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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41화 (41/232)

41화

기사와 장교들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가운데, 아이나가 다가와 물었다.

“전하. 기존 급료에 두 배에, 세 배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네 배나 다섯 배까지 공약할 생각도 해 봤지만, 내 명령을 따르는 병사들에게는 책임질 수 있는 공약을 해야 하니까요.”

“확실히 병사들의 반응은 무척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재정을 어떻게 마련하지요?”

아이나는 넉넉지 못한 홉킨스 가문에 책임을 씌우려 하는 게 아닌지 우려하는 모양이었다.

사울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말아요. 토벌전에 성공하면 하얀 까마귀가 모은 재산을 거둘 수 있을 테니까. 율렌 섬의 악마 토끼풀 판매를 총괄하는 녀석들의 창고를 일부만 털어도 병사들 급여를 두세 배로 지급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거예요.”

“그, 그렇군요. 하지만…….”

“적들의 창고를 털지 못하면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약속은 지킬 거예요. 걱정 말아요. 내 재산을 팔면 충분히 책임질 수 있으니까.”

사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비록 왕실의 서자지만, 왕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왕위 계승권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산도 어느 정도 있었다.

물론 자신의 재산만으로 병사 천 명의 급여를 반년간 두세 배로 올리고 그 액수를 모두 감당하는 건 출혈이 크겠지만, 사울은 어떻게든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다.

“자. 그럼 회의를 하러 가요.”

사울은 토벌군의 간부들이 모인 천막으로 향했다.

사울과 아이나는 물론 카스텔과 아르멜, 그 외에 토벌군 간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울이 가장 윗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각각 자리에 앉았다.

아랫자리에 앉아 있던 기사 한 명이 일어났다.

“지금부터 전황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기사는 미리 준비해 둔 커다란 지도를 펼쳤다.

갈레트 지방과 그 주변 지역이 꽤 정밀하게 묘사된 지도였다.

“여기가 토벌군이 있는 곳. 그리고 중립 지대의 버려진 군사 기지가 현재 하얀 까마귀의 본거지입니다.”

사울이 물었다.

“킬리안이 지금도 그곳을 본거지로 쓰고 있는 게 확실한가?”

“네, 전하. 최근에도 놈들이 이곳을 본거지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놈의 병력은?”

“본거지에 300명 정도가 머무르고 있다고 합니다.”

300명.

천 명의 토벌군과 비교하면 초라한 규모다.

하지만 하얀 까마귀의 핵심을 지키는 병력 300명이라면 머릿수가 적다고 얕볼 수 없다.

사울은 알고 있는 하얀 까마귀의 정보들을 떠올려 보았다.

어중이떠중이 수준의 도적들도 있지만, 왕국군 입장에서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실력자들도 여럿 있다고 들었다.

다크 엘프 칼립소처럼 말이다.

소문에 따르면 칼립소는 하얀 까마귀에서 킬리안을 제외하면 상대할 자가 없다고 했다.

칼립소도 상당한 강자였으니 킬리안은 그 이상일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킬리안과 1:1로 싸워 이길 만한 사람은 카스텔 한 명뿐일 것이다.

사울이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기사가 계속 이야기했다.

“다들 알고 계시는 대로 토벌군 대부분을 이끌고 적들의 본거지를 칠 계획입니다. 혹시 킬리안이 본거지에서 저항한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울도 기사의 말에 동의했다.

병력은 이쪽이 세 배가 많고 실력자도 적지 않다.

하얀 까마귀가 지형적인 유리함을 가지고 격렬히 저항한다고 해도 정면 대결로는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것을 끝내고 하얀 까마귀의 본거지를 박살낸 뒤 킬리안까지 사로잡거나 목을 벤다.

기사의 말대로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상적인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은 어느 정도지?”

사울의 질문이 기사가 대답했다.

“킬리안은 과격하고 무모한 면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충동적인 성격을 자극하면 가능성이 높아질 겁니다.”

“…….”

사울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하지만 어린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일단 말을 아꼈다.

사울의 심정을 눈치챈 아르멜이 말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일이 다르게 돌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건 그렇습니다.”

“킬리안 비셔스가 과격하고 무모하기만 한 놈이었다면 율렌 섬 전체의 암흑가를 평정하지는 못했겠지요. 내 생각에는 오히려 놈이 직접 우리와 맞서기보다 다른 쪽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아르멜의 말에 몇몇 토벌군 간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 역시 아르멜의 말에 동의했다.

설명을 하던 기사도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킬리안이 우리와 맞서지 않는다면 본거지를 버리고 도망 칠 것입니다. 그러면 일단 본거지를 파괴한 뒤 본격적으로 킬리안 추격에 나서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렇군.”

다시 사울이 입을 열었다.

“나도 아르멜이 말한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킬리안이 다소 무모할 지는 모르나 사리 분별도 못하는 녀석은 아니겠지. 강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기사도 같은 것을 알 리도 없을 테고. 그렇다면 그가 본거지에서 도망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울의 말에 대부분이 동감하는 기색이었다.

대충 회의가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자 사울은 슬슬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런 가운데 아이나가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을 길게 끌 수는 없어요. 또한 영지민들에게도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 할 거예요.”

사울 역시 동의했다.

적국과의 전쟁이 아닌 범죄 조직을 토벌하는데 천 명의 토벌군을 조직했다.

토벌이 길어질수록 영지를 다스리는 홉킨스 가문의 부담도 커진다.

홉킨스 가문은 토벌군을 길게 유지할 만큼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적들을 포위하여 말려 죽이는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영지의 부담을 줄이고 주민들과 이종족들의 민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가능한 빨리 마무리 지을 필요가 있었다.

