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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55화 (55/232)

55화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눈앞의 적국 왕자에게 맞춰 줄 수밖에.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지?”

“양국은 현재 휴전 상태입니다. 아무리 이단 행위에 관련된 문제라도, 국왕 폐하의 허락 없이 국경 안으로 적국의 병력을 들일 수 없습니다.”

“잘 알고 있다. 나와 왕실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단 한 명의 병사도 허락 없이 그대 나라의 국경을 넘지 않도록 하겠다. 혹시 내 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을 베겠다.”

“그 약속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물론이다. 하지만 이단자가 그대 나라로 넘어가는 바람에 잡지 못하게 된다면 그에 따른 비난 역시 그대와 그대의 나라가 감수해야겠지.”

“…….”

“동의하는가?”

“알겠습니다.”

협상 성공이다.

사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의 협조에 감사를 표한다.”

협상에서 한 방 먹은 세드 자작이었지만 마무리는 깔끔했다.

“마찬가지입니다. 킬리안 토벌을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무사히 협상이 끝났다.

이 순간 사울이나 세드 자작은 물론, 참석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곧 두 사람은 간단히 문서를 교환했다.

같은 내용이 기록되고 서로의 서명이 교환된 공식 문서였다.

협상을 위한 모든 과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사울이 물었다.

“국경까지 호위 병력이 필요한가?”

“괜찮습니다. 이 주변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니.”

“알았다. 그럼.”

세드 자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데려온 병력과 함께 떠났다.

말을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세드 자작과 함께 온 그의 아들, 아론 메로빙거가 물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사울 왕자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다고 알려드렸어야 했는데.”

세드는 아들을 책망하는 대신 작게 웃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자기 신분만 믿는 녀석은 아니라고.”

“좀 더 제대로 사울 왕자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아야 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이야.”

“괜찮다. 나도 예상치 못했다.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왕자가 이 정도의 인물일 줄은.”

위로를 받은 아론은 조금 자신감을 찾았다.

“이대로 저들을 가만히 놔둬도 괜찮을까요?”

“놔두지 않으면 어떡하겠느냐. 섣불리 왕자를 건드리는 건 다르센 왕국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하지만… 왕자는 물론 ‘검은 흉성’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건 동감이다.”

다르센 왕국에서는 ‘검은 마녀’라 부른다지만 가멜다 왕국에서는 ‘검은 흉성’이라 부르는 자.

카스텔.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한 뒤 악명도 어느 정도 퇴색되었지만, 그녀가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드 자작 역시 그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사울 왕자가 그러하듯 검은 흉성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아버님, 그럼?”

“괴물은 괴물로 상대해야지.”

아론은 아버지가 말하는 ‘괴물’이 누구를 뜻하는 지 바로 알아들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영웅이라 부르지만, 아는 사람들은 ‘괴물’이라 지칭하는 자들.

카스텔을 쓰러뜨린 가멜다 왕국의 최강자.

가르시아 남매.

세드 자작은 그들을 개입시키려는 것이었다.

* * *

성공적으로 협상을 끝낸 사울은 본격적으로 군사를 움직였다.

확실히 세드 자작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가멜다 왕국의 국경 쪽 움직임을 살핀 결과 경계 태세가 좀 더 엄중해졌지만 토벌군을 방해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사울은 군사를 움직이며 다시 한 번 명령을 내렸다.

“이번 토벌전의 목표는 킬리안 비셔스이지 가멜다 왕국이 아니다. 아무리 적국이라 해도 지금은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 그리고 명령 없이 가멜다 왕국 국경에 발을 들이는 자,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목을 베겠다.”

다행히 아군의 목을 베라는 명령을 내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토벌군의 체계가 비교적 잘 갖춰진 덕분에 사울의 명령이 문제없이 전달되고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가멜다 왕국과의 문제를 해결한 사울은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국경을 넘지 않는 한 최대한 적극적으로 도적들을 토벌하는 게 좋겠지.”

사울의 말에 천막에 모인 기사들도 대체로 동의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전력도 우리가 우세하고, 가멜다 왕국에서 방해하지도 않으니 빨리 놈들을 토벌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 아이나도 의견을 냈다.

“카스텔 씨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시면 좋겠어요.”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마녀를 함부로 움직이는 건 군사 몇백 명이 함부로 움직이는 것보다도 가멜다 왕국을 더 많이 자극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카스텔을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지금 선생님은 어디 쯤 있지?”

사울의 질문에 아르멜이 대답했다.

“이틀 전 연락병 두 명과 함께 킬리안 비셔스를 쫓고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후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직 킬리안을 만나지는 못했겠지.”

“네, 전하.”

“선생님에게 국경을 넘지 않는 한 마음껏 행동해도 된다고 알려.”

“알겠습니다.”

이렇게 토벌군은 본격적으로 하얀 까마귀 사냥을 시작했다.

전력이 더 뛰어날 뿐만 아니라 가멜다 왕국과의 협상으로 거리낌 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어 토벌군은 차차 성과를 거두었다.

“적이다!”

“항복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베어라!”

중립 지대 곳곳에서 일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적게는 수 명, 많게는 수십 명의 하얀 까마귀 조직원들이 숨거나 도망치다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하얀 까마귀 모두가 킬리안 비셔스나 칼립소 같은 실력자는 아니었다.

대부분은 도적 치고는 정예라 할 수 있지만, 그래 봐야 한계가 있었다.

소규모로 체계 없이 움직이는 하얀 까마귀는 머릿수도 더 많고 체계적인 작전과 지휘 속에서 움직이는 토벌군과 싸워 이기기 힘들었다.

