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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47화 (47/232)

47화

사울의 침착한 명령에 주변 부대도 모두들 그에 따라 움직였다.

일부는 사울 주변을 둘러싸고, 나머지는 전장에 합세하여 적들을 베어 나갔다.

적들을 공격하는 기사들 중에는 아이나도 있었다.

사울은 아르멜과 카스텔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어 적을 상대하러 달려 나갔다.

도끼와 방패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적들을 베어 나가는 아이나의 실력은 나이에 비해 굉장히 뛰어났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 있던 사울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개인적인 활동이라면 모를까 전장에서 대장이 함부로 움직이는 건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다.

직접 검을 부딪치며 싸워 휘하 병력에게 부담을 주는 것 보다는 후방에서 지원하는 게 훨씬 낫다.

사울은 혹여나 아군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스럽게 마법을 시전했다.

신중하게 마법 검을 뻗을 때마다 얼음 창이 날아가 적에게 꽂혔다.

얼음 창에 꽂힌 적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즉사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상처를 입고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거나.

팔다리를 다치는 것처럼 가벼운 상처를 입으면 전혀 위축되지 않고 움직였다.

이에 사울은 하나의 공식을 깨달았다.

저들은 고통을 모른다.

멈추게 하려면 완전히 결박하거나 죽이는 방법 밖에 없다.

‘대체 저들은 뭐지?’

눈앞의 적들에게서 마법의 기운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런 약한 기운으로는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저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도 사울의 마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른 토벌군도 각각 자신의 몫을 다 해냈다.

오래잖아 미쳐 날뛰던 적들은 전멸했다.

아이나가 피 묻은 도끼를 허리에 찬 채로 돌아와 보고했다.

“전하. 끝났습니다.”

“수고했어요. 다치지는 않았나요?”

“네, 전하.”

“아군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전장을 둘러본 사울이 아르멜에게 명령했다.

“사상자들을 후송해.”

“알겠습니다. 전하.”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들이 많으면 그들을 챙겨 줄 겨를도 없다.

여유가 없을 때는 병력의 사기 감소를 각오하고 적은 물론 아군 시신도 전장에 내버리거나 태워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 여유 없지는 않다.

그래서 사상자 모두를 챙겨 줄 여유가 있었다.

곧 토벌군 모두가 바빠졌다.

일부 병력은 사상자들을 수습했고 나머지 병력은 아직 곳곳이 타오르고 있는 본거지 수색에 나섰다.

다행히 더 이상의 기습은 없었다.

하지만 본거지에서 건질 만한 것도 많지 않았다.

“그쪽은 어떤가?”

“타고 남은 잿더미뿐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기사 한 명이 사울에게 보고했다.

“전하. 놈들이 쓸 만한 건 다 가져가고 나머지는 불태운 모양입니다.”

보고를 들은 사울은 곁에 있던 카스텔과 아이나, 아르멜을 쳐다보고 말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적들이군요. 정신없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우릴 기습하고, 나아가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고 불태울 여력까지 있었다니.”

그러자 전투 이후 줄곧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나가 질문했다.

“전하. 혹시 그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우릴 공격한 적들 말인가요?”

“네. 저는 그런 존재는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미쳐 날뛰는 적들이라니… 언데드라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까. 미미한 마법의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사울의 시선을 받은 마법 전문가, 카스텔이 말했다.

“그들에게서 마법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강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신호를 보내는 역할이 아니었을까요.”

“마법 신호?”

“네.”

사울도 마법 지식이라면 상당한 편이라 카스텔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마법 신호를 보내서 조종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미미한 마법 신호로 사람을 저렇게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만들 수 있냐이다.

육체 개조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눈앞의 적들은 개조를 당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마법 신호만으로 저렇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납득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남았다.

“그럼 하얀 까마귀에서 마법 신호를 보내는 것만으로 사람을 저렇게 조종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런 모양입니다.”

“놈들은 대체…….”

살다 보면 도적이 없는 곳은 없고 그들끼리 조직을 이루는 것도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조직이 커지게 되면 군대와 싸우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도적들은 하얀 까마귀처럼 자신의 목숨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건 선을 넘는 짓이며,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으니까.

하얀 까마귀와 그 수장인 킬리안 비셔스.

역시 놈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다.

‘악의 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놈들이다.

사울은 일단 냉정을 되찾았다.

전장에서 냉정함은 생명과도 같다.

“일단 본부를 수색하고 적들의 흔적을 찾아.”

사울의 명령에 한 기사가 물었다.

“곧바로 뒤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사울을 변호하듯 아르멜이 말했다.

“좀 더 상황을 철저히 살펴보고 군대를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

“그게 좋겠어.”

토벌군은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후방에서도 연락이 왔다.

“전하. 후방에서도 적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숫자는?”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놈들은 소수의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도망치는 모양입니다.”

상대에 비해 병력이 월등히 많다면 포위망을 만들어 가둬 버리는 전략이 효과적이다.

상황에 따라 물샐틈없는 포위망을 만들어 일망타진하거나, 포위망 한쪽만 터주고 적들을 몰이사냥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 지역이 너무 넓어 토벌군만으로는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무작정 움직이기보다는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러는 사이 본거지 수색은 그럭저럭 마무리 되었다.

사실 수색이라 할 것도 별로 없었다.

거의 다 타 버리고 남은 잔해뿐이었으니까.

올라오는 보고들도 하나같이 뻔한 것들이었다.

“잿더미뿐입니다.”

“다른 적들도 찾지 못했습니다.”

