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견습 신관 3인조는 마을 출입구 바로 옆에 붙은 숲으로 갔다.
이 주변에는 몬스터나 위험한 짐승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는 게 있기에 멀지 않은 곳에 카스텔이 따라붙었고, 사울과 아이나도 호신용 무기를 챙겼다.
다행히 걱정은 기우인 듯 했다.
숲에 들어왔지만 수상한 자나 몬스터는커녕 토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꽤 울창하게 자라는 나무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가 전부였다.
에셀 마을 주민들도 땔감을 줍거나 들짐승을 잡을 덫을 놓을 때를 제외하면 숲에 자주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땔감과 들짐승 외에는 특별히 도움이 될 만한 게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 세 사람은 열심히 땔감을 주웠다.
이 일에 가장 능숙한 건 데이빗이었다.
숫기 없는 태도와는 달리 이런 일을 어릴 때부터 많이 해 본 듯 땔감을 고르고 줍는 일까지 잘 해냈다.
“형. 그 나뭇가지는 너무 축축해서 불이 잘 안 붙을 거야.”
“누나. 그 나뭇가지는 너무 큰 것 같은데.”
이제는 사울을 형이라 부르고 아이나를 누나라 부르는 것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사울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들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땔감을 모았다.
마을 안에서는 자신을 속이고 주민들을 대하거나 하얀 까마귀니 어둠의 세력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게 일상이라 머리를 쓰지 않고 잡일을 하는 시간이 오히려 휴식처럼 느껴졌다.
곧 셋 모두 땔감을 양손에 한가득 모을 수 있었다.
수레라도 있으면 좀 더 편하게 옮길 수 있겠지만, 가난한 마을에서 그런 지원을 기대하긴 어려웠기에 직접 날라야 했다.
다행히 사울과 아이나는 물론 데이빗도 체력이 떨어지진 않았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별일 없이 또 하루가 지나는군.’
왠지 모를 초조함에 사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당장의 평화로운 시간이나 분위기 속에 파묻힐 수는 없지 않은가.
일이 뚜렷이 진전되지 않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이 마을에 무언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뚜렷한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카스텔의 힘을 빌려 마을 유력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속속들이 토해 내게 할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선을 넘어서 확실한 정보를 얻는다면 모를까, 그런 보장이 없기에 생각만 하고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지나가는…….’
생각하던 사울은 무언가를 느끼고 멈칫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카스텔이 다가와 있었다.
“선생님?”
“숨으십시오.”
카스텔의 말에 모두들 군말 없이 몸을 숨겼다.
전원이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뒤에야 카스텔이 말했다.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마을 주민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심상치 않습니다.”
카스텔의 직감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다.
일단 모두들 몸을 숨긴 채 누군가 오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나타난 건 마을 주민 두 명이었다.
마법을 써도 될 것 같아 사울은 ‘이글 아이’ 주문을 시전했다.
마법의 효과로 먼 거리에 있던 두 주민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한 명은 인간, 또 한 명은 엘프다.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무언가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특히 엘프 쪽이 유독 초조해 보였다.
낯빛도 썩 좋지 않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러던 중 인간 쪽에서 엘프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걸 본 사울은 더욱 눈을 날카롭게 떴다.
엘프는 정신없이 받은 것을 입에 넣었다.
그 직후 초조한 태도가 조금은 가라앉는 게 보였다.
‘저건……!’
들키지 않기 위해 멀리서 보았기에 확실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울이 보기에 지금 저들이 주고받은 물건은 악마 토끼풀 같았다.
안절부절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떠는 건 전형적인 악마 토끼풀의 금단 증상 중 하나다.
무언가를 입에 넣은 즉시 안정되는 것 역시 금단증상이 나아지는 것이라고 하면 설명이 되었다.
악마 토끼풀의 진통, 마취, 쾌감 효과는 즉효성이니까.
계속 보고 있으니 이번에는 엘프가 인간에게 무언가를 넘겨주는 게 보였다.
열린 주머니 사이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은화인가.’
이런 마을에서도 은화의 가치는 크다.
화폐의 액면가도 액면가지만,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다른 화폐를 쓰지만 둘 다 금화와 은화를 쓰기에 환전이 쉬웠고, 이종족들도 두 나라의 화폐 모두를 인정했다.
어떤 나라에서 발행한 동전이든 다른 나라에서도 쓰기가 어렵지 않았고, 이종족에게도 충분히 쓸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런 중립 지대에서도 동전은 화폐로 잘 쓰였다.
‘지금 저들이 악마 토끼풀을 거래하고 있다면…….’
사울 일행이 땔감을 주으러 나갔다는 건 아르멜, 그리고 직접 본 마을 주민만 아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평소처럼 인적 드문 숲에서 저들이 부당 거래를 한 것이라면 지금 보이는 모든 게 설명되었다.
사울은 아이나와 데이빗에게도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 당장 저들을 붙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나의 의견에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좀 더 신중히 움직이는 게 나았다.
“아니요. 나중에 따로 찾아가 묻는 게 좋겠어요. 저들의 얼굴은 기억했으니.”
카스텔도 사울과 생각이 같았다.
“그렇습니다. 거친 일을 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 데이빗의 표정이 핼쑥해졌다.
“거친 일이라면……?”
아이나가 그런 데이빗을 달래 주었다.
“걱정 마. 웬만하면 피를 보지는 않을 테니까.”
“‘웬만하면’ 이라고요?”
“최악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어.”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기도해야겠군요.”
듣고 있던 사울도 한마디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죽이는 건 피할 테니까.”
“……”
데이빗은 큰 위로를 못 받은 듯 조용히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거래를 마친 두 명은 다시금 마을 쪽으로 향했다.
