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조사라고 하시면?”
“이 지역에서도 악마 토끼풀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종족 부족은 물론 신전에서도 악마 토끼풀을 피우다 적발된 자가 있을 정도이지요.”
“악마 토끼풀을 직접 재배해 피운 게 아니라면 그걸 팔거나 준 자가 있을 텐데요.”
“말씀대로입니다. 하지만 피운 자는 찾았어도, 팔거나 준 자는 찾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눈앞의 콜리타는 악마 토끼풀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이단자 문제는 전문가지만, 악마 토끼풀이나 킬리안 비셔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할까.
사울은 지난 번 자신이 치른 ‘킬리안 토벌전’, 그리고 악마 토끼풀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콜리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그렇게 심각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신관. 킬리안 비셔스는 보통 도적이 아니라 아주 악질적인 도적입니다. 지금 그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살아 있을 것이고, 그 스스로 이단자이거나 이단자와 손을 잡은 것도 거의 확실합니다. 이 지역에 그가 손을 뻗쳤다면 보통 일이 아닌 겁니다.”
“과연… 알겠습니다. 역시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콜리타에게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문득 콜리타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기침을 시작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하며 심하게 기침을 하는 게 딱 봐도 건강이 나빠 보였다.
성기사들이 그런 콜리타를 부축하는 가운데 한 신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대신관님께서 더 이상 말씀을 하시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콜리타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기에 사울도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사울 일행은 한 신관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향했다.
사울의 숙소는 이 신전에서 가장 호화로운 손님방으로 배정되었다.
하지만 워낙 검소한 신전이라 ‘호화로운 손님방’도 그렇게 크고 화려하지 않았다.
홉킨스 가문 저택에서 사울이 머무르던 방보다도 못했다.
“이거야 원.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전하께서 머무르실 방이 너무 초라합니다.”
사울이 대신관과 만나는 사이 먼저 사울 방을 정리하던 그레이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사울은 방이 초라하다고 싫은 소리를 할 마음은 없었다.
화려한 방이 있는데도 초라한 방을 준 것이라면 모를까, 애초에 건물 자체가 검소하게 지어진 것을 어찌하겠는가.
“괜찮아. 그보다 모두들 앉아요.”
사울은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를 자리에 앉히고 물었다.
“콜리타라는 대신관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먼저 대답한 건 카스텔이었다.
“오래 못 살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요?”
“나이도 많고 지병도 깊어 보였습니다. 머잖아 숨을 거두거나 은퇴를 할 것 같았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울 역시 카스텔과 똑같이 보았다.
또 콜리타의 건강 문제는 이 대신전의 미래와도 연관이 깊을 테니 쓸데없는 말을 한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직설적인 것만 빼면.
“선생님. 이 방 밖에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전투 빼고 모든 게 서툰 카스텔에게 지적하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다.
카스텔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긴 했지만, 새겨들을 만한 사실이기도 했다.
사울이 봐도 콜리타가 오랫동안 대신관 노릇을 하지는 못할 것 같았으니까.
“아바마마나 누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네, 전하. 전에도 보고가 들어간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직접 대신관의 상태를 보니 두 분께 드린 보고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머잖아 대신관이 바뀔지 모른다는 보고를 하는 게 좋겠어. 물론 신전에서는 입조심을 하고.”
아이나도 입을 열었다.
“이종족 분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복잡했어요.”
사울도 동의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절 보는 태도와 다른 분들을 보는 태도가 달랐습니다.”
“그대 쪽에 좀 더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네, 전하.”
아이나가 스스로를 높이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명백한 사실이었다.
변방 지역에서 이종족과 원만한 관계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홉킨스 가문의 명성이 이 중립지대에까지 닿은 것이리라.
확실히 아이나를 데려온 게 도움이 될 듯했다.
“앞으로도 그대의 힘을 빌릴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이종족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가능한 참석하도록 해요.”
“네, 전하.”
“일단 이 신전은 평화로워 보이고, 우릴 경계하긴 하지만 적대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지요.”
듣고 있던 아르멜이 다른 소리를 꺼냈다.
“문제는 이 지역에도 하얀 까마귀의 마수가 뻗친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건 확실히 큰 문제지.”
율렌 섬에서 악마 토끼풀 사업은 사실상 하얀 까마귀가 독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대신전이 위치한 중립 지대에 악마 토끼풀이 나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얀 까마귀의 존재를 의심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이상의 정황과 증거도 존재했다.
사울은 출발 전 왕국 정보부에 대신전이 있는 중립 지대에 대한 정보를 요청했다.
그러자 왕국 정보부에서는 루시아가 손을 썼는지 미리 준비한 듯 빠르게 양질의 정보를 건네주었다.
정보에는 이 지역에 하얀 까마귀가 활동한다는 정황이 거의 확실하다고 적혀 있었다.
“지금 킬리안은 공식적으로 ‘실종’ 상태지?”
사울의 질문에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왕국 정보부에서는 그가 가멜다 왕국으로 갔으며, 아직 살아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놈의 시체를 확인하기 전에는 죽었다고 볼 수 없지.”
킬리안 비셔스의 악명은 결코 헛된 게 아니다.
누군가 도왔다기보다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쌓아 올린 악명이다.
그 능력을 좋은 쪽으로 발휘했다면 좋은 의미에서 거물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지금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악마 토끼풀을 이용해 수많은 자들의 몸과 영혼까지 갉아먹은 대악당의 말로는 죽음뿐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모두에게 말했다.