쓸모 있는 의견이 계속 나오는 가운데, 카스텔도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나와 킬리안이 만나도록 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곧바로 이 전투를 끝낼 수 있을 테니까요.”

“…….”

거만한 말이었지만 회의장의 그 누구도 반론하지 못했다.

카스텔이 킬리안을 보면 그의 목숨도 끝난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이후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한참 이야기가 오간 끝에 토벌전의 전략이 확정되었다.

토벌군은 적의 본거지로 진격한다.

적들이 본거지에서 맞서면 그대로 전투를 벌여 전멸시킨다.

만약 적들이 도망치면 토벌군을 산개하여 추격하고, 대기하고 있는 왕국군과 영주군이 공조하여 킬리안을 찾아 제거한다.

가능한 장기전이 아닌 속전속결로 적을 끝낸다.

전략이 확정되고 사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모두들 잘 부탁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전쟁은 왕국 모두를 위한 것이며, 승리의 영광 역시 이 자리의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다.”

“네, 전하!”

결의에 찬 분위기에 사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 하다.

* * *

토벌군은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모였다.

하지만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천 명의 병력이 이동하는 걸 숨기는 건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지에 조직원을 많이 풀어놓은 하얀 까마귀가 토벌군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토벌군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하얀 까마귀 조직원은 즉각 이를 본거지에 알렸다.

“뭐라고?”

보고를 받은 킬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온은 방금 한 말을 다시 읊었다.

“우리들을 치기 위한 토벌군이 결성되었다고 합니다.”

“대장이 어떤 놈이냐?”

“토벌군의 우두머리는 사울 왕자라고 합니다.”

사울 왕자라는 말에 킬리안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 어린 왕자 놈이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내 목을 가지러 온다?”

“네, 두목.”

“어린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군.”

“그렇게만 볼 일이 아닙니다. 사울 왕자 곁에 카스텔이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카스텔이 토벌군에 가담했다면 상황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군. 토벌군에 검은 마녀가 함께한다면 얕볼 수는 없지.”

킬리안은 카스텔에게 원한이 있던 칼립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검은 마녀가 온다는데, 상대할 자신이 있나?”

카스텔에게 깊은 원한을 가진 칼립소였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대책 없이 싸우면 필패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면 대결은 어렵겠지요.”

“그래?”

킬리안이 다시 제온에게 물었다.

“왕자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저런 일들을 하지 않았나?”

“네, 두목. 가멜다 왕국 쪽과 접촉해 보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홉킨스 가문 영지에 왕자와 검은 마녀가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인데 큰 움직임이 없다는 건…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거나 일단은 손 놓고 보고만 있겠다는 뜻이겠지요.”

“겁쟁이들이 휴전 조약을 깨고 싶지 않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왕자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바로 전쟁의 빌미가 될 테니까요. 가멜다 왕국이나 다르센 왕국이나 휴전 조약을 깨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사울 왕자를 방해하기 위해 미끼를 던졌는데, 제대로 반응이 오기 전에 토벌군이 결성되었다.

킬리안도 사울 쪽이 한발 앞섰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울 왕자라는 놈, 정말 거슬리는군. 어떻게든 산 채로 잡아서 껍질을 벗겨놓고 싶은데.”

“두목. 왕자의 껍질을 벗겼다가는 왕국에서 우리 모두의 껍질을 벗기려 할 겁니다. 왕실에서 작정하고 병력을 모아 공격해 오면 어떻게 맞서겠습니까.”

“…지금 오는 토벌군의 숫자는?”

“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울 왕자의 껍질을 벗기거나 목을 따면 토벌군의 숫자가 만 명으로 불어나겠지?”

“더 불어날 수도 있습니다.”

“훗. 웃기는 상황이군. 우리를 잡아 족치려 하는 놈의 안위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듣고 있던 칼립소가 제온에게 물었다.

“왕자만 살려두고 토벌군만 전멸시키면 안 되는 거야?”

“이미 말했듯이 토벌군의 규모는 천 명 정도다. 그에 반해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는 병력을 싹싹 긁어모아야 삼백 명. 다른 곳에 흩어진 병력을 급히 모아도 오백 명도 모으기 힘들다. 오백도 안 되는 병력으로 검은 마녀 같은 괴물이 함께 있는 정규군 천 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제온의 날카로운 반론에 칼립소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야 열심히 싸우면…….”

“대안 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려면 그냥 입을 열지 마.”

“뭐라고? 이 자식이!”

발끈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칼립소는 살기를 감지하고 행동을 멈췄다.

시선을 돌리니 자신을 노려보는 킬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 킬리안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면 설령 ‘하얀 까마귀의 3인자’라고 해도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결국 칼립소는 말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칼립소를 진정시킨 킬리안이 말했다.

“제온. 네가 말하는 대안이라는 건 결국 도망치자는 말 같은데. 내 생각이 맞나?”

“현재로서는 전략적 후퇴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두목.”

“전략적 후퇴를 한다면 어떻게? 오늘 밤이라도 당장 짐을 싸서 도망쳐야 하나?”

“들어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자리를 비울 시간은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본거지를 비우고 흩어져 시간을 끄는 전략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얀 까마귀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이럴 때를 위한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공격이 예상될 경우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다 챙기고 본거지를 불사른 뒤 병력을 나눠 여러 곳의 아지트에 숨어 시간을 끈다는 계획이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일 뿐이다.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작정하고 토벌군을 보내도 오랫동안 유지하기는 어려울 터.

병력을 나눠 피해를 줄이고 시간을 끌어 토벌을 흐지부지 시키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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