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런 아이나와 사울을 번갈아 보던 아르멜이 문득 말했다.
“아이나를 지나치게 배려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이나는 6년 전쟁에서 어머니를 잃었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하의 미래가 달린 전장에서 아이나를 배려할 여유가 있으시다는 게 부럽습니다.”
비꼬는 듯한 아르멜의 말투였지만, 사울은 책망하지 않았다.
말투와는 별개로 바른 말을 한 것이니까.
물론 바른 말이라고 꼭 따를 필요는 없다.
“승전으로 얻는 영광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 사람을 얻고 싶거든.”
“아이나를 전하의 충복으로 만들고 싶으신 겁니까?”
“충복이라기보다는 동료라고 부르는 게 더 좋겠는데.”
사울의 말에 아르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하가 능력 있고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는 건 잘 압니다.”
“그런데?”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이미 전하는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하고 계시니까요.”
“충고 고맙게 듣지. 하지만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네, 전하.”
“방금 전 충고는 네 뜻이야, 아니면 누님의 뜻이야?”
“…….”
아르멜은 순간 말을 잃었다 뒤늦게 대답했다.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누님의 뜻이라는 말이군.”
수도에 있는 누님이 이곳 사정을 꿰뚫어 보았다는 말인가.
전장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하고 아르멜을 통해 조언까지 했다고 생각하니 새삼 루시아 누님의 철두철미함에 감탄이 나왔다.
아르멜의 조언이 아닌 루시아의 조언이라면 훨씬 무게가 크다.
루시아 쪽에서 사울이 왕위 계승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루시아와 맞설 수도 없다.
지금의 사울로서는 경력이나 세력이 루시아와 정면 대결은 꿈도 꾸기 어려우니까.
그런 사울에게 아르멜이 말했다.
“왕녀님께서는 전하를 적대하거나 견제할 마음은 없으실 겁니다. 그저 걱정을 하고 계신 것이지요.”
“누님이? 날?”
“네. 전하.”
“그건 네 생각일 뿐이지?”
“저는 왕녀님의 생각을 꽤 잘 맞춘다고 자부합니다.”
“훗.”
사울은 루시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기 전에도, 후에도 특별히 가족으로서의 정을 많이 느끼지는 못했다.
‘얼음 왕녀’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냉정하고 무서운 누님이었으니까.
게다가 전생을 떠올린 뒤에는 자신의 앞가림에 바빠 가족의 정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님이 자신을 가족으로서 걱정한다?
전적으로 믿을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이라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레이처럼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진짜 가족과는 또 느낌이 다르니까.
‘가족이라…….’
“소중한 누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알았어. 좀 더 처신에 신경을 쓰지.”
“네, 전하.”
“하지만 아이나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전하의 뜻이 그러하다면 더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전 전하의 말씀대로 ‘어려운 협상’을 준비하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
끝까지 뼈 있는 말을 남긴 채 아르멜은 사울의 천막을 떠났다.
사울은 복잡한 마음을 명상으로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당분간은 계속 바빠질 테니까.
* * *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아이나는 영주군 기사 몇 명을 불렀다.
영주가 특별히 뽑아 보낸 기사들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의논을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나는 기사들에게 조금 전 사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노련한 기사들도 하나같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놀라운 일이군. 왕실의 일원이 영주님의 가문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동요하는 기사들에게 아이나가 말했다.
“그래요. 놀랄 일이지요.”
‘사실 많이 놀라지 않았어요. 왕자님은 제게 항상 친절하시니까.’
입 밖으로 내면 곤란한 말은 속으로 삼키며 아이나는 계속 말했다.
“나 혼자서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왕자님이 아가씨를 잘 봐주신다면 기회가 아닙니까.”
“틈을 봐 왕자님께 많은 것을 얻어 내도록 하십시오.”
아이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홉킨스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너무 속물 같지 않은가.
또 영민한 사울 왕자가 그 정도도 모를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가문을 먼저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나 역시 아직은 사울 곁에 있고 싶었다.
그러려면 가신들이나 가문의 뜻에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노력을 해 보아야지요. 그보다 전하께는 어떻게 말씀드릴까요?”
“설마 전하께서 가멜다 왕국과 전쟁을 벌이기야 하시겠습니까.”
“영주군도 끝까지 참여해야 왕실에게서 제대로 얻어 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영주군은 왕실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해 토벌전에 협조하고 있다.
만일 영주군이 직접 킬리안 비셔스의 목을 벤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놈의 목을 베는 곳에 함께한다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이다.
홉킨스 가문에서도 왕실에 많은 것을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알았어요. 전하께는 계속 협조하겠다고 말씀드리지요.”
“네, 아가씨.”
“그리고 아가씨도 조심하십시오. 얼마 전에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괜찮아요.”
아이나는 차고 있던 도끼를 쓰다듬었다.
강적을 상대로 이기진 못했지만 사울과 함께 싸웠고, 또 살아남았다.
그 결과 킬리안은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으니 진 것도 아니다.
