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르멜 카를로스, 21세.
명문가 카를로스의 적자 중 한 명이며 왕국 정보부 ‘회색 그림자’ 소속 기사.
이 정도면 촉망받는 젊은 귀족이라는 호칭을 달기에 손색이 없다.
거기에다 루시아 왕녀가 수하로 삼을 정도면 능력도 상당할 것이다.
이런 사울의 짐작을 증명하듯, 아르멜은 인사를 마치고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지?”
“선물입니다. 전하.”
윗사람에게 봉투를 바친다면 뇌물부터 떠올리는 게 당연하겠지만 아르멜이 가져온 건 뇌물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선물, 그것도 사울이 반가워 할 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이건……!”
봉투 속 종이에는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름답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운 인상의 다크 엘프.
바로 사울 일행이 잡았다 놓친 다크 엘프가 분명했다.
“이걸 어디서 얻었지?”
“‘투구 전사’ 일행이 다크 엘프를 잡았지만 놓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름대로 조사해 본 결과, 놓친 다크 엘프가 초상화 속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대단하군.”
정말 칭찬할 만한 정보력이요, 행동력이다.
영지에 막 도착한 젊은 기사가 투구 전사의 정체가 사울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놓친 다크 엘프의 정체까지 알아냈다니.
‘역시 누님의 부하답군.’
확실히 능력은 의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루시아가 직접 보낼 정도면 왕실에 대한 충성 역시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민감한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레이. 선생님과 아이나를 불러와.”
“네, 전하.”
곧 카스텔이 불려왔다.
카스텔을 본 아르멜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카스텔 님.”
작위도 없고 귀족도 아닌 카스텔 상대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예를 갖춘 것이다.
반면에 카스텔은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
지금처럼 예절에 관심이 없는 카스텔의 모습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검은 마녀’의 악명과 국왕의 총애, 그리고 카스텔이 권력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라 지금껏 큰 문제는 없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아르멜의 태도를 보니 예절의 ‘예’자도 모르는 카스텔에게 별다른 불만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르멜의 눈빛을 보니 불만은커녕 선망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이어 아이나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르멜은 아이나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이야기는 들었어요. 잘 부탁해요.”
아르멜이 고개를 숙이고, 아이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둘 다 군인의 자세로 인사를 나누었고 겉보기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울은 아르멜과 아이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왕실 세력에 속한 사람과, 영주의 딸은 서로 편할 수만은 없을 테니까.
특히 아이나 입장에서 아르멜은 영지의 감시꾼이나 왕실의 끄나풀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덕분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는 건 사울의 몫이었다.
“아르멜. 두 분에 대한 소개는 필요 없겠지?”
“네, 전하. 구국의 영웅인 카스텔 님. 그리고 영주님의 하나뿐인 따님인 아이나 씨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이 ‘투구 전사’ 라 불린다는 것도요.”
아이나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사울을 돌아보았다.
사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 전사’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된다는 뜻임을 알아들은 아이나가 말했다.
“놀랍군요.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왕자님과 카스텔 님, 그리고 레이디 같은 분과 함께 움직이게 되었으니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한 것이지요.”
아르멜의 말에 아이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당신과 우리가 함께 움직인다고요?”
“그렇습니다.”
“대체 왜…….”
“제 임무입니다. 저는 루시아 전하께 직접 여러분들을 도우라는 임무를 받고 왔습니다.”
아이나도 루시아 전하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는 알았다.
‘얼음 왕녀’의 소문은 이 변방에도 닿았으니까.
‘분명 루시아 왕녀는 왕실의 적녀이고 사울 전하보다 나이도 더 많았지. 그렇다면…….’
아이나는 아르멜이 사울도 쉽게 다룰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하물며 영주도 아닌 자신이 신분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는 더욱 아니다.
아이나는 이 자리에 불려오기 전 오라버니가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
‘아르멜이라는 기사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거라.’
비로소 오라버니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이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무래도 원하지 않는 요조숙녀 노릇을 해야 할 때인 모양이다.
“그, 그렇군요. 네. 잘 부탁해요. 아르멜 경.”
“경이라는 표현은 괜찮습니다. 아직 기사일 뿐, 제대로 된 작위도 없는 몸이니까요.”
“그러지요. 아르멜.”
“네. 아이나.”
자신과는 달리 허락도 없이 이름만 부르는 아르멜의 무례에도 아이나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의 명령이었으니까.
‘이거야 원.’
보고 있던 사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변방에서 나쁜 놈을 때려잡으면서 실력을 키울 생각으로 왔는데 상황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사울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정도 난관을 이기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전생의 원수들에게 복수하겠는가.
이것도 다 공부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다.
결심한 사울이 무게를 잡고 말했다.
“선생님. 아이나. 그리고 아르멜.”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모두 자세를 바로 했다.
“당분간 우리 넷이 함께 활동하게 될 거예요.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뭉치게 되었으니 나는 우리들의 힘으로 하얀 까마귀의 종말을 보고 싶어요. 그것은 왕국을 위한 것이고, 이 영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이의 없지요?”
아이나가 먼저 대답했다.
“네, 전하.”
아르멜도 뒤이어 대답했다.
