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물론 중립 지대 어디도 왕국 수도만큼 안전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엘프나 드워프 등 이종족들은 극소수의 인간 외에는 모두 경계했다.
오래전 인간들이 이종족을 노예로 부렸고, 그로 인하여 종족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종족 전쟁이 끝나고 이종족들이 독립을 쟁취한 지 200년이 넘게 흐른 지금에도 인간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이종족과 교류해 본 적이 있나요?”
“적대적이지 않은 이종족과 몇 번 만난 적은 있습니다.”
“그들과 친하게 지낸 경험은 없는 거죠?”
“네, 전하.”
“아르멜, 너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도 이종족과 깊은 교류를 나눈 적은 없다.
이 자리에 모인 자들 중 그런 경험이 있는 건 홉킨스 가문의 일원인 아이나뿐이다.
“아이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구체적으로 그 지역의 이종족들이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나아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 지는 가 봐야 알 수 있겠지요. 출발일은 이틀 뒤이니 그때가지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요.”
이야기를 마친 사울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레이.”
“…….”
그레이는 사울을 타박하거나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았다.
의미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울의 새로운 임무는 이미 결정되었고, 국왕 폐하의 재가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일개 시종장에 불과한 그레이가 사울을 만류한들 아무런 변화 없을 것이다.
그레이는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셨는데 제가 뭐라 하겠습니까. 따라가 모실 수밖에요.”
“나는 괜찮아. 상아궁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니…….”
“아니, 따라가겠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 때문인지 그레이는 연로한 나이에도 사울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쩌면 자신이 따라감으로서 사울이 무모한 일을 더 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일까?
사울도 그레이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사울,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그리고 그레이와 소수의 병력이 중립 지대의 대신전으로 향했다.
* * *
세 번째 대신전은 갈레트 지방의 이웃인 모고리아 지방 중심부에 있었다.
갈레트 지방과 차이라면 갈레트 지방 대부분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모고리아 지방 대부분은 이종족이나 그들과 교류하는 인간들의 대신전의 영역이라는 점이었다.
“여기서부터 중립 지대입니다!”
마차 밖에서 누군가 큰소리로 외쳤다.
외침 소리를 들은 사울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고리아 지방은 꽤나 척박한 곳이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보이는 건 황무지뿐이었다.
가끔 보이는 풀 더미나 나무도 하나같이 작고 비틀어져 있었다.
이 주변만 보면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법한 땅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어느 정도 비옥한 곳도 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도록.”
“네, 전하.”
모고리아 지방의 치안은 나쁘지 않았다.
책에 따르면 이종족들과 대신전을 관리하는 빛의 교단이 함께 모고리아 지방을 관리한다고 했다.
양쪽 모두 모고리아 지방을 안정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중립 지대 치고는 치안이 안정적인 곳이었다.
그렇지만 왕국 영토가 아닌 이상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하얀 까마귀나 가멜다 왕국에서 불순한 짓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대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별일은 없었다.
“저기 대신전이 보입니다!”
외침 소리에 사울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대신전이 보였다.
* * *
대신전이 위치한 모고리아 중심부는 외곽과 다르게 번화한 곳이었다.
웅장한 대신전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만 보면 중립 지대라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창밖을 내다본 사울이 말했다.
“인간보다 이종족이 더 많군.”
중립 지대는 이종족의 땅이라는 것일까.
왕국 수도에서는 눈 씻고 찾아도 찾기 어려운 이종족들이 이 마을에서는 주류 세력을 이루었다.
비교적 이종족이 많이 거주하는 홉킨스 가문 영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저건 뭐야?”
“다르센 왕국의 마차인데.”
“흥. 가멜다 왕국 놈들이나 다르센 왕국 놈들이나.”
사울이 탄 마차를 바라보는 이종족들의 눈길은 썩 곱지 않았다.
적대하지는 않아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사울이 탄 마차가 대신전 앞에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사울을 맞이한 건 신관 한 명과 교단군 몇 명이었다.
일국의 왕자를 맞이하는 것 치고는 초라한 규모였지만, 일부러 무례를 범하는 건 아니었다.
이 지역의, 나아가 이 신전의 규칙인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사울을 맞이한 신관의 인사에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소. 그대는?”
“신관 마르셀입니다.”
마르셀은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교단군은 이종족이었다.
인간 기준으로 아름다운 외모에 길고 뾰족한 귀를 가진 엘프.
작고 단단한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드워프.
큰 체구에 멧돼지와 인간을 반씩 닮은 녹색 피부의 오크.
하나같이 왕국 안에서는 보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사울은 못 본 척 신관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이종족들도 특별히 사울에게 불만을 품은 기색은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대신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지요.”
마르셀의 안내를 받으며 사울은 대신전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대신전 내부는 생각보다 검소했다.
규모로 따지면 어지간한 명문 귀족가의 저택을 능가할 만큼 컸지만, 신상을 제외하면 특별히 화려한 장식품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중립 지대의 특성 때문인지 요새처럼 설계되어 있었다.
성벽처럼 높은 건물 벽 곳곳에 난 구멍은 활이나 마법을 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훌륭한 건물이군요.”
사울의 칭찬에 신관 마르셀이 대답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예전에는 종종 몬스터 부대가 침범해 오거나 했습니다. 그래서 신전을 요새로 써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요.”
“고생이 많았겠군요.”
“다 신의 뜻이지요.”
요새 같은 거대한 신전 안팎을 오가는 자들은 절반 이상이 이종족이었다.