그렇게 중립 지대 곳곳에서 전투 혹은 사냥이 이어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 일주일 사이에 베거나 사로잡은 적의 숫자가 백 명을 넘어 이백 명에 가까웠다.

중립 지대에 흩어진 하얀 까마귀의 전체 병력이 300명 정도로 추산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전력의 3분의 2를 처치한 셈이었다.

“전하. 이 지역의 하얀 까마귀는 거의 모두 베었습니다.”

“그 중에 킬리안이나 칼립소는 있었어?”

“없었습니다.”

“그렇군. 알았어.”

기사의 보고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아쉬운 소식이다.

두목인 킬리안, 하다못해 조직 2,3인자인 제온과 칼립소라도 잡아야 할 것인데.

킬리안과 칼립소가 함께 움직이는 건 사울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사울은 지금까지도 둘이 함께 움직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쩌면 조직 2인자인 제온 역시 함께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

추격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족한 전력을 나누어 각개격파 당하느니 한 덩이로 뭉쳐 움직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또 한 가지 염려되는 가능성은 ‘최후의 발악’이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다시금 예전과 같은 위험한 공격을 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신변 안전에 더욱 신경 쓰기로 했다.

특별히 명령을 내려 주변 경계를 강화하고 만에 하나의 사태가 발생하도 빠르게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체계를 정비했다.

한 번 공격을 받아 본 사울이 내리는 명령이라 그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었다.

며칠 후.

사울의 귀에 하얀 까마귀의 남은 조직원들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사울이 일과를 마치고 슬슬 잠들 준비를 하려는 순간 들어온 보고였다.

“전하, 카스텔 씨가 긴급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선생님이?”

“네. 전하의 목숨을 노리고 파견된 자들과 마주쳐 대부분을 죽이거나 제압했답니다. 하지만 몇몇을 놓쳤으니 오늘은 특별히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자객이…….”

곧 사울은 놀라움에서 벗어나 물었다.

“그 자객 속에 킬리안이 있다던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만났지만 잡지 못했다면 그렇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킬리안이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일까.

사울을 직접 노리는 무모한 짓은 한 번으로 그친 것일까.

사울은 이 원정의 목표를 돌이켜 보았다.

하얀 까마귀를 박살내고, 킬리안을 잡거나 죽이는 것.

하얀 까마귀를 박살내었다는 목표는 이미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정예 병력을 거의 전멸시켰고 본거지까지 파괴했다.

물론 홉킨스 가문 영지나 다르센 왕국 곳곳에 놈들의 세력이 남아 있겠지만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조직은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렵다.

지금 철군한 뒤 다르센 왕국 내에서 철저히 소탕하면 최소한 다르센 왕국 안에서는 하얀 까마귀를 청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킬리안 비셔스가 살아 있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하얀 까마귀가 부활하는 건 시간문제다.

결국 킬리안을 잡지 못하면 이번 토벌은 의미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킬리안은 사울에게 개인적인 원한마저 있을 것이다.

미친놈인데다 능력 하나는 확실한 킬리안이 사울에게 원한을 가졌다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사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킬리안을 제거할 필요를 느꼈다.

“선생님에게 연락해. 이제 다른 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킬리안의 제거에만 신경 쓰라고.”

사울의 말에 기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카스텔 씨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킬리안 제거를 우선한다고?”

“네, 전하.”

“그렇군.”

카스텔 정도의 인물에게 굳이 독려를 할 필요는 없다.

현장에서 사람 잡는 일에는 그야말로 최고 전문가가 아닌가.

그보다 잘할 자신이 없다면 쓸데없는 독려보다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사울 본인이 직접 킬리안 사냥에 나서고 싶었다.

전장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직접 움직이는 것에 익숙하고 자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왕자의 몸으로 전장에 나선 것만으로도 위험한데 직접 킬리안을 쫓는다?

상식적으로 허락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사울은 꽤나 무리를 한 입장이니 말이다.

“기다릴 수밖에 없나.”

신앙심이 별로 없는 사울이었지만, 지금은 기도라도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킬리안을 없애거나, 사로잡아 끌고 갈 수 있도록.

* * *

며칠 후.

들어온 정보들을 종합해 본 사울은 한숨과 함께 인정했다.

“어려울 것 같군.”

지금까지 들어 온 보고 내용을 종합하면 일단 하얀 까마귀는 사실상 전멸했다.

300명에 달하는 병력 중 9할 이상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이 정도면 문자 그대로 ‘전멸’이라 해도 무방하다.

문제는 조직의 머리를 잡거나 쳐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하얀 까마귀의 두목인 킬리안 비셔스, 서열 2위린 제온과 3위인 칼립소.

셋 중 한 명도 붙잡거나 목을 베지 못했다.

카스텔도 다른 일을 제쳐 두고 쫓았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어제 카스텔이 보낸 소식에 따르면 킬리안이 움직이는 흔적은 잡았지만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킬리안의 흔적이 발견된 곳은 가멜다 왕국의 국경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지금까지 드러난 놈의 흔적을 종합해 볼 때, 킬리안의 행선지는 뻔했다.

가멜다 왕국 국경을 넘을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놈들이 국경을 넘는다고 우리까지 넘을 수는 없겠지.”

사울의 말에 맞은편에서 서류를 살피던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정말 아쉽지만… 킬리안이 국경을 넘었다면 가멜다 왕국에서 놈을 잡아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가멜다 왕국에서 킬리안을 잡을 수 있을까?”

“가멜다 왕국 윗선에서는 놈을 잡으려 할 겁니다. 그의 행동은 뇌물 따위로 덮어질 것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의 뇌물을 직접 받거나 연줄이 닿은 관리나 기사라면 그를 보호하거나 협조하려 할 겁니다. 쉽게 잡히지는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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