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갑자기 이렇게 많은 손님이 찾아올 줄이야.”
신관 사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들어 보니 손님들을 썩 반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여나 일이 잘못될까 정식 신관을 가장하고 있던 아르멜이 나섰다.
“대신관님이 보내셨습니다.”
아르멜은 청동판을 보여 주었다.
청동판을 본 사라가 말했다.
“알았소. 일단 들어오시오.”
“감사합니다.”
* * *
예배 시간이 아니라 신전은 텅 비어 있었다.
보통 신전은 정식 신관은 한 명뿐이라도 수행이나 봉사 차원에서 신전에 머무르며 일을 돕는 견습 신관이나 신도가 한두 명은 있다.
하지만 이 신전은 사라 혼자서 다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앉으시오.”
사라는 방에 데려가는 대신 예배당에 사울 일행을 앉혔다.
예배당이 공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에 많은 인원이 앉을 자리가 없는 탓이리라.
예배당 문이 닫히고, 사라와 사울 일행만 남게 되자 사라는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러다 문득 사울과 눈이 마주쳤다.
“이보시오.”
사울은 조금 늦게 사라가 자신을 부른 것임을 깨달았다.
반말을 쓰는 것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보시오’라니.
견습 신관을 향한 말투로도 어색하지 않은가.
일단 사울은 견습 신관을 연기한 채로 말했다.
“네, 신관님.”
그런 사울의 말에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뭐 하는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일을 해 본 적 있는 모양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신관이 아닌 사람이 신관 옷을 입어 봤자 티가 난다는 말이오. 마을 주민들은 못 알아 본 것 같지만.”
“…….”
“견습 신관이랑 여기 정식 신관은 가짜가 틀림없고, 성기사 중에도 진짜가 아닌 자가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모두들 대신관님이 보낸 사람들은 틀림없다는 말이지…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로군.”
사라의 눈썰미에 사울은 감탄했다.
어차피 사라에게는 진실을 말할 예정이었기에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왜 하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데이빗이 유독 댁 눈치를 많이 보는 것 같더군. 아마도 여기 사람들 중 댁이 가장 지위가 높은 것 같은데, 내 말 틀리오?”
“아니, 맞습니다.”
사울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대신관 콜리타가 직접 쓴 편지를 받아 본 사라의 눈이 커졌다.
“아니, 왕자라고?”
사라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예의 바른 표정으로 고쳤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괜찮아요. 그보다 이 사실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만 알아야 해요. 내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사라는 예의 바른 표정으로 콜리타의 편지를 읽어 나갔다.
편지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사울의 눈에 보였다.
‘어지간히 편지 내용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던가.’
생각하는 사이 편지를 다 읽은 사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를 찾아 오셨다고요?”
“그래요.”
“정말 이 마을에 그러한 자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요. 그것을 조사하러 온 것이고요.”
사라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다르센 왕국의 왕자이시지요.”
“내 신분을 의심하는 건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라의 시선이 성기사 차림의 카스텔 쪽을 향했다.
카스텔을 바라보는 사라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공포인지 혐오인지는 알기 어려웠지만, 크게 동요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검은 흉성이 찾아올 정도라면 왕자님의 신분 또한 의심할 수 없으니까요.”
사라의 말에 사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카스텔을 ‘검은 흉성’이라 부르는 건 가멜다 왕국 사람뿐이다.
다르센 왕국 사람들은 아무리 카스텔을 두려워해도 혐오의 뜻이 담긴 ‘흉성’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흉성보다는 온건한 표현인 ‘검은 마녀’라고 부를 뿐.
“신관님은 가멜다 왕국 출신이시군요.”
사울의 말에 사라가 쓰게 웃었다.
“맞습니다. 저분은 저를 기억 못하겠지만 저는 기억하고 있지요.”
“그래요?”
“네.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전장에서 시체로 산을 쌓고 저와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응시하던 검은 흉성의 모습을.”
사라의 말에 카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사울이 말해 주었다.
“선생님이 시체로 산을 쌓았다고요?”
사울과 카스텔의 관계를 알지 못한 사라는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선생님…?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미워하시는 겁니까?”
“미워한다… 과거에는 그런 생각을 품었던 적도 있지만, 이젠 의미 없는 일입니다. 저는 가멜다 왕국 국적도 버리고 오직 신께만 충성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조금 전 선생님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저분은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 일을 부정하는 겁니까?”
“선생님이 피를 흘렸지만 그건 전장에서였지요. 그럼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이 적이 아닌 사람을 죽이거나 저항할 수 없는 포로를 죽였나요?”
“…….”
사울의 날카로운 질문에 사라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선생님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장에서 최선을 다해 싸웠/어/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가멜다 왕국 사람들이 선생님을 미워하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곳을 떠난 분이라면 선생님을 공정하게 대했으면 합니다. 전장에서 피를 흘린 자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모두들 신의 아이들이 아닙니까.”
사울의 말에 사라는 한참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잠시 눈이 멀었던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사라의 사죄는 사울이 아닌 카스텔을 향한 것이었다.
카스텔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이었지만, 사울은 읽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카스텔은 사라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분위기가 수습이 되자 다시 사울이 입을 열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여기에서 나라 사이의 문제를 따질 생각은 없어요. 또한 여기 피난민들이 비겁자라고 비난할 생각도 없고요. 나는 어둠의 세력이나 하얀 까마귀에 대해 조사를 하러 왔고,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머잖아 떠날 겁니다. 그때까지 협조를 부탁하지요.”
