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토벌군은 하룻밤 머물렀던 곳에 일부 병력을 남겨 두고 나머지는 중립 지대를 향해 진격했다.
중립 지대.
공식적으로 다르센 왕국 영토도, 가멜다 왕국 영토도 아닌 곳.
법질서 대신 야생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
중립 지대에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긴장한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몬스터도 있다지?”
“솔직히 도적들보다 야수나 몬스터가 더 무서워.”
“가끔 어마어마하게 강한 몬스터도 나타난다고 하던데.”
중군 한가운데 있던 사울의 귀에 행군하는 병사들의 대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병사들의 실제 목소리가 궁금하던 사울이 카스텔의 마법으로 청력을 강화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떠드는 말은 잘못되었다.
이 주변에 몬스터가 사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수백 명의 병사들이 못 당해낼 만큼 강한 몬스터는 없다.
또한 몬스터도 야생의 존재라 스스로의 목숨은 소중히 여긴다.
소수의 여행자나 상인이라면 습격할 수 있지만, 800명의 무장 병력을 상대로 함부로 공격할 리는 없다.
‘병사들의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군.’
이런 사울의 생각은 빠르게 부대에 반영되었다.
곧 이 지역에는 강력한 몬스터가 발견된 바 없고, 만에 하나 발견된다면 즉각 카스텔이 나서 처치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러자 병사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도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이 지역에는 우리를 덮칠 만한 몬스터가 없다고?”
“믿을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몬스터가 나타나면 즉각 검은 마녀가 처리한다니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건 그래.”
안심한 병사들의 목소리에 사울은 작게 웃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자그마한 헛소문이나 공포를 초기에 잡지 않으면 점차 퍼져 자칫 부대 전체의 사기를 악화시키거나 무너뜨릴 수도 있다.
반대로 작은 것부터 바로잡고 개선하면 결국 토벌군 전체의 사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진군은 순조로웠다.
주변을 둘러봐도 몬스터나 하얀 까마귀의 조직원 등 어떤 적대적인 존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전령이 사울에게 달려왔다.
“전하. 정찰병에게서 보고입니다!”
“별다른 사항이 있나?”
“소수의 사람이 이동하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명의 정찰병 중 두 명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두 정찰병의 실종.
사울은 간단히 넘길 수 없는 일임을 직감했다.
거리가 멀고 지형이 험하다면 정찰병의 이동이 늦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주변은 그렇지 않다.
정찰병이 늦을 이유가 없고, 게으름을 피울 리도 없으니 정답은 하나다.
정찰병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
하지만 사울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정찰병을 둘씩 짝지어 보냈다.
따라서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 고의로 사고를 일으켰을 수도 있다.
아니, 누군가 사고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심상치 않은 보고에 몇몇 기사가 의견을 냈다.
“전하. 정찰병을 더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찰병 네 명은 무사히 돌아왔다면 굳이 새로 보낼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습니까? 괜히 움직임을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아이나도 의견을 냈다.
“전하. 정찰병은 둘씩 짝지어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두 명이 한꺼번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 보낸 정찰병들은 모두 정예이니 임무를 소홀히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계속 말해 보세요.”
“정찰병들의 사고에 하얀 까마귀가 개입한 것이라면…….”
아이나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지만, 사울은 그녀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둘 다 직접 본 적 있지 않은가.
카스텔이 아니었으면 모두를 큰 위기에 빠트렸을 칼립소 같은 실력자 말이다.
사울이 계속하라는 눈빛을 보냈고, 자신감을 얻은 아이나가 마저 말했다.
“적들이 아군 정찰병을 실종시켰을 가능성이 있다면, 이번에는 실력자를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나의 말을 듣던 기사들의 분위기가 둘로 갈라졌다.
왕국군 기사들은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영주군 기사들은 하나같이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파벌 다툼의 무서움을 떠올렸다.
아이나의 의견이 옳고 그른 게 문제가 아니다.
‘영주의 딸’인 아이나는 토벌군에서 홉킨스 가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다고 해도 영지 내에서 명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영주의 딸이라는 신분상 영주군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무시할 수 없다.
영주군과 경쟁 관계인 왕국군 입장에서는 아이나가 의견을 낸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울은 조율의 필요성을 느꼈다.
왕자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왕국군에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사울이 보기에도 아이나의 의견은 합당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하던 사울은 결단을 내렸다.
“그대의 말이 옳아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면서 사울은 아르멜에게도 나지막이 말했다.
“왕국군 기사들에게 내 의사를 전해 줘. 나는 왕자로서 왕국군을 소중히 여기지만 일방적으로 한쪽 편만 들어 줄 수는 없으니 이해해 달라고.”
“네. 전하.”
사울은 아이나의 의견에 따라 실력자들을 뽑았다.
보통 ‘실력자’의 기준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전사, 일명 ‘마법 전사’나 마법사들 말이다.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굉장히 컸다.
후방에 남겨 둔 병력을 제외한 현재 토벌군의 규모는 800여명.
그 중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는 50명도 되지 않았다.
사울은 그 중에서 10명을 뽑은 뒤 두 패로 나누어 파견하기로 했다.
사울은 그들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상황은 잘 알고 있겠지.”
“네, 전하.”
“둘씩 짝지어 보낸 정찰병들이 실종되었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정말 불의의 사고이거나 몬스터의 소행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얀 까마귀 놈들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지금부터 부대에 앞서 먼저 가 철저히 조사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위험하다면 언제든지 후퇴해도 좋다. 위험을 알리지 못하고 죽는 것 보다는 돌아와 위험하다는 것을 알리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도록.”