“네, 전하.”
카스텔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까닥거렸다.
카스텔 기준으로는 두 사람 못지않게 예의를 갖춘 행동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을 다잡은 사울이 아르멜에게 명령했다.
“아르멜. 나에게 알려 주었던 정보를 두 사람에게도 알려 줘.”
“네?”
“조금 전 나에게 알려 주었던 정보 말이야.”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르멜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아이나 쪽을 향했다.
그러자 지금껏 요조숙녀마냥 화가 나도 참아 넘기던 아이나도 더 참지 못했다.
“이봐요. 당신.”
“???”
“듣자하니 정말 너무하군요.”
“뭐라고요?”
“전하께서 허락하셨는데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가 들어야 할 이야기를 못 듣게 한다는 거예요?”
아이나의 눈길이 사나워졌고, 아르멜의 눈길은 싸늘해졌다.
분노로 타오르든, 싸늘하게 식든 좋은 일이 아니다.
사울은 사태 수습에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만하세요.”
사울이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아이나도, 아르멜도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을 읊는 두 사람에게 사울이 다시 말했다.
“아이나는 이 곳 영주의 딸이고, 아르멜은 카를로스 가문의 적자에요. 거기에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몸이니 서로를 존중하세요. 내가 그대들을 존중하는 것처럼.”
“…….”
“두 번은 말하지 않겠어요.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 역시 그대들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겠어요.”
“죄송합니다. 전하”
“아르멜. 그 정보를 모두에게 알려 줘.”
“네. 전하.”
아르멜은 사울에게 보여 주었던 다크 엘프 초상화를 카스텔과 아이나에게도 보여 주었다.
“이건…….”
지금껏 말이 없던 카스텔이 아르멜에게 물었다.
“이 다크 엘프에 대해 알고 있나요?”
“네. 카스텔 님. 그 자의 이름은 칼립소입니다.”
사울과 카스텔에게는 낯선 이름이었지만, 아이나는 달랐다.
“칼립소? 칼립소라면… 킬리안의 직속 부하 말인가요?”
“용케도 알고 있군요.”
“이름은 들어 보았죠. 킬리안 밑에 제온과 칼립소라는 거물 범죄자가 붙어 있다고.”
아르멜은 사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 따로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그럼 이 칼립소라는 다크 엘프는 킬리안 조직에서 어느 정도 되는 녀석이지?”
“서열 3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위는 조직에서 책사 역할을 하는 제온이라는 범죄자입니다.”
듣고 보니 칼립소의 실력이 납득이 갔다.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범죄자가 웬만한 왕국 기사 이상의 실력을 가진 게 의아했는데, 하얀 까마귀의 서열 3위 정도 되는 거물이라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듣고 있던 카스텔이 다른 것을 물었다.
“칼립소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은 없나요?”
“특별한 것이라고 하시면?”
“치료 마법의 전문가라던가.”
“그런 정보는 없었습니다. 단검을 잘 다룬다는 정보는 있습니다만.”
질문을 한 카스텔이 의아해하자 사울이 물었다.
“선생님.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나요?”
“칼립소는 분명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제가 직접 손을 썼기에 그것은 확실합니다.”
“과연. 큰 부상을 입은 당일 바로 탈옥을 한 게 믿기 어렵다는 말이군요.”
“네. 전하.”
사울 역시 그 점을 의아하게 여겼다.
분명 칼립소는 카스텔에게 당해 중상을 입은 데다 마법 사슬로 꽁꽁 묶인 채였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혼자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인가.
조력자가 있다면 모든 게 설명되지만, 조력자의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다.
지금까지 나온 흔적이나 증거는 칼립소가 혼자서 사슬을 풀고 나와 함께 갇혀 있던 조직원들까지 쓸어버리고 도망친 것임을 암시했다.
마법 사슬을 풀어낸 뒤 치료 마법으로 스스로를 회복시키고 도망친 것이다.
전생과 현생의 상식 어디에서도 이 이상의 설명을 찾기는 어려웠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에요. 조력자도 없이 혼자서 도망치다니.”
아르멜이 다른 정보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칼립소에게는 이런 별명이 있었습니다. 불사신이라고요.”
“불사신?”
“네. 몇 번이나 큰 상처를 입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기어코 살아났다고 합니다.”
“불사신이라…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사울은 논점을 돌리기로 했다.
이미 자기 조직으로 돌아간 범죄자 이야기를 계속 해 봐야 의미 없을 테니까.
“앞으로는 우리 넷이 함께 움직이게 될 거예요.”
사울의 말에 아르멜도 의미심장하게 한마디 보탰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저도 이제부터 ‘투구 전사’로 함께 활동할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투구 전사’가 한 명 더 늘어나겠군요.”
“…흥.”
아이나는 입을 삐죽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아이나의 모습에 사울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좀 달래 줘야겠는걸.’
항상 나이보다 의젓해 보이던 아이나였지만, 지금의 아이나는 철없는 소녀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울보다 몇 달 생일이 빠르지만, 그래도 아직 열여섯 살에 불과한 소녀가 아닌가.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카스텔, 아이나, 거기에 아르멜까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한 사람들을 다 같이 끌고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