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에셀 마을에 대해 알고 있나요?”
출발하기 전 일행들은 모고리아 지방에 대해 기본적인 조사를 했다.
에셀 마을에 대해 모르는 자는 없었다.
“모두들 알고 있다면 설명은 필요 없겠지요. 우리 조사는 에셀 마을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사울의 말에 함께 회의에 참석한 데이빗이 먼저 반응했다.
“전하? 그 에셀이라는 마을은…….”
“알고 있어. 날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네. 전하.”
“당연하지. 피난민들이 날 좋아할 리 없지. 하지만 나는 피난민들에게는 관심 없어. 그들을 잡아가거나 위해를 끼칠 생각도 없고. 내가 그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면 내 정체를 밝히고 그들에게 협조를 구할 수 있을까? 네 생각은 어때?”
사울의 말에 데이빗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군. 그럼 정체를 숨기고 잠입하는 수밖에.”
“네? 잠입이라면…….”
“대신전이 그 마을에 종종 드나든다고 들었어.”
“그렇습니다. 종종 물건을 사고팔거나 혹은 종교 의식 때문에 들르고는 하는데…….”
“그런 자리에 신관이 아닌 사람 네 명이 끼어든다고 크게 눈에 띄진 않을 것 같아.”
사울이 말하는 ‘신관이 아닌 네 명’은 물론 사울,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을 뜻했다.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데이빗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 위험합니다.”
“위험하다고? 어째서?”
“그러니까… 에셀 마을 사람들은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내 정체가 드러나면 곤란하다는 말이지? 그러니 정체를 숨기고 가면 될 것 아니야.”
“그렇지만 만에 하나 전하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걱정 마.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체를 숨기는 일에 익숙하니까.”
데이빗은 사울이 ‘투구 전사’ 등 정체를 숨기고 활약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사울을 말리기 위해 몇 번이나 말을 해 보았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렇게 데이빗을 항복시킨 사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두들 나와 함께 에셀 마을에 갈 거죠?”
가장 먼저 카스텔이 대답했다.
“걱정 없습니다. 마을 전체가 전하께 위해를 끼치려 한다 해도 몰살시키면 그만이니.”
“여긴 왕국 영토가 아니니 가능한 온건하게 움직이도록 하자고요. 아이나와 아르멜은?”
아이나도, 아르멜도 반대하지 않았다.
데이빗을 제외한 모두의 뜻이 모아졌고, 사울은 데이빗에게 말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너도 우리와 함께 에셀 마을에 가 주었으면 해.”
“저도 말입니까?”
“우린 아직 대신전도, 이 지역도 잘 모르니까.”
“…….”
“대신전을 위해서도, 또 이 지역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어둠의 세력은 물론, 관련된 모두를 물리쳐야 해. 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야. 약속하지. 에셀 마을에서, 나아가 이 지역 어디에서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야. 또 교단과 마을, 부족의 규칙을 존중할 거야.”
사울이 이렇게까지 말 하는데 데이빗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데이빗은 고개를 떨구며 사울의 뜻을 받아들였다.
“네, 전하.”
“좋아. 그럼 대신관의 허락을 받은 뒤 출발하자.”
대신관 콜리타가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허락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낸다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데이빗을 곁에 둠으로써 만든 빚도 있으니 그를 활용할 생각도 했다.
다행히 콜리타에게 강제로 허락을 받아 낼 필요는 없었다.
“에셀 마을로 가신다고요?”
“네. 에셀 마을부터 조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콜리타의 협조 덕분에 사울은 생각보다 신속하게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 * *
에셀 마을.
현재 백 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절반은 다르센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 출신의 피난민, 나머지 절반은 이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과 가까워지자 마을과 통하는 하나뿐인 길을 가로막고 선 경비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종족이 많이 사는 마을답게 네 명의 경비병 중 절반은 인간, 나머지 절반은 이종족이었다.
경비병들의 갑옷은 허름했지만 망가지지는 않았고, 들고 있는 창도 시퍼렇게 날이 살아 있었다.
“멈춰라.”
다가오는 마차를 본 경비병들이 말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신관 한 명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신관의 얼굴이 낯익은 듯,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푸른 피부에 큰 덩치가 특징인 오크족 경비병이 신관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대신관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대신관님이?”
신관은 말을 아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신관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신관복을 입었고, 신관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진짜 신관은 아닌 남자.
아르멜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르멜은 에셀 마을에 온 적이 없다.
당연히 경비병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경비병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처음 뵙겠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이 지역에 부임한 신관 파스칼입니다.”
사울 일행의 대표자 역할을 맡은 아르멜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신분을 숨긴 사울 일행은 각각 자신들에 맞는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아르멜은 타 지역에서 활동하다 모고리아 지방에 파견된 고위 신관 ‘파스칼’.
사울과 데이빗, 아이나는 그런 아르멜을 보좌하는 견습 신관.
카스텔은 최근 부임한 성기사.
각각 맡은 배역에 맞추어 연극을 하는 게 이번 작전의 핵심이었다.
아르멜은 정보부 출신답게 이런 연극에 능숙했다.
사울 역시 누굴 속이거나 연기를 하는 일에는 능숙했다.
사울의 삶 자체가 연기의 연속이었으니까.
반면에 아이나와 카스텔은 사울만큼 연기에 익숙하지 못했다.
연습을 시켜도 익숙해지는 속도가 늦었고, 결국 사울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둘 다 가능한 말을 줄이고 조용히 있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카스텔과 아이나는 마차 밖에서 말수가 적은 성기사와 견습 신관 노릇을 해야 했다.
사울 역시 견습 신관복을 입고 말을 탔다.
그런 사울 곁에는 데이빗도 있었다.