“돌이나 흙으로 만든 건물들이라 화재가 번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창 타오르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 타고 잦아드는 불길이다.

불길 속 뜨거운 공기와 매캐한 연기도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걷혀갔다.

점점 뚜렷해지는 시야에 비치는 건 타고 남은 폐허뿐이었다.

폐허를 바라보던 사울이 말했다.

“역시 여기서 건질 건 없겠군. 적들의 흔적은?”

“찾고 있습니다.”

“킬리안도 이미 도망쳤겠지. 다른 /것/보다 킬리안이 향하는 곳을 찾아야 해.”

그 때 기사 한 명이 보고해왔다.

“전하, 적들의 진로를 찾았다고 합니다.”

“모든 병력이 함께 움직이지는 않았을 텐데.”

“네. 여러 갈래로 나뉘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적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면, 토벌군도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추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들이 원하는 게 그것 아니겠는가.

주변 지리에 익숙하지 못한 토벌군이 여러 갈래로 흩어진다면 전력이 분산된 끝에 하얀 까마귀의 사냥감이 되어 천천히 무너질 수 있다.

사울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아르멜이 사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함부로 병력을 나누는 건 위험합니다. 설령 병력을 나누더라도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내 생각도 같아.”

“부대는 나누지 말고, 소수의 실력자를 보내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소수의 실력자라면?”

아르멜은 대답 대신 눈짓을 했다.

그의 눈짓 끝에 닿은 건 카스텔이었다.

확실히 실전 경험 많고 실력이라면 말할 것도 없는 카스텔이라면 혼자서도 정찰 임무를 해낼 것이다.

하지만 카스텔을 보낸다면, 사울로서는 가장 믿을 수 있는 경호원을 잃는 셈이다.

잠시 생각하던 사울이 카스텔에게 말했다.

“선생님. 부탁해도 될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카스텔의 첫 번째 임무는 사울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다.

사울 곁을 떠난다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울은 결심을 굳힌 뒤였다.

“네. 내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요.”

카스텔은 토벌군의 가장 큰 전력이다.

그 전력을 방어적으로 사용하느냐, 공격적으로 활용하느냐가 토벌전의 성패를 가늠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선생님도요.”

카스텔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다른 기사들과 의논 끝에 몇몇 기병과 함께 앞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색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놈들이 싹싹 긁어 간 모양입니다.”

보고를 듣고 있던 사울은 곁에 있던 아이나에게 물었다.

“그대의 생각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 생각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 아이나가 그랬다면 꾸짖을 생각이었지만, 다행히 아이나가 의견을 말했다.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면 하루빨리 적들을 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전하의 안전도 중요하니 카스텔 씨가 이동한 길을 따라 이동하고, 후발대와 연계하면서 적들을 추격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야말로 정론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울의 생각도 비슷했다.

아르멜이나 다른 기사들 역시 이보다 좋은 의견은 없는 듯 했다.

“좋아요. 다른 의견이 없다면 그대의 뜻을 따르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아직 해가 중천이라 몇 시간은 행군할 수 있을 듯 했다.

“그럼 모두들…….”

진군 명령을 내리려는 사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신전에서 파견된 성기사였다.

공식적으로 신전에서는 이번 토벌전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얀 까마귀가 어둠과 관계 있다는 정보를 듣고 성기사 몇 명을 토벌군에 파견했다.

파견된 성기사들은 당장 토벌에 힘을 보태지는 않았지만 함께 다니며 어둠에 관련된 것들을 조사했다.

지금껏 조용히 토벌군을 따라다니기만 하던 성기사가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전하, 저희들은 이곳에서 어둠에 대한 것들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싸울 전력으로 데려 온 사람들이 아니니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해요.”

“네, 전하.”

이렇게 성기사들은 하얀 까마귀 본거지에 남아 조사하기로 했다.

사울을 비롯한 선발대는 조금 전 카스텔이 앞서 나간 길을 따라 진군했다

* * *

해가 질 때까지 진군을 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몇몇 적들과 카스텔이 움직인 흔적을 찾아낸 게 전부였다.

해가 지고 병사들이 진군을 멈춤과 동시에 카스텔과 함께 간 기병 두 명이 돌아왔다.

기사들이 기병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

“적군의 움직임을 찾아냈습니다. 숫자는 백 명이 넘는 것 같습니다.”

“상당한 숫자군. 그 정도면 쫓을 만하겠어.”

“그 정도 인원이면 킬리안 놈이 있을 수도 있을 테고.”

듣고 있던 사울도 기사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적 병력은 많이 잡아야 300명이 안 되고, 여러 갈래로 흩어져 도망친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백여 명의 무리라면 적의 주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울이 직접 기병에게 물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어느 쪽으로 향했지?”

“말씀드린 적들의 진로로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그런데… 놈들은 가멜다 왕국의 국경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병의 보고에 사울은 중립 지대가 어떤 곳인지 다시 떠올렸다.

중립 지대라는 표현처럼 다르센 왕국 영토도, 가멜다 왕국 영토도 아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군사 활동만을 이유로 트집을 잡기 어렵다.

그리고 이쪽에는 ‘하얀 까마귀 토벌’이라는 강력한 명분도 있다.

그런데 가멜다 왕국 국경 근방에서 군사 활동을 벌인다면?

합당한 명분이 있더라도 가멜다 왕국 국경 수비대가 긴장할 것이다.

하물며 그 토벌군을 이끄는 사람이 왕자라면?

자칫하면 휴전 조약이 깨질 수도 있다.

사울은 거기까지 일을 키울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젠가 가멜다 왕국과 부딪쳐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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