“일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지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에요. 그를 위해서는 여러 일들을 해야 할 거예요. 때론 생각보다 더 귀찮은 일을 해야 할 수도 있고, 노력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도 있어요. 상대는 이종족이니까. 무엇보다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임을 모두들 잊지 말아요.”
사울의 말에 모두들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네, 전하.”
* * *
여행에 익숙한 사울 일행은 대신전 도착 다음날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사울은 대신관 콜리타와 친분을 쌓기로 했다.
카스텔의 말처럼 콜리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엄연히 대신전의 수장이며 중립 지대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이종족과 관계를 개선하는 게 사울의 주 임무인 이상 결코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사울은 콜리타를 몇 번이나 찾았다.
실제로는 종교에 큰 관심이 없음에도 신실한 신앙인이 된 것처럼 몇 번이나 가르침을 청했다.
“오늘도 가르침을 청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콜리타와 만나면 주로 빛의 교단에서 가르치는 각종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명색이 대신관이라 누구나 다 아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보다 어려운 신학 이야기도 자주 나왔다.
다행히 사울은 일종의 교양 차원에서 신학에 대해 배운 바 있었다.
큰 관심이 없이 교양 차원에서 배운 것이라 ‘얕고 넓은 지식’ 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내가 왕궁에서 배운 건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군요. 이처럼 제대로 배우니 빛의 교단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울의 말에 콜리타는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고, 신앙에도 끝이 없는 법.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배움과 신에 대한 경외를 잊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솔직히 사울로서는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지루한 티를 내지 않고 열심히 배우다 보면 서서히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할 것이라 믿었다.
실제로 콜리타와 꾸준히 만나다 보니 어느덧 다른 신관이나 성기사들이 자신을 우호적으로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왕국에서는 왕국 법을, 교단에서는 교단 법을 따르라는 거지.’
이 정도면 첫인상은 합격이다.
모법적인 신앙인 행세로 신전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한 사울은 이제 이종족들을 공략해 보기로 했다.
대놓고 ‘난 이종족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외치는 건 역효과를 부를 수도 있다.
지나친 건 모자람만 못하니까.
이에 사울은 최대한 이종족을 인간과 똑같이 보고 대하려 노력했다.
혼자서는 쉽지 않았지만, 이종족을 대한 경험이 많은 아이나가 많이 도와줬다.
“엘프를 대할 때는 결코 그들의 귀에 시선을 두지 마십시오.”
“그게 엘프에게 큰 무례인가요?”
“그렇습니다.”
“과연.”
“드워프와 만날 때 그들의 수염을 비하하는 건 목숨을 걸고 싸우자는 뜻과 같습니다.”
“조심해야겠군요.”
“오크 상대로는 가능한 눈을 마주치십시오. 오크들은 상대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다른 마음을 품었다 의심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종족을 대하는 예절 같은 것은 책에도 어느 정도 나와 있었다.
거기에 이종족을 대한 경험이 있는 아이나의 조언이 더해지니 사울도 이종족을 상대하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
책과 아이나의 조언을 바탕으로 이종족들과 교류를 해 나간 결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와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다.
몇몇 신관과 성기사들이 사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알아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그들은 가멜다 왕국 출신이랍니다.”
“신관과 성기사 모두?”
“네, 전하.”
마침 방 안에서 가구를 정리하던 그레이는 아르멜의 말에 발끈했다.
“아니, 적국 출신의 신관이나 성기사를 전하 눈에 띄게 했다는 말이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신전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가멜다 왕국 출신이니.”
예전 같았으면 이런 말에 그레이는 더욱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을 따라다니며 많은 일들을 보고 들은 탓에 그 역시 어느 정도는 달관한 상태였다.
불쾌한 표정으로 혀를 찰 뿐, 더 화를 내지는 않았다
“가멜다 왕국 출신의 신관이나 성기사는 모두 인간들이지?”
“네, 전하.”
중립 지대에서 신관이나 성기사 노릇을 하려면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따라서 이곳에 머무는 신관이나 성기사는 공식적으로는 다르센 왕국 사람도, 가멜다 왕국 사람도 아니다.
그저 신을 따르는 자들일 뿐이다.
성직을 포기하고 환속하여 국적을 회복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공식적으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신의 백성들’일 뿐이다.
이는 율렌 섬에서는 중립 지대의 대신전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제도였다.
인간은 물론 이종족들과 함께 성직을 수행해야 하는 중립 지대에서 특정 국가의 개입을 막기 위해 특별히 만들었다.
‘대신전에서 일하려면 국적을 포기하라’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이 제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중립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 앞에 결국 허락했다.
대신 범죄자나 불온한 무리가 죄를 짓고 신전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적 포기 과정을 엄격하게 만들었다.
지명 수배자가 신분을 감추고 도피하기 위해 이 제도를 활용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이 제도가 완벽하게 시행되지는 않았다.
국적을 포기하고 빛의 신만을 섬길 것을 맹세했음에도 신관들 중 조국을 위해 활동하는 첩자가 여럿 있었으니까.
가멜다 왕국에서도, 다르센 왕국에서도 대신전에 첩자를 심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따라서 첩자일 수 있는 가멜다 왕국 출신의 신관들과는 얽히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지.’
잠시 생각하던 사울은 문득 표정을 바꾸고 모두에게 말했다.
“가멜다 왕국 출신인 신관이나 성기사와도 친하게 지낼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