데이빗 역시 말을 탈 줄 알았고, 진짜 견습 신관이라 행동거지가 자연스러웠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진짜 신관들 대부분이 연기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바깥세상에서도 거짓말을 미덕으로 치지는 않지만, 교단에서는 더욱 정직을 중요시한다.
마을 도착 후 처음 경비병과 이야기를 나눈 신관이나 데이빗은 진짜 신관들이다.
정직을 미덕으로 생각하며 실천해 온 사람들이 갑자기 거짓말을 능숙하게 할 리 없었다.
결국 거짓말에 능숙한 아르멜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 했다.
“이번에 저를 따라 새로 부임한 견습 신관과 성기사들이 여럿 있습니다.”
아르멜의 설명에 오크 경비병이 물었다.
“이상하군.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 않소?”
“네. 처음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대신관님의 허락을 받고 하는 일입니다. 저와 저의 일행이 모고리아 지방에 빨리 익숙해 질 필요가 있어서요.”
신분은 속였어도 대신관의 허락을 받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다.
아르멜은 자신의 말을 증명할 물건을 꺼내 보여 주었다.
빛의 신을 형상하는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청동판.
오크 경비병은 청동판이 대신관이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지급하는 표식임을 알아보았다.
“이건… 알았소. 들어오시오.”
“감사합니다.”
마차 밖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울은 대신관 콜리타가 청동판을 넘겨주면서 한 말을 떠올렸다.
‘이건 교단과 저의 신뢰를 받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표식입니다.’
‘우리를 변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 물건을 사용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그를 위해 드리는 물건입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무슨 일이든 가능한 조용히 처리해 주십시오. 그리고 모두의 평화를 깨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닌 다른 자들이 먼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신관에게 넘겨받은 표식은 진짜였고, 그만큼 효과도 좋았다.
아마 이 마을은 물론, 중립 지대의 다른 곳에서도 통할 것이다.
덕분에 사울 일행은 별문제 없이 마을에 들어섰다.
신분을 속이고 말에 타고 있던 사울은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전쟁 피난민들이 세운 마을답게 꽤 엄중히 지키고 있군.’
에셀 마을 주변에는 통나무를 빙 둘러쌓아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한 방벽을 만들었고, 오직 한 곳에만 길을 열어 출입구를 만들었다.
또 마을 안 곳곳에 경비를 서는 인간이나 이종족의 모습도 보였다.
마을 밖이라면 모를까 마을 안까지 몰래 침입하거나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기는 쉽지 않은 구조였다.
마차는 마을 방벽의 출입구에서 멈춰 섰다.
출입구가 좁게 만들어져 있어 마차가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모두들 마차에서 내렸다.
방벽 근처에 마차를 세운 일행은 말을 타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들어선 마을은 생각보다 컸고, 또 생각보다 초라했다.
백 가구 정도가 산다고 들었는데, 어딜 둘러봐도 제대로 만들어진 번듯한 집은 보이지 않았다.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초라한 집.
제대로 된 벽돌이 아닌 진흙 벽돌을 쌓아 만든 허름한 집.
심지어 ‘집’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천막에서 거주하는 가구도 있었다.
집이 허름한 만큼 주민들의 옷차림도 허름했다.
견습 신관이나 성기사로 가장한 사울 일행의 복장은 화려하지 않고 검소한 편이었는데, 에셀 마을 주민의 옷차림과 비교하면 귀족의 옷차림처럼 보였다.
더럽거나 찢어진 옷을 입은 것은 예사에 옷이라 부르기 민망한 천 쪼가리나 가죽을 대충 걸친 주민도 있었다.
‘생각보다 더 엉망이군.’
사울은 주민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전쟁에 휘말렸다고는 해도 자신의 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자들이 아닌가.
그렇다고 왕국의 몇몇 강경파들이 주장하는 ‘피난민 마을을 박살 내고 주민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반역죄로 목을 매달자’는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들이 가난하게 산다고 동정심이 들지는 않았다.
이들은 나라를 버리는 선택을 했고, 그 대가를 가난이라는 형태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다.
비난할 이유도, 도와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
사울은 속내가 드러나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자신은 전장에서 죽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왕자가 아니다.
이들에게 동정적인 마음을 품을 법한 견습 신관이다.
실제 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
사울은 일행과 마을 중심에 위치한 신전으로 향했다.
신전은 마을의 다른 집들보다는 크고 깨끗했다.
통나무를 좀 더 말끔하게 자르고, 또 균형 있게 쌓아 만든 수준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신관님! 대신전에서 손님들이 왔습니다!”
경비병의 말에 마을 중심에 위치한 신전에서 지저분한 신관복 차림의 신관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지? 편지 한 통 없이 갑자기 찾아오다니.”
신관은 머리가 하얗게 센 인간 여자였다.
작은 체구에 얼굴 곳곳에 주름이 잡혀 있었지만, 눈빛은 어떤 젊은이 못지않게 강렬했다.
사울은 이곳에 오기 전 전해 들은 정보를 떠올렸다.
에셀 마을에 상주하고 있는 여신관 ‘사라’.
에셀 마을의 신관은 한 명뿐이라 했으니 저 신관이 사라일 것이다.
지금 사울은 왕자가 아닌 견습 신관이다.
물론 위장된 신분이지만, 이 마을을 나갈 때까지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여야 한다.
보통 견습 신관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정식 신관을 보면 먼저 예를 갖춘다.
상식을 떠올린 사울은 그 상식대로 움직였다.
“…….”
말없이 예를 표하는 사울 옆에서 데이빗도 예를 표했다.
사울이 곁눈질로 살피니 데이빗은 조마조마한 표정이었다.
존귀한 왕자가 견습 신관 노릇을 잘 하는가 의심을 하는 것이리라.
어차피 사라에게는 잠시 후 진실을 밝힐 것이다.
중요한 건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