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르멜이나, 왕실 쪽에서 수상한 움직임은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방심하지 말고 잘 살펴봐라.”
“네, 아버님. 그리고 하얀 까마귀 쪽은 어떡합니까?”
“킬리안 말인가.”
“네. 다소 무리해서라도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뽑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던칸 역시 칼랜드와 같은 생각이었다.
자신의 수하 중에서도 킬리안의 뇌물을 받은 자가 있겠지만, 고작 그 문제로 킬리안을 방치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악마 토끼풀이나 파는 놈을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 문제라면 왕자나 아르멜과도 협조해 봐라.”
“네. 그럼 아이나는 어떻게 할까요?”
소영주가 킬리안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신 딸은 발을 빼게 하느냐, 아니면 계속 참여시키느냐.
던칸은 장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계속 참여시켜라.”
“괜찮을까요?”
“어차피 그 애는 이 문제에서 깊게 발을 담갔다. 이제 와서 빼는 것 보다는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공을 차지하는 게 낫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시종이 와서 알렸다.
“영주님.”
“무슨 일이냐?”
“왕자 전하께서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알았다.”
시종 앞에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던칸은 시종이 나가자 다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왕자가 생각보다 빨리 왔군.”
“교단과 만나 그럴듯한 이야기라도 주고받은 것일까요?”
“그게 아니고서야 신전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날 찾을 이유가 없지. 너는 잠시 이곳에 있거라.”
던칸은 사울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사울은 카스텔과 아르멜을 대동한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앳된 얼굴 탓인지 천진난만하게까지 보였지만, 저런 표정에 속으면 안 된다.
“전하.”
“어서 오세요.”
던칸이 앉기 무섭게 사울이 말했다.
“신전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들었습니다, 전하.”
피차 순진한 척 할 필요는 없다.
사울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신전 쪽에서도 여러 가지를 알고, 또 행동하기를 원하더군요.”
“이단자들과 하얀 까마귀 중 어느 쪽 말씀입니까?”
“물론 이단자들을 쫓는 데 더 집중하고 있어요. 하지만 하얀 까마귀가 이단자와 함께하고 있는 게 기정사실이니 잘하면 하얀 까마귀 문제도 신전의 협조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중요한 건 영주의 의향이지요.”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던칸이 물었다.
“본격적으로 하얀 까마귀를 토벌할 생각입니까?”
“더 미룰 이유가 없잖아요? 토벌군을 결성하여 쓸어버리는 게 모두를 위한 길일 것 같은데.”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저희 영지 사정상 대대적인 토벌군을 결성하기는 어렵습니다.”
던칸이 엄살을 피우는 건 아니다.
홉킨스 가문의 영지는 그럭저럭 잘 운영되고 있지만, 여유로운 곳은 아니다.
영지를 그럭저럭 굴러가게 만들기 위해 병력과 자원 대부분이 투입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대적인 토벌군을 결성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얀 까마귀는 강적이지요.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그들의 뿌리를 뽑을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썩은 뿌리가 영지는 물론 왕국까지 썩게 만들 거예요.”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희 영지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내가 직접 나서고, 왕실과 교단도 협력한다면요?”
던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나오는가.’
전혀 예상치 못한 건 아니다.
사울이 영주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할 입장은 못 되니까.
그렇다면 협력을 제안하는 게 합리적이다.
던칸은 사울 곁에 있던 아르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르멜도 입을 열었다.
“회색 그림자에서도 전하의 뜻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말 왕국군이 하얀 까마귀 토벌에 협조를 해 주겠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어디까지나 영주님의 의사에 달렸지만, 허락하신다면 빠른 시간 내에 토벌군을 결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국군과 함께 토벌군을 결성하여 하얀 까마귀를 뿌리째 뽑는다.
하얀 까마귀와는 어떤 연줄도 없는 던칸으로서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악마 토끼풀은 영지에서도 꽤 심각한 문제다.
씹거나 연기를 피울 때는 평안과 쾌락을 주지만 지나치게 사용하면 심각한 중독성과 금단 증상을 준다.
중독이 되면 평안과 쾌락을 느끼는 게 아니라,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악마 토끼풀을 씹거나 피워야 한다.
결국 중독자는 이성을 잃고 미치거나 악마 토끼풀에 끌려다니는 삶을 산 끝에 비참히 삶을 마치고는 했다.
그런 피해자가 영지 안에도 결코 적지 않았다.
사울 왕자가 앞장서 하얀 까마귀 토벌에 나선다면 반가운 일이다.
다만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다.
토벌군이 실패한다면 그 피해는 상당 부분 영지에서 뒤집어 쓸 테니까.
반대로 토벌에 성공하더라도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내가 하얀 까마귀와 거래를 한 적은 없지만, 내 부하들 중에는 분명 놈들과 내통하는 녀석이 있겠지.
하얀 까마귀와 거래한 영주의 부하들은 하얀 까마귀가 토벌된 뒤 어떻게 나올까.
물론 깡패들과 거래할 정도라면 하찮은 녀석들일 것이다.
홉킨스 가문과 깊이 관련된 충신들 중에는 그런 녀석들이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마음의 저울질을 하던 던칸이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전하.”
“협력하는 건가요?”
“네. 하루빨리 킬리안 비셔스를 잡아죽이고 놈의 머리를 장대에 꽂아 이 모든 일을 끝낼까 합니다.”
“좋아요. 아르멜.”
“네, 전하.”
“영주님이 결단을 내리셨으니 지금 바로 토벌군을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 * *
사울과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던칸의 말에 칼랜드는 적잖이 놀랐다.