사울 일행의 존재는 눈치조차 못 챈 게 분명했다.
“선생님도 얼굴을 기억했지요?”
사울의 질문에 카스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울이 그러했듯, 마법으로 상대의 얼굴을 보고 똑똑히 기억한 것이었다.
“좋아. 저들은 곧바로 마을로 향했으니 우리는 천천히 돌아가도록 해요.”
서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작은 마을이니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두 명 모두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사울 일행은 한참 시간을 끈 뒤 마을로 돌아갔다.
마련해 온 땔감을 한곳에 쌓아 둔 일행은 곧바로 아르멜을 찾아갔다.
“그렇습니까.”
“그래. 아마도 악마 토끼풀을 거래한 것 같아.”
“저는 그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전하 말씀대로라면 납득이 가는군요. 그럼 그 판매자와 구매자는 어떻게 찾으실 생각입니까?”
“선생님이 얼굴을 기억했으니 함께 찾으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다음에 조용히 양쪽 모두와 접촉해서 상황을 알아보자.”
“그게 좋겠습니다.”
카스텔은 정보나 첩보 쪽과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렇기에 정보와 첩보, 사람 찾는 일에 능숙할 아르멜을 붙여 주었다.
곧 아르멜과 카스텔은 마을을 다니며 문제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찾으러 나갔다.
그리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둘 다 찾았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알아냈어?”
“네. 인간 쪽은 피난민 출신의 랄프, 엘프는 카멜 산에서 온 제나엘이라고 합니다.”
피난민 출신의 랄프.
카멜 산에서 온 제나엘.
랄프 쪽은 크게 신경 쓰이는 게 없었다.
피난민이 악마 토끼풀과 접촉해서 장사꾼이 되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으니까.
반면 제나엘이라는 엘프는 조금 신경 쓰였다.
카멜 산이라면 이종족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듣기로 울창한 숲이 빽빽이 들어선 높은 산에는 고대부터 살아온 엘프족이, 산 지하에는 드워프가 거주하는 커다란 도시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산 주변에는 이종족이 거주하는 마을이 몇 개나 있어 하나의 거대한 이종족 세력권을 이루었다.
더구나 율렌 섬 모든 이종족 위에 군림하는 자, 대족장 세네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카멜 산에 사는 엘프족은 어지간하면 그곳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말씀대로입니다. 제나엘 그자는 추방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추방?”
수가 적은 이종족들은 끼리끼리 뭉치고는 했다.
같은 종족이 아니라도 ‘이종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감싸 주고 구성원이 아닌 자들은 배척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런 이종족의 성지에서 추방당한 엘프라면 행실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터.
“추방당한 엘프가 악마 토끼풀에 빠져서 부당한 거래를 했다… 무언가 냄새가 나는군.”
“그 엘프가 추방자 출신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신관 사라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일단 그 둘의 정보를 알아내고 사라도 만나 봐야겠군. 그 둘을 조용히 데리고 올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그럼 그것들부터 시작하자고. 아무도 모르게 잡아 와.”
* * *
사울은 신관들에게 주어진 건물 중 한 곳을 심문 장소로 삼았다.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어 마을 주민에게 들키지 않고 사람을 잡아 오거나 내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신관복을 입고 심문을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야 할지 아닐지도 결정되지 않았다.
사울은 임시로 옷을 갈아입고, 얼굴을 가리는 투구도 썼다.
함께 참여할 아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투구 전사 노릇을 해 보겠군요.”
사울의 농담에도 아이나는 웃지 않았다.
차라리 싸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누군가를 잡아 심문하는 일 같은 것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울은 아이나가 말하는 ‘나쁜 결과’의 뜻을 잘 알았다.
곧 잡혀 올 두 마을 주민을 죽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전장에서는 그렇게 잘 싸우면서 약자에게는 자애롭다는 말이야.’
사울은 아이나의 이런 면모에 장점도, 단점도 있다고 생각했다.
약자를 가엾게 여길 줄 안다는 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큰 미덕이다.
하지만 그 미덕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약자라고 무조건 용서받는 건 아니다.
지은 죄를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건 다르니까.
사울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카스텔이나 아르멜도 그 사실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아이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익숙한 기척이었지만 만의 하나를 생각해 사울은 숨겨둔 마법 검을 손에 쥐었다.
아이나도 마찬가지로 도끼를 손에 가져갔다.
혹시나 적이 나타나면 즉각 반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다행히 문이 열리고 나타난 건 낯익은 사람들이었다.
커다란 무언가를 어깨에 짊어진 카스텔과 아르멜이었다.
차림을 바꾸고 복면을 썼지만 사울도 아이나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데려왔습니다.”
말과 함께 카스텔이 어깨에 지고 있던 길쭉한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안에서 ‘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람 목소리다.
거기에다 카스텔이 내려놓은 길쭉한 자루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다.
저 ‘자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아르멜도 마찬가지로 자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역시나 둔탁한 소리와 사람 목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아이나는 설마 사람을 자루에 담아 짐짝마냥 가져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살아 있는 주민을 이런 식으로 데려왔어요?”
아르멜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분의 생각이었습니다.”
아이나의 시선을 받은 카스텔이 말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습니다. 둘 다 살아 있고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 말하려던 아이나였지만, 그만두었다.
이런 문제로 카스텔에게 뭐라 말해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아르멜이 나서서 자루를 벗겼다.
자루 안에 있는 건 예상대로 조금 전 숲에서 본 마을 주민 둘이었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인간.
초췌하고 메마른 엘프.
둘의 얼굴을 확인한 사울이 명령했다.
“선생님. 깨워요.”
“네.”
카스텔이 손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