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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58화 (58/232)

58화

토벌전을 마친 사울은 화려한 개선식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분명 승리한 전쟁이고, 성과도 있었지만 킬리안을 놓쳤기에 개선식을 하기에는 다소 쑥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또 가난한 변방 영지 사람들은 위아래를 막론하고 화려한 개선식보다는 실용적인 것을 선호했다.

회군을 결정한 사울은 병사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연설했다.

“모두들, 잘 싸워 주었다. 아쉬움도 남지만 그래도 우린 이겼다. 그대들이 나와의 약속을 지켜 열심히 싸웠듯 나 역시 약속을 지키겠다. 급여를 두 배로 올릴 것은 물론, 공적에 따라서 추가 급여 역시 아낌없이 지급하겠다!”

“우와아아!”

영주군과 왕국군이 합심하여 사울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연설을 끝낸 사울은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갔고, 아르멜이 뒤따랐다.

“전하. 정말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키실 겁니까?”

“그래야지.”

“전하께 다소 출혈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르멜의 말 대로였다.

비록 승리한 토벌전이지만 적들에게 거둔 재물은 거의 없었다.

영악한 킬리안 비셔스가 ‘빼앗기느니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전략’을 썼기 때문이다.

지금 사울이 여기저기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을 다 합쳐도 ‘급여 두 배와 기타 추가 급여’를 충족하기에는 부족했다.

“알아. 이미 연락을 해 두었어. 내 재산을 좀 가져오라고.”

명색이 왕자라 사울 개인의 재산도 어느 정도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남긴 약간의 유산.

그리고 사울 개인의 명의로 된 농장과 광산이 하나씩 있었다.

사치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온 사울이라 자연스럽게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따라서 가지고 있는 재산만으로도 약속을 지키기에는 충분했다.

“수도에 돌아가 보실 겁니까?”

“그래. 한 번은 얼굴을 비칠 때가 되었지. 실베스터 형님의 생일도 며칠 남지 않았고.”

1왕자 실베스터 다리우스.

사망한 전 왕비의 아들로서 막강한 외가 세력들의 비호와, 장남으로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여겨지는 왕자.

그만큼 실베스터의 생일은 언제나 화려하게 치러졌다.

실베스터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2왕자 카리스는 물론, 카리스의 모친이자 현 왕비인 제비아마저도 실베스터의 생일 파티는 꼭 참석할 정도였다.

사울은 형님들이나 누님과 깊이 교제하지는 않았지만 생일 파티에는 가능한 얼굴을 내밀었다.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참하여 미움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사울에게 아르멜이 다시 물었다.

“수도로 갔다 다시 홉킨스 가문 영지로 돌아오실 생각입니까?”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 네 생각은 어때?”

“전하께서 이곳에서 할 일은 거의 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르멜의 말이 맞았다.

견문을 넓히고 경험을 쌓으러 온 것인데, 예상치 못한 하얀 까마귀와의 대립으로 그 목표는 충분히 이루고도 남았다.

킬리안의 목을 베지 못한 건 마음에 걸리지만 언제까지 홉킨스 가문에 머무르며 킬리안을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확실히 홉킨스 영지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어. 영주도 슬슬 날 보내고 싶어 하는 눈치고, 또 나는 더 강해질 필요가 있으니 이런 곳에서 안주할 시간은 없어.’

생각을 정리한 사울은 아르멜에게 물었다.

“내가 떠난다면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걸 결정하는 건 제가 아닙니다.”

“누님이 결정할 일이란 건가.”

“네, 전하.”

“너처럼 똑똑한 사람이 좀 더 내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데.”

“그것은 왕녀님이 결정하시겠지요. 그보다 아이나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이나에 대해 질문을 들은 사울이 거침없이 말했다.

“왕국 수도에서 사교계 데뷔를 시켜 줄 생각이야.”

“…….”

“왜.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드리고 싶은 말은 있지만 소용이 없을 겁니다… 저는 말리고 싶지만 전하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지요. 또 전하는 아이나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인재로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니 저로서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사울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해 둬.”

“네, 전하.”

아르멜을 내보낸 사울은 아이나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너무 이쪽에서 안달하는 것처럼 보일 필요는 없다.

이미 은근히 이야기를 한 적도 있지 않은가.

아이나도 지금쯤이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나는 수도에 가고 싶어 할 테지만… 문제는 영주와 소영주로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 * *

토벌군은 무사히 홉킨스 가문 영지로 귀환했다.

사상자가 백여 명이 발생하였기에 피해가 적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거둔 전과에 비교하면 적은 피해였다.

사울은 약속대로 병사들에게 두 배의 급여를 지불하고 사상자들에게 위로금도 지불하였다.

그리곤 영주가 주최한 승전 파티에 참석했다.

영주가 직접 주최한 승전 파티라지만 왕국 수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파티에 비하면 매우 초라했다.

수도에서는 흔한 무도회 하나 없이 그저 잘 차려 먹는 조촐한 파티였다.

수도의 화려한 파티에 익숙한 사울에 눈에는 수수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했지만 사울은 싫은 기색 없이 참여했다.

원래 파티는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영주 던칸, 소영주 칼랜드, 왕국군과 영주군 기사들.

모두들 사울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사울은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이 승전은 모두 다 그대들 덕분입니다.”

겸손하게 말한 덕분에 파티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울은 파티가 끝날 때 즈음에야 본론을 꺼냈다.

“영주.”

“네, 전하.”

“나는 모레쯤에 수도로 돌아가려고 해요.”