“네, 전하.”
그렇게 특별히 뽑아 보낸 정찰병들이 부대에 앞서 출발했다.
이 정도면 정찰병이 불의의 공격을 받아 모조리 실종당할 위험은 없을 것이다.
이후 토벌군은 신중하게 진군해 나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해가 저물도록 토벌군을 상대로 한 도발이나 공격은 없었다.
대신 두 패로 나누어 출동한 정찰병들 중 한쪽에서 먼저 정보를 가지고 왔다.
“전하. 정찰 보고입니다.”
“내용은?”
“먼저 파견된 정찰병 두 명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정찰병들의 사인은?”
“단순한 사고나 짐승이나 몬스터의 짓은 아닙니다. 사람이 날붙이로 공격 한 것 같습니다.”
짐승이나 몬스터가 만든 상처와 무기가 만든 상처는 다르다.
지금 이 지역에서 정찰병이 무기로 인한 상처로 죽었다면, 범인은 하얀 까마귀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다.
가멜다 왕국이 벌써부터 토벌군을 견제할 리는 없으니까.
“도적 놈들도 제법이군.”
“놈들과 마주하기도 전에 희생이 나오다니.”
별다른 함정도 없고, 공격자가 이미 떠났다면 안전한 진로가 될 수 있다.
이에 사울은 다른 기사들과 합의하에 토벌군의 진로를 그쪽으로 정했다.
잠시 후 나머지 정찰병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들이 가져온 정보는 좀 더 많았다.
“정찰병 두 명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추가로 수십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이동한 흔적도 발견했습니다.”
“그 인원이 이동한 방향은?”
“목적지인 하얀 까마귀 본부 쪽입니다.”
“우연이 아니라면 그쪽에서도 우리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역시 하얀 까마귀에서 토벌군의 움직임을 꿰고 있었다.
토벌군이 들이닥치는 것보다 정보가 더 빨랐으니 분명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보일 것이다.
점점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기사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놈들도 단단히 준비를 한 것 같은데.”
“영악한 놈들이니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사울은 이럴 때일수록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생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소수의 병력이 다수의 병력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게릴라로 다수의 병력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혼란에 빠지면 대군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혼란을 수습하기 어렵다.
‘내가 하얀 까마귀라면 그것을 노릴 거야.’
사울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전략의 정석이다.
소수의 병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다수의 발을 묶고 혼란에 빠트리는 것.
그것을 막으려면…….
사울은 결단을 내렸다.
“선생님, 아르멜.”
“네. 전하.”
“우리가 선봉 부대 쪽으로 갈까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과 아르멜에 앞서 다른 기사들이 놀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곳은 위험합니다!”
전투에서 이겨도 사울이 죽거나 다치면 기사들도 무사하기 어려우니 이들이 말리는 건 지극히 합당했다.
하지만 사울은 이미 생각을 굳힌 뒤였다.
“위험한 것은 잘 알아요. 하지만 내가 직접 전방에 가는 게 좋겠어요.”
“왜 위험을 감수하시려는 겁니까?”
“이미 하얀 까마귀는 토벌군을 상대하기 위해 수를 쓰기 시작했을 거예요. 그들의 흉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전방에 전력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전하께서 직접 전방에 가실 필요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나와 여기 선생님이 함께 전방에 가는 게 나의 안위도 지키고, 전방에 전력을 집중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일 테니까요.”
그제야 기사들은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사울의 스승이자 개인 경호원 노릇을 하고 있는 카스텔은 사울이 어디 있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울이 전방으로 간다면 어떤 적이 나타나도 검은 마녀가 직접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토벌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인 검은 마녀를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사들은 여전히 주저했다.
그럼에도 사울의 뜻은 변치 않았다.
“이 전투는 그만큼 내게 중요해요. 나는 각오했고, 움직일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자 마침 근처에 있던 아이나도 끼어들었다.
“전하,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아가씨까지?”
토벌군에서 사울 다음으로 고귀한 존재라 할 수 있는 아이나마저 전방으로 가겠다고 한다.
사울은 그런 아이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럼 함께 가지요.”
“네. 전하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사울과 아이나의 뜻이 굳건히 모인 상황에서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곧 사울과 아이나는 몇몇 측근과 함께 전방 부대로 이동했다.
전방 부대를 책임지던 기사가 놀란 표정으로 사울을 맞이했다.
“아니, 전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이끄는 정예들로 빨리 해결하려고 해.”
“…….”
기사는 무언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린 왕자님이 제정신이 아니군. 실력도 경험도 부족하면서 전방 부대에 오다니?’
사울은 눈앞의 기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다고 탓하거나 처벌할 생각은 없다.
자신의 전생, 그리고 지금 자신의 실력을 모르는 기사의 눈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테니까.
사울은 몸의 감각과 마나를 끌어올렸다.
필요하다면 직접 싸우기도 할 생각이었다.
아이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마나를 끌어올리는 게 느껴졌다.
얼마 후 주변을 응시하며 몸과 정신, 마나까지 집중시킨 사울은 무언가를 감지했다.
약간의 위화감이랄까.
자칫 지나칠 뻔 했지만, 한 번 감지하고 나니 신경이 쓰였다.
당장 자신이나 선봉 부대를 박살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마나를 가진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