처음 겪는 실전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강적을 상대로 싸워 지지 않고 살아남은 건 처음이다.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더 자신감이 생긴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전장에서 어떤 난관이 있어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 * *
사울은 ‘실무자’의 중요함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조직이든 실무자의 능력이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바른 지침을 내리고 결정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 지침을 세부적으로 조율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맡은 실무자의 능력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을 실무자가 상황에 맞게 처리함에 따라 일의 성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생 때 실무자의 역할을 많이 해 본 사울이라 더욱 실무자를 중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은 아르멜의 능력을 높이 샀다.
아르멜은 뛰어난 조언자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실무자 이기도 했다.
루시아의 충복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였다.
“전하. 가멜다 왕국과 접촉을 해 보았습니다.”
“그쪽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지?”
“아직은 우리의 진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한 일이지. 우리의 진의를 믿게 할 자신은 있나?”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유의미한 결과가 있을 겁니다.”
자신 있는 아르멜의 표정에 사울도 수긍했다.
그리고 아르멜이 말한 ‘조만간’은 예상보다도 더 짧았다.
“전하. 가멜다 왕국에서 서신을 보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아르멜과의 대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가멜다 왕국에서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서신은 잘 살펴보았나?”
“모든 조사를 마쳤습니다.”
편지 한 장이 흉기가 될 수도 있다.
편지에 마법을 걸어 뜯는 순간 폭발하거나 불꽃이 뿜어져 나와 수신인을 공격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다만 마법에 대해 알고 조심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마법을 걸면 특유의 마법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었다.
편지를 받아 든 사울은 장갑을 끼고 직접 편지를 살폈다.
마법의 기운은 물론 편지 어딘가에 독침 같은 게 붙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확인을 마친 사울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편지를 열었다.
왕자의 몸으로 적국이 보낸 편지를 받는 일이니 이 정도는 해야 했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서신과 함께 딸려 보낸 사람에게 ‘협상’에 대한 부분을 이야기 해 보라는 내용이었다.
중요한 건 편지를 보낸 사람이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
사울도 아는 이름이었다.
현생은 물론, 전생부터 알던 이름이다.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세드 메로빙거 ‘남작’이었는데, ‘자작’으로 작위가 한 단계 올랐다.
무언가 큰 공을 세웠거나 남의 공을 잘 빼앗은 덕이겠지.
사울이 아는 세드 남작, 아니 자작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꽤 유능한 현장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평이 나쁘지 않았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전생의 사울 역시 그를 ‘소문대로라면 유능한 인물’이라 평가했다.
현재의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국경을 너머 가멜다 왕국 쪽 영토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소라드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관 라켈 슬리드 남작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행정 책임자에 가까웠다.
군사적인 부분을 논하면 이 부근의 국경 지역을 총괄하는 것으로 알려진 세드 메로빙거 자작 쪽이 더 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작위도 더 높았으니까.
생각을 정리하며 편지를 다 읽은 사울은 아르멜에게 물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 국경 경비 책임자인가?”
“네, 전하.”
“꽤 유능한 인물이라고 본 것 같은데, 맞나?”
“평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평판을 다 믿을 수는 없지만, 그는 평판대로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유능한 인물이라면 날 이용하려 들 수도 있겠군.”
“물론입니다. 하지만 메로빙거 자작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전하를 섣불리 건드리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혹여나 그의 잘못으로 전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목이 열 개가 있어도 책임지기 어려울 테니까요.”
“진심이라는 말인가?”
“그럴 것입니다.”
가멜다 왕국에서 협상을 거부한다면 모를까, 협상을 받아들일 자세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협상이 결렬된다면 아쉬운 건 토벌전을 벌이고 있는 사울이니까.
“가멜다 왕국에서 보낸 사람을 직접 만나 보겠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울이 이렇게 말할 것을 예상한 듯 아르멜은 순식간에 가멜다 왕국 사신과 만날 자리를 만들었다.
사울은 전장에 가지고 나온 복장 중 가장 화려한 것을 입고 천막에 높이 앉았다.
다소 거만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왕자로서 적국 사신을 만나는 것이라 이 정도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아르멜과 아이나를 비롯한 측근들을 여럿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가멜다 왕국의 사신이 들어왔다.
스무 살 정도 된 듯한 반듯한 청년이었다.
지체 높은 귀족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외모나 행동거지를 볼 때 명망 있는 가문 소속이거나 교육을 잘 받은 사람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사울을 본 사신이 허리를 숙였다.
적국 왕자가 아닌 자국 왕자를 대하는 태도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각이 잡혀 있었다.
“가멜다 왕국의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 보냈나?”
“네, 전하.”
“그대가 가져 온 서신이 곧 자작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대 나라의 서신은 잘 보았다. 예의 바르지만, 무언가 특별히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더군.”
사신은 사울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아무것도 결정하기 어려우니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자작님의 뜻이십니다.”
“그건 동의한다. 중요한 사항은 직접 만나서 결정해야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토벌전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그대 나라와의 협상에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다.”
“그렇습니까? 그 부분은 우리와 입장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사신의 말에 사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울 곁에 있던 다른 기사들도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쪽은 급하지만, 자기들은 급할 것 없다는 말을 대놓고 한 셈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