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 말을 들은 그레이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요?”
사울은 입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레이도 일단 목소리를 낮추라는 사울의 명령에 따랐다.
“전하. 사실입니까?”
“들은 대로야. 가멜다 왕국 출신이야.”
“그럴 수가. 대신관이 노망이 들었습니까?”
그레이의 말이 심하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왕자 곁에 적국 출신의 소년을 붙인다는 건 누가 봐도 불경스러운 일이었으니까.
흥분한 그레이와는 달리 아르멜은 냉정히 상황을 파악했다.
“전하께서 대신관에게 가멜다 왕국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 그러자 저 소년을 내 곁에 붙여주더군.”
“알 만합니다. 전하의 뜻이 진심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려는 것이겠지요.”
카스텔도 한마디 했다.
“소년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날 해치려는 자객은 아닌 것 같지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제가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선생님이 신경 써 준다면 든든하지요.”
아이나도 입을 열었다.
“다소 불편하지만 감수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의견이 모이자 홀로 데이빗을 배척하는 꼴이 된 그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신관이 전하께 위해를 가할 리는 없지만 견습 신관의 마음은 또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마음이야 알 수 없지. 하지만 데이빗이나 나나 다르센 왕국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
“제가 말려도 전하는 듣지 않으시겠지요?”
“나는 무슨 조언이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 다만 무작정 따를 순 없을 뿐이야.”
사울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그레이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겠습니까. 제가 맞춰드리는 수밖에.”
“언제나 고마워, 그레이.”
고맙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레이의 태도가 완고할지언정, 언제나 자신을 향한 걱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사울과 부딪칠 때마다 항상 뜻을 꺾고,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충성하는 그레이에게는 언제나 미안했다.
어쨌든 그레이도 수긍하면서 사울은 다시 데이빗을 불렀다.
데이빗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와 인사를 나눈 데이빗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예의도 바르고, 어린이 특유의 싹싹한 미소는 한 치의 가식도 없어 보였다.
‘참 묘한 꼬마로군.’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한 소년이지만, 사울은 느낌을 받았다.
겉으로 보기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데이빗.”
“네, 전하.”
“너는 다른 가멜다 왕국 출신 신관과도 알고 지내나?”
“모두는 아니지만, 몇몇 알고 지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다르센 왕국 출신 신관은?”
“저도 그 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데이빗이 말끝을 흐렸다.
사울은 굳이 캐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데이빗이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어도 스스로 알아보면 될 일이니까.
“알았어. 앞으로 잘 부탁해.”
“네, 전하.”
일단 사울은 데이빗을 그레이에게 보냈다.
그레이가 사울을 보필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싶어 했기에 명분은 충분했다.
데이빗을 내보낸 사울은 한참 뒤 새로운 손님을 불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신관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범하게 생긴 중년 남성 신관.
신전을 뒤져 보면 비슷한 사람이 많아 쉽게 찾아낼 수 없을 만큼 흔한 외모를 가졌다.
하지만 눈앞의 신관은 겉보기와는 다른 존재다.
다르센 왕국에서 대신전을 감시하기 위해 특별히 파견한 첩자다.
사울과 만난 것 때문에 첩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나기 전 아르멜이 여기저기 손쓰기까지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신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울에게 인사했다.
사울 역시 무슨 상황인지 알아챘다.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숨기겠다는 뜻이었다.
사울도 신관의 태도에 맞춰주기로 했다.
“반갑다. 그대가 이 신전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다고.”
“네, 전하. 만나서 영광입니다.”
“다르센 왕국 출신이지만 왕국보다는 신을 모시는 데 전념하고 있고.”
“그렇습니다.”
“다르센 왕국 출신 사람들과는 자주 만나나?”
“네. 전하.”
“다른 다르센 왕국 출신 사람들은 어떻지? 그대처럼 신을 모시는 데 충실한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다르센 왕국 출신 신관이나 성기사가 이 신전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다.
문제는 가멜다 왕국 출신인 자들, 특히 데이빗이다.
“날 만나기 전에 아르멜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겠지?”
“네, 전하.”
“내가 알아야 할 특별한 이야기가 있나?”
“제가 알기로는 다르센 왕국 출신 자들 중 전하께 위해를 끼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확실한가?”
“기사님도 동의하셨습니다.”
신관의 말에 사울은 아르멜을 돌아보았다.
사울의 눈빛을 받은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데이빗에 대해 조사를 하고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다.
저렇게 아르멜이 자신할 정도면 당장 가멜다 왕국 출신의 신관이나 성기사가 자신의 목숨을 거두러 올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사울이 직접 관련 정보를 검토할 생각이었다.
“그렇군. 마지막으로 그 소년에 대해 묻고 싶다.”
“견습 신관 데이빗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그에 대해 특별히 알아야 할 게 있나?”
“데이빗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별하다고? 어떻게?”
“가멜다 왕국 출신 신관 아미스가 데리고 왔으니까요.”
“아미스?”
사울의 머릿속에는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아르멜은 알고 있었다.
“이 신전에서는 꽤 유명한 가멜다 왕국 출신의 여신관입니다. 몇 년 전 율렌 섬을 떠났다고 합니다만.”
“그렇군. 아미스는 믿을 만한 사람인가?”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나라와 종족을 초월하여 모두에게 공정히 대하고 봉사하였으며, 젊지만 굉장히 유능한 인물이었다고 호평이 자자합니다.”
다르센 왕국 출신의 여신관이 데리고 온 가멜다 왕국 출신의 견습 신관.
듣기만 해도 사정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푸는 것 보다 데이빗을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가 더 중요했다.