그리고 신전 안에는 ‘이종족 신관’도 적지 않았다.
이종족이 요직을 차지한다니.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렇게 몇 개의 문을 지나친 끝에 사울 일행은 신전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대신전의 중심이 되는 건물은 유독 크고 튼튼하게 지어졌지만, 역시나 화려하지는 않았다.
화려함으로 따지면 아이나의 집인 홉킨스 가문 저택만도 못할 정도였다.
‘대신전 치고는 정말 검소하군. 하긴 사치를 부릴 환경도 아니겠지만.’
새삼 사울은 왕국 수도에 위치한 대신전의 화려함을 떠올렸다.
물론 화려하다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지나치게 화려한 신전보다는 이런 검소한 곳이 오히려 신의 뜻에 더 부합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화려하지 않은 건 대신관의 방도 마찬가지였다.
크기는 제법 크지만 전혀 화려하지 않은 나무 문이 열리고, 마침내 대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신관 콜리타.
사울을 본 그가 먼저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전하. 콜리타입니다.”
대신전의 총책임자인 대신관 콜리타의 첫 인상은 상당히 좋았다.
그야말로 자애로우면서도 올바른 신관이라는 느낌이랄까.
또 나이가 굉장히 많아 보였다.
새하얀 백발과 수염,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은 이 신관이 진즉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고령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울은 콜리타가 그러했듯 예의를 갖추었다.
“반갑습니다. 대신관.”
율렌 섬에 셋밖에 없는 대신전의 우두머리인 대신관이라면 왕자와 비교해도 신분이 크게 낮다고 할 수는 없다.
저쪽에서 먼저 고개를 숙였으니 이쪽에서도 숙여주는 게 예의다.
물론 사울을 뒤따르던 아이나와 아르멜도 고개를 숙였고, 심지어 카스텔도 일단 고개/를/ 숙였다.
“앉으시지요, 전하.”
“감사합니다. 대신관.”
사울과 콜리타가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주변에 기립했다.
사울 뒤에는 카스텔과 아이나, 아르멜이 기립해 있었고 콜리타 주변에는 몇몇 신관과 교단군이 기립해 있었다.
사울은 콜리타 주변에 선 교단군의 복장에 주목했다.
눈처럼 하얀 갑옷은 율렌 섬에서 오직 교단군만 입는다.
게다가 갑옷에 새겨진 문양은 교단군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자들임을 뜻했다.
어느 왕국에 소속된 게 아니라 빛의 교단에 소속된 기사.
성기사.
더구나 대신관의 호위 기사라면 성기사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자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성기사들은 신관이 아닌 군인에 가까운 자들이라 하나같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또한 신관들처럼 성기사들의 종족도 다양했다.
네 명의 성기사 중 세 명이 이종족이었다.
엘프, 드워프, 오크.
거기에다 인간까지 여러 종족이 섞여 사울과 마주한 건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이종족들과 공존하는 곳임을 알리는 건가.’
아직 이종족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인간은 많다.
200년 전에는 이종족을 노예로 부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울은 특별히 이종족에 편견을 가지지 않았다.
이종족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지도 모르나 본인은 차별이나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면 종족은 무관하다.
적이라면 싸워야 할 것이고, 적이 아니라면 아군으로 만들거나 적이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상대가 이종족이라도 말이다.
“역시 이곳은 레디아와는 많이 다르군요.”
사울의 말에 콜리타가 되물었다.
“어떤 점이 왕국 수도와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인간이 아닌 주민들이 많다는 것.”
사울의 말에 콜리타가 웃었다.
“전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율렌 섬에는, 나아가 이 세상에는 인간 외의 종족도 살고 있는데 오직 인간만이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맞아요. 지금 당신과 다른 자들을 보면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어요. 어떤 종족이든 친해질 수 있다면 친구가 되어야겠지요.”
그러면서 사울은 뒤에 서 있던 아이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여기 아이나 홉킨스 양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물론입니다.”
아이나 홉킨스.
홉킨스 가문에 대해서는 대신관은 물론 다른 신관이나 성기사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르센 왕국에서 이종족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가문이니 말이다.
아이나의 존재를 안 이종족들의 분위기가 좀 더 부드러워졌다.
사울에게는 예의를 갖추면서도 경계하는 반면 아이나에게는 좀 더 호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에 사울은 원한다면 아이나에게 좀 더 발언권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나는 더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에 사울이 다시 말했다.
“이종족을 좋지 않게 보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나는 이종족들에게 나쁜 감정이나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대신관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분위기가 좀 누그러들자 사울이 본론을 꺼냈다.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이 있을까요? 이종족에 관련된 문제가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네. 전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듣기로 전하께서는 하얀 까마귀와 싸운 적이 있으시다고…….”
“맞아요. 킬리안 비셔스와 직접 싸워 보기도 했지요.”
킬리안 비셔스의 이름을 들은 성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런 성기사들의 반응에 콜리타가 말했다.
“이 늙은이는 그자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악마 토끼풀을 파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도적이자 이단자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만 압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알고 계신 겁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빛의 교단에서는 도적이나 범죄자를 직접적으로 심판하기 어렵습니다. 이 주변의 치안 문제는 신전에서 처리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그럴 만한 권한도 없고요. 하지만 이단자라면 다르지요. 이단자를 처리하는 건 교단의 임무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아바마마께서도 이단자 문제만큼은 교단과 협조 하에 처리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그러시군요.”
사울이 다시 물었다.
“내가 할 일도 역시 킬리안 비셔스와 관련이 있습니까?”
“그 부분을 조사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