“네? 좀 더 쉬시지 않고.”

“실베스터 형님의 생일이 멀지 않았으니까요.”

“1왕자님의 탄신일 말씀이십니까.”

“네.”

던칸도 명색이 귀족이라 1왕자의 생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았다.

그렇잖아도 사울 왕자를 영지에서 내보내려던 참이었기에 1왕자에게 ‘이 시기에 태어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라도 하고픈 심정이었다.

물론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했다.

“안타깝군요. 전하를 좀 더 모시고 싶었는데.”

사울 눈에도 던칸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그를 탓할 마음은 없었기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그래서 영주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전하.”

“아이나 말이에요.”

“제 딸이 전하께 실수라도?”

“아니요. 그 반대예요. 아이나는 이번 토벌전에서도 날 많이 도와주었어요. 어떤 의미로는 내 생명의 은인이지요. 그래서 그 은혜를 갚았으면 해요.”

사울의 표정에게서 무언가를 읽은 던칸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던칸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전하. 설마… 제 딸을 수도로 데리고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영주가 허락한다면요.”

영주의 딸이 왕자와 함께 수도로 간다.

홉킨스 가문과 왕실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생각하면 쉽게 나오기 힘든 소리다.

잠시 사울을 바라보던 던칸이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제 딸의 의사는 물을 필요도 없겠군요.”

“네. 아이나도 수도로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전하. 그렇게 제 딸이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 마음에 들어요. 뛰어난 인재니까.”

“…….”

“이런 곳에 머무를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요. 아이나 역시 홉킨스 가문의 일원이고 홉킨스 가문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지요. 하지만 그 책임을 보다 잘 짊어지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기회를 누렸으면 해요.”

“제 딸이 제 영지에서는 그 기회를 누리기 어렵다는 말씀이십니까?”

“아이나가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는 거예요. 그대의 영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왕자라도 영주의 딸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영주의 딸을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면 영주를 설득시키는 게 필요했다.

강압이 아닌 설득.

하지만 왕자의 설득은 영주에게 적잖은 부담이 돠었다.

어린 왕자의 예의 바른 부탁이라 해도 말이다.

‘내 딸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그렇다면 결혼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사울 왕자가 용의주도한 인물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이미 아이나는 왕자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남은 것은 던칸 본인이 결정하는 일뿐이다.

고민하던 던칸은 대답을 미루기로 했다.

“제 딸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영주.”

“감사합니다. 전하.”

* * *

던칸은 아이나를 부르기에 앞서 칼랜드를 불러 왕자와 했던 대화를 알려 주었다.

칼랜드는 던칸의 말에 놀라는 대신 작게 한숨부터 쉬었다.

“사울 왕자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다. 너는 짐작하고 있었느냐?”

“그럴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 왕자도 아이나를 마음에 들어 하고, 아이나도 사울 왕자를 좋아하니 왕자라 수도로 간다면 아이나도 데리고 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아이나가 사울 왕자를 좋아한다고 했느냐?”

“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인 칼랜드는 던칸의 말뜻에 담긴 진의를 알아채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아직 아이나는 뭐랄까, 남편감을 찾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요.”

“사울 왕자도 그렇게 생각할까?”

“사울 왕자라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영악한 자가 왕국의 수많은 귀족 영애들을 놔두고 아이나를 정실로 삼을까요? 측실 같은 건 아이나 쪽에서 거절할 테고요.”

던칸은 이 화제만큼은 칼랜드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겼다.

왕국 법상 왕이든 왕자든 본부인은 오직 한 명만 둘 수 있다.

그 외에는 본부인보다 격이 낮은 후궁이나 측실만 둘 수 있다.

국왕의 측실인 후궁이라면 충분히 탐낼 만한 자리다.

하지만 능력과는 별개로 왕위 계승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왕자의 본부인도 아닌 측실이라면?

딸의 의사에 앞서 가문의 자존심상 허락하기 어려웠다.

귀족이라도 권력이나 재산이 없다면 측실 자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홉킨스 가문은 그 정도로 곤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나 본인이 그런 자리를 받아들일 리 없다.

아이나라면 가문이 몰락해도 귀족 측실이 아니라 용병 대장이 되어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 할 테니까

던칸은 사울과 아이나 사이에서 ‘그런 쪽의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불장난이 벌어진다 해도 적당히 입을 맞추면 그만이니까.

던칸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아이나는 아직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르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혹시나 사울 왕자가 무언가 눈치를 챈 게 아닐까? 아니면 아르멜이라는 기사가 무언가 눈치를 챘거나.”

“아르멜 말씀입니까. 다른 건 몰라도 우리에 대해 무언가 눈치를 채거나 그 때문에 아이나를 수도로 데려가려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사를 해 보았느냐?”

“네. 아르멜과 아이나는 여전히 사이가 안 좋은 모양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르멜은 아이나를 수도로 데려가는 걸 말리면 말렸지, 권하는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한참 생각하던 던칸이 결론을 내렸다.

“아이나를 왕실로 인질 삼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던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칼랜드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이나가 수도로 가서 사울 왕자와 함께 다닌다면 왕실 입장에서는 우리 가문의 약점을 잡은 셈이 아니냐. 그럼 조금은 우리 가문에 대한 경계를 늦추겠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이왕 이렇게 된 일이다. 또 아이나 역시 사울 왕자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그렇다면 좀 더 두고 봐도 되지 않겠느냐. 나중에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 일이니.”

결국 칼랜드도 아버지의 뜻에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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