“하얀 까마귀 토벌군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왕국군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지금 우리 영지 사정으로 대규모의 토벌군을 꾸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실패하면 피해가 크겠지. 하지만 성공한다면 우리로서도, 또 왕자로서도 얻는 게 적지 않을 테다.”
“왕자와 함께 많은 것을 얻을 생각이십니까?”
“그래. 왕자가 그것을 원하고 있으니 별수 없지 않느냐. 영악한 소년이야. 한쪽만 이로운 일이라면 우리가 거부할 명분이 있지만, 우리에게도 이로운 일이라고 미끼를 던지고 있으니 쉽사리 거부할 수도 없게 되었어. 거기에다 교단까지 끌어들였으니.”
던칸의 말에 칼랜드가 더욱 놀랐다.
“교단이 왕자와 함께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야기를 나눠 보니 대신전 쪽이 왕자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영지의 신전이라면 우리가 제어할 수 있지만 대신전은 우리의 제어 밖에 있다. 우리가 손해만 보는 일이라면 무리해서 거절하겠지만 성공하면 확실히 이익이 될 일이니 무작정 거절하기도 어렵고, 거기에다 명분도 저쪽에 있고… 정말 사울 왕자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 나이에 이렇게 치밀하고 영민하게 움직이기는 쉽지 않은데.”
칼랜드도 던칸의 말에 동감했다.
특히 싸우는 일을 제외하면 미숙하게만 보이는 여동생과 비교하면 더더욱.
“그 토벌군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네 여동생에게 맡겨야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검은 마녀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애를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그 아이도 홉킨스 가문의 일원이다. 우리 가문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아이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고.”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럼 저는 어떻게 할까요?”
“너는 영지 일을 계속 보거라. 나는 토벌군을 관리하고, 혹시나 킬리안이 죽고 난 뒤 벌어질지 모를 후폭풍을 처리할 준비를 하겠다.”
“네, 아버님.”
결심을 마친 던칸이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든 사울 왕자를 영지에서 내보낼 생각이다.”
“저도 찬성입니다. 왕실에서 왕자 체류 비용 이상의 자금을 지급하고 있어 좋은 점도 있지만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킬리안 토벌이 끝나면 왕자는 내보낼 생각이다. 왕자도 얻은 게 많을 테니까.”
“그럼 아이나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건 그 때 결정할 일이지. 요즘 아이나는 왕자와 어떻게 지내지?”
“전보다 소원해진 것 같습니다. 아르멜이라는 기사가 왕자와의 교류를 계속 방해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군.”
던칸은 아이나와 사울이 가까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울 왕자는 나이에 비해 놀랄 만큼 노회한 녀석이다.
그런 왕자와 지나치게 가깝게 지내면 결국 아이나가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
처음부터 그럴 가능성을 염두 하기는 했지만 정말 휘둘린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아버님. 아이나더러 사울 왕자와 거리를 두라 할까요?”
“됐다. 괜히 우리가 나섰다가 상황이 더 부자연스러워 질 수 있으니. 어차피 사울 왕자가 떠나면 그걸로 되었고.”
“네, 아버님.”
* * *
던칸과 이야기를 마친 사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사실입니까?”
금방이라도 놀라 자빠질 듯한 표정을 보니 이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사울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토벌군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도적놈들 토벌군을 이끄신다고…….”
“일이 그렇게 되었어.”
사울은 완곡하게 말했지만 진의를 모를 그레이가 아니었다.
사울이 주도하지 않고서야 왕자가 도적 토벌군을 결성하고 그것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는가.
“전하. 너무 위험한 일 아닙니까?”
“위험하지. 각오하고 있어.”
“전하가 이런 일을 하시기엔 너무 이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그레이의 잔소리는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강제로 끊으려면 끊을 수도 있었지만, 사울은 일부러 끝까지 들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걱정하는 사람의 충언을 듣는 건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 충언을 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입니다. 전하.”
그레이의 장광설이 끝나자 사울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조심할게.”
“조심? 전하…….”
“다 우리 왕국을, 그리고 왕실을 위한 거야.”
“…….”
더 말해봐야 소용없음을 안 그레이는 아르멜과 카스텔을 원망 섞인 눈으로 쏘아보았다.
왕자 전하가 위험한 일을 하시는 걸 말리기는커녕 부추겼느냐’는 눈빛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레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
‘그레이가 참 마음고생이 심해.’
나이를 먹을수록 그레이의 속을 썩이는 사울이었지만,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니까.
하지만 그레이의 말만 듣고 살면 왕자로서 살 수는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삶의 목적은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사울은 아르멜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토벌전은 꼭 성공해야 해. 킬리안의 목을 베지 않으면 성공이라 할 수 없어. 아르멜.”
“네, 전하.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모아 보겠습니다.”
“부탁해. 그리고 선생님. 육체 개조 조사 건은 아직 큰 성과가 없지요?”
“네.”
“그럼 토벌전을 도와주세요. 하얀 까마귀를 토벌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한 정보도 나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하얀 까마귀 토벌전’ 준비는 거의 끝났다.
남은 건 하나 뿐이다.
때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찾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드레스 차림의 아이나였다.
“아르멜, 잠시 나가 줘.”
“네. 전하.”
이미 사울은 아르멜에게 일러두었다.
아이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불렀으니 그녀가 오면 잠시 자리를 비워 달라고.
아르멜은 사울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드는 기색이었지만,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아르멜이 나가고, 아이나가 사울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여전히 무술 수련에 매진하나요?”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요.”
성인식을 치른 레이디가 무술 수련밖에 할 일이 없다니.
수도의 귀족 영애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하얀 까마귀 토벌군 이야기는 들었지요?”
“네. 전하께서도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투구 전사가 아니라 내 이름을 걸고 참여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