“알겠습니다, 전하.”
* * *
신관 사라와 협상을 마친 사울은 신전을 나섰다.
일행과 함께 할 일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카스텔이 그런 사울을 불렀다.
“조용히 할 말이 있다.”
카스텔이 갑자기 무례해진 게 아니다.
‘견습 신관을 상대하는 성기사’라는 연극을 하기 위해 말투를 고친 것이다.
“알았어요.”
두 사람은 인적 없는 곳으로 갔다.
주변에 눈과 귀가 없는 것을 확인한 카스텔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전하.”
“내게요?”
“네.”
“선생님한테 감사받을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방금 전에 제 편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신관 사라와의 대화를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카스텔의 말에 사울은 피식 웃었다.
“그 일 말이에요? 나는 할 말을 한 것뿐이에요.”
“하지만 제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위로라고요?”
“저는 사람들이 절 괴물 취급하는 건 신경 쓰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한 일을 후회하지도 않지요. 마땅히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할 뿐이니.”
“그렇지요. 선생님은 전장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전하 말씀대로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저를 뭐라 부르든 신경 쓰지도 않고요. 조금 전 신관이 절 두려워하는 것도 별생각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저를 변호해 주셨지요.”
“주제넘은 참견을 한 건가요?”
“아닙니다. 말씀드렸듯 위로가 된 것 같습니다. 뭐랄까. 전하 덕분에 그 신관의 생각을 바꿨고, 새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기분입니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다.
사라는 카스텔을 괴물 취급했지만, 사울의 말 덕분에 조금은 태도가 누그러졌다.
사울은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카스텔에게는 감사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사울은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나는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선생님이 그렇게 기뻐해 주니 나도 기뻐요.”
“감사합니다. 전하. 그럼.”
할 말을 마친 카스텔이 몸을 돌렸다.
그런 카스텔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사울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울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야.’
예배당에서 자기도 모르게 카스텔을 변호했다.
사라 신관에게 한 말은 카스텔을 변호하기 위해 꾸며 낸 말이 아니다.
그저 오해를 바로잡은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했는지 의문이었다.
카스텔이 한 일.
다르센 왕국의 반역자들을 죽이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가멜다 왕국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적들을 죽였다.
그 적 중에는 롤랜드, 곧 전생의 사울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 때의 죽음으로 롤랜드는 물론 가족들까지 모조리 비참하게 죽었고, 그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이 카스텔이 한 일을 스스럼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다니.
그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야 깨닫다니.
사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말실수를 했다며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말 복수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런 정신으로 무슨 복수를 한다는 말인가.
‘왕자 노릇에 취해 해이해져서는 안 되지. 정신 차려야 해. 정신을 차려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다짐하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 * *
자신을 다잡은 사울은 다시 가면을 썼다.
왕자가 아닌 견습 신관을 연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자의 몸으로 견습 신관을 연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견습 신관은 시종이나 하인에 비유된다.
일반 신관의 뒤치다꺼리를 맡거나, 신전의 각종 잡일을 하는 게 주 업무다.
동행하고 있는 데이빗은 견습 신관 중에서도 엘리트 신관이었는데, 그런 그도 신관 뒤치다꺼리나 잡일을 맡아 했다.
더군다나 사울은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견습 신관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서라도 잡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할까요?”
사울의 한 마디에 아무도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사울이 데려 온 일행들은 모두들 사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카스텔이나 아이나, 아르멜은 물론 데이빗을 비롯한 신관 쪽 사람들도 말이다.
왕자와 함께 하는 일이라 콜리타가 직접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들을 골라 보냈다.
하지만 유능한 신관이나 성기사라도 이런 일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견습 신관을 연기하는 왕자를 상대하는 일 같은 건 더더욱.
“어. 그러니까…….”
“으음. 흠. 아.”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가운데 한 신관이 말했다.
“일단 언제 마을을 떠날지 모르니 물통을 넉넉히 채워 두도록. 물이 떨어졌다면 채우기 전에 물통부터 씻거라. 그리고 마을을 떠날 때까지 최소한 이틀에 한 번은 물통을 씻고 물을 채워 두도록.”
배짱 좋게 사울에게 명령을 내린 건 아르멜이었다.
사울이 바란 반응이었고, 그는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마치 진짜 견습 신관이 된 것처럼 명령을 받들어 타고 온 마차로 향했다.
“그러니까 물통이… 이거로군.”
사울은 어렵잖게 마차 한쪽에 부착된 물통을 발견했다.
나무와 금속으로 둥그렇게 짜 맞춰 만든 물통은 술을 양조할 때 쓰는 오크통만큼이나 컸다.
물이 가득 차 있었다면 옮기기도 어려웠겠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거의 비어 있었다.
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면 물통을 씻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거의 비었으니 물통을 씻어야 할 것이다.
‘마차에서 물통을 분리하려면…….’
사울도 전생 때는 비슷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지만, 현생에서는 처음이었다.
분명 마차 어딘가에 물통을 쉽게 분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장치가 있을 것인데 그것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슨 문제 있어?”
아이나가 다가와 물었다.
그녀가 반말을 하는 이유는 앞서 카스텔이나 아르멜과 같았다.
‘사울과 나이가 같은 견습 신관’을 연기하고 있었으니까.
“여기 물통을 마차에서 떼어 내야겠는데.”
“알았어.”
아이나는 익숙한 솜씨로 마차에 붙은 물통을 분리해 냈다.
이런 일을 처음 해 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일 해 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