“그럼 데이빗을 내 곁에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나?”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데이빗은 교단의 사람이지, 어떤 나라에 소속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군. 알았다. 이만 물러가도 좋아.”
“네, 전하. 제 힘이 필요하시면 먼저 아르멜 님을 통해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
* * *
데이빗을 믿기로 한 사울은 그를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리곤 데이빗을 이용하여 가멜다 왕국 출신의 신관이나 성기사를 만나 보려 했다.
일이 곧장 잘 풀리지는 않았다.
데이빗은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가멜다 왕국 출신의 신관이나 성기사들은 사울과 만나기를 꺼려했다.
첩자가 있다면 이 기회를 놓칠 것 같지 않은데도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사울과 함께 신전을 돌던 데이빗이 고개를 숙였다.
“날 만나지 않겠다고 하던가?”
“네. 대신관님이 직접 명령을 하신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전하를 만나기 불편하다고…….”
사울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네가 내 곁에 있거나, 아미스 신관과 함께한 것이 특이한 일이지.”
아미스란 이름을 들은 데이빗이 놀랐다.
“아미스 신관님을 아십니까?”
“그래. 널 여기로 데리고 온 사람이라지?”
“네. 제 은인입니다!”
데이빗은 신이 난 상태로 아미스 신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랬다.
과거 ‘6년 전쟁’에 휩쓸린 데이빗과 가족들은 전쟁 막바지에 피난 차 중립 지대까지 갔다가 데이빗을 제외한 가족들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데이빗도 꼼짝없이 죽을 뻔 했지만 마침 여행 중이던 신관 일행이 그를 구해 주었다.
구해 준 신관 중 아미스가 있었고, 이후 그녀를 따라 대신전까지 왔다는 말이었다.
흔한 비극이었다.
전쟁 속에서 영광을 찾은 자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비극에 휘말린 자들이 더 많으니까.
“고생이 많았군.”
이야기를 다 들은 사울의 말에 데이빗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면 신께서 저를 어여삐 봐 주셨던가. 저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매우 드무니까요”
“그렇지.”
“제 스승인 아미스 신관님도 이런 세상에서 좀 더 나은 길을 찾아보겠다며 율렌 섬 밖으로 나가셨어요. 신의 은총 속에 삼백 년 전쟁을 멈출 길이 있을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아미스는 꽤나 이상이 높은 사람인 모양이다.
사울도 나이도, 얼굴도 모르는 아미스 신관의 이상을 비웃을 마음은 없었다.
그저 현실성이 낮은 이야기라 생각할 뿐.
‘신의 은총으로 전쟁을 멈춘다? 꿈같은 이야기지. 끝장을 봐야 전쟁도 끝날 거야. 두 나라 중 하나가 완전히 끝장이 나야.’
사울은 화제를 돌렸다.
“어쩔 수 없지. 가멜다 왕국 출신들과 친교를 나누는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어.”
“어둠의 세력에 대한 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대신관에게 들었지?”
“물론입니다.”
데이빗의 표정이 단호해졌다.
“대신전 안에 어둠과 손을 잡은 자가 있을까?”
“음…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대신전에 속한 자들은 모두들 정기적으로 신앙 증명을 받아야 하니까요.”
“신앙 증명?”
“네. 고위 신관님들이 신전에 속한 모두를 하나하나 면담하고 조사하는 과정이지요. 어둠과 손을 잡은 자가 있다면 그 과정에서 들통날 겁니다.”
신앙 증명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데이빗은 그에 대해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신앙 증명을 벌이는 고위 신관이 어둠과 결탁했을 가능성 따윈 생각지도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군.”
일단 대신전 안에서 어둠의 세력이 대놓고 활동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이곳에 파견한 루시아도 ‘암약’에 대한 가능성을 염려했지 대놓고 활동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라도 대놓고 활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첩자 한둘을 심어 두거나, 조종당하는 것도 알지 못하게 몇몇을 꼭두각시로 만든 수준이 아닐까.
‘신전 안이 비교적 깨끗하다면, 역시 밖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할까.’
이 지역에서는 대신전을 중심으로 이종족들과 피난민들이 자신들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대신전 주변에 몇 개의 마을과 부족이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그곳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신전에서 가장 가까운 부족이나 마을이 어디였지?”
“이종족들이 사는 곳 말씀이시지요?”
“그래.”
“그러니까… 에셀 마을이 가장 가깝습니다.”
“에셀 마을이라면 인간과 이종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곳인가?”
“네. 하지만 그 마을은…….”
사울은 데이빗이 말끝을 흐리는 이유를 알았다.
에셀 마을은 삼백 년 전쟁의 여파로 발생한 피난민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대신, 중립 지대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라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조국에 돌아오는 대신 중립 지대에 사는 것을 택한 피난민들은 국가 입장에서는 배신자였다.
배신자들의 마을이라 할 만한 에셀 마을이 여태 쓸려 나가지 않은 건 중립 지대에 위치해 있고, 대신전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대신전은 에셀 마을의 피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종족들을 마을에 살게 하였고, 자신들이 보호자라 공포했다.
결국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마을에 더 이상 피난민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에셀 마을의 존재를 눈감아 주었다.
그게 5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5년.
아직 길다고는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다르센 왕국 왕자는 당연히 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셀 마을은 조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인간과 이종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다 다른 중립 지대의 마을이나 이종족 부족과도 교류가 있다고 들었다.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 같은 놈들이 터를 잡기에도 좋은 곳이 아닌가.
대충 생각을 정한 사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일행을 불러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