“내가 약한 놈인가?”
“네?”
“칼립소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변방 영지에 나보다 강한 놈이 있다는 것 아닌가. 내가 변방 영지에서 굴러먹던 이름 없는 놈에게도 밀릴 만큼 약한 놈인가?”
제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두목.”
“그럼 정말 이상한 일이군. 칼립소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칼립소가 말했다.
“믿고 안 믿고는 두목의 자유지만,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두목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목숨을 구걸할 바에야 혼자 사라졌을 거예요.”
그런 칼립소를 바라보던 킬리안이 손을 거두었다.
동시에 칼립소는 자신의 몸을 휘감은 실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제온.”
“네.”
“지금 상황에 대한 네 의견을 말해 봐라.”
제온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칼립소가 약한가?
절대 그렇지 않다.
머리를 쓰는 건 뒤떨어질지 모르나 싸움 실력 하나만은 대단한 실력자다.
자신보다 강한 건 물론, 왕국군에 입대해도 실력자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렇다면 킬리안이 약한가?
더더욱 그렇지 않다.
율렌 섬 최강자는 아니겠지만, 상위권의 강자다.
그런 상황에서 칼립소가 사실을 말했다면 결론은 하나다.
그 변방의 영지에 괴물 같은 강자가 있다는 것.
생각을 정리한 제온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다 들은 킬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과 같군.”
킬리안이 칼립소에게 말했다.
“앉아라.”
“네.”
자리에 앉은 칼립소는 자신이 겪은 일을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다 들은 킬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대로라면 투구 전사라는 연놈들도 만만하지 않은데, 그것들 곁에 나보다 강한 괴물이 붙어 있다?”
“네. 괴물도 보통 괴물이 아니에요. 우리 친구들이 준 그 힘이 아니었다면… 저는 감옥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처형장에 끌려갔겠지요.”
“그 힘을 유용하게 썼나?”
“네, 두목. 흑마법인지 뭔지 상당히 쓸 만하더군요.”
킬리안은 칼립소의 몸을 흘긋 바라보았다.
누더기 같은 복장 곳곳에 피가 묻었지만, 대부분 남의 피일 것이다.
혼자서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지쳤지만 몸에 큰 상처를 입은 기색은 없다.
조금 전 실에 묶여 입은 생채기도 어느덧 아물었다.
보통 다크 엘프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회복력이다.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 치료 마법을 써 준 것도 아니다.
바로 흑마법의 힘이다.
“그 괴물이라는 자에 대해 더 말해봐라.”
“일단 여자에요.”
“그리고?”
“복면을 쓰고 있었기에 눈동자가 빨간 것 외에는 얼굴은 못 보았고요.”
“빨간 눈동자라고?”
킬리안의 눈빛이 변하자 제온이 물었다.
“두목. 누구인 지 아시겠습니까?”
“괴물 같은 실력을 가진 빨간 눈동자의 여자… 이 조건에 맞는 건 내가 아는 한 딱 한 명뿐이다.”
“그게 누구입니까?”
“카스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