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카멜 산에 친서를 보낸 사울은 며칠 동안 에셀 마을 주민들의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카멜 산에서 곧바로 좋은 대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니 지금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하지만 카멜 산에서 온 답변은 모든 계획을 바꾸게 만들었다.
“전하. 카멜 산에서 보낸 서신입니다.”
“음. 그러니까…….”
서신에는 낯선 봉인이 찍혀 있었다.
서신을 가져 온 신관이 말했다.
“대족장의 인장입니다.”
“카멜 산에서 보내는 모든 서신에 대족장의 인장을 찍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대족장의 친필이나 그에 준하는 서신에만 인장을 찍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대족장 세네카가 사울이 보낸 친서를 직접 읽기는 한 모양이다.
그리고 답변까지 직접 보냈다면, 이미 성과는 거둔 셈이다.
큰 의미 없는 친서라 해도 조금은 사이가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
사울은 편지를 뜯고 내용물을 펼쳤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편지를 읽어나가자 하나의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악마 토끼풀 문제는 물론 어둠의 세력에 대한 전하의 우려는 저와 카멜 산 모두가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저와 전하, 나아가 카멜 산과 귀국은 공동의 적을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떠십니까? 한번 카멜 산에 직접 방문하셔서 저희들이 놓인 상황을 살펴보시고 함께 이 일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게. 저와 카멜 산은 언제든 전하를 환영합니다.’
“…….”
사울은 혹시나 싶어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나 살폈다.
반복해서 보아도 자신이 본 편지 내용은 다르게 해석할 수 없었다.
인사치레로 한 말이 아니다.
분명 대족장 세네카는 사울을 초대하고 있었다.
설마 한번 친서를 보낸 것만으로도 초대장을 받을 줄이야.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린 것 아닌가.
사울은 신관을 내보내고 일행을 불러 모았다.
믿고 의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사울은 먼저 편지를 보여 주었다.
아이나도, 아르멜도, 심지어 카스텔도 놀랐다.
“대족장 세네카가 전하를 초청했군요.”
놀란 아이나의 말에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시간이 나면 한번 만날 수도 있다는 말만 들어도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바로 초대를 해 올 줄이야. 이게 엘프 특유의 ‘상대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는 방법’ 같은 건 아니겠지요?”
“엘프는 예의 바르지만 직설적입니다. 전하를 환영할 준비가 되었다는 건, 내일이라도 당장 전하를 뵙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뜻밖이군요. 일이 너무 잘 풀리는데.”
일이 잘 풀리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지나치게 잘 풀리는 건 경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세네카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대족장이 이렇게까지 해서 날 부른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의도가 있겠지요. 그 의도를 모르겠어요.”
모두들 사울과 생각이 같았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만큼 카멜 산의 친서는 예상 밖이었고, 지나칠 만큼 호의적이었다.
이에 사울은 편지를 들고 콜리타를 찾아갔다.
예정 없는 방문이었지만 콜리타는 사울이 찾아올 것을 예상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사울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카멜 산에서 편지가 왔어요.”
“실은 제게도 대족장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런가요?”
“아마 전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편지를 받으신 것 같습니다. 하루빨리 전하를 카멜 산에서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나 또한 그런 편지를 받았지요. 이것이 대족장의 진심일까요?”
“그렇습니다. 전하. 대족장의 진의는 의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콜리타는 대족장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에 사울은 짐짓 세게 나가 보았다.
“내 부하들이 걱정하고 있어요. 내가 그곳에서 해를 당하지는 않을지.”
사울의 말에 콜리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신변에 대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다시 카멜 산에 서신을 보내십시오. 대족장 휘하의 정예들이 전하를 호위하러 달려올 것입니다.”
“그만큼 대족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로군요.”
“네, 전하.”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요. 나는 대족장과 만난 적도 없고,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5왕자에요. 카멜 산에 가서 대족장을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권한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대족장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것인데, 그럼에도 나를 초대한다고요?”
“대족장이 원하는 건 전하의 지위나 권력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전하는 고귀한 몸으로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어둠의 세력과 싸우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족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은 다른 모든 일에는 신중하지만, 빛을 숭상하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지요. 이 대신전 역시 그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저 또한 그분을 믿습니다.”
“으음…….”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대족장을 만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대족장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약속할 수 없어요. 특히 왕실이나 왕국을 대신하여 협정을 맺거나 기존 협정을 수정하는 일 같은 것은 절대로 할 수 없어요. 내게는 그럴 권한도 없고요. 그런데도 괜찮다면 카멜 산에 가 보도록 하지요.”
“네, 전하. 그럼 다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콜리타의 대답을 들은 사울은 인사와 함께 대신관의 방을 나섰다.
그렇게 사울이 나가고 얼마 후, 콜리타가 조용히 명령했다.
“그를 불러라.”
곧 부름을 받고 한 신관이 콜리타의 방에 들어왔다.
들어 온 건 사울을 따라 에셀 마을에 다녀 온 견습 신관 데이빗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대신관님.”
“그래. 조만간 사울 왕자는 카멜 산에 가게 될 거다.”
“카멜 산 말씀입니까?”
“그래. 너도 그곳에 함께 다녀오거라. 네가 할 일은 잘 알고 있겠지?”
데이빗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대신관님.”
데이빗의 예리한 눈빛은 사울 앞에서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었다.
* * *
대족장 세네카에게서 두 번째 친서가 올 때까지만 해도 사울은 그의 의도를 반신반의했다.
세네카가 지나치게 예의를 갖춘 나머지 무언가 이야기가 와전된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네카의 두 번째 친서는 그러한 의심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전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을 받아들이겠으며, 하루빨리 카멜 산을 찾아 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겠습니다.’
마지막 대목을 읽은 사울은 작게 한숨을 쉬며 친서를 내려놓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거부할 수가 없겠어.”
친서를 돌려 본 사울 일행 모두가 동감했다.
심지어 꼬장꼬장한 그레이마저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였다.
“무례한 이종족 놈들 같으니라고. 전하께 이런 수고를 끼치다니. 에잉.”
“그레이. 반대하지는 건 아니지?”
“다른 자의 초대라면 당연히 반대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대족장 아닙니까.”
“그렇지.”
다른 무엇보다 사울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그레이도 귀족 출신이라 세력 간의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또 중립 지대에서 대족장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대족장은 중립 지대에서는 국왕 못지않은 존재이며, 율렌 섬의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따라서 웬만하면 그의 초대를 거부할 수 없다.
사울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왕자의 지위를 내세워 초대를 거부할 수는 있지만 현명한 일은 아니다.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공적인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사울은 모인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족장은 나를 두 번이나 초대 했어요. 이쪽에서 거부할 명분도 없으니 응할 수밖에 없지요. 이왕 카멜 산까지 가는 것이니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렇게 알고 철저히 준비해요.”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먼저 대답했다.
“네, 전하. 이미 왕국 정보부에 소식을 알렸습니다.”
“무언가 답변이 온 게 있나?”
“아직은 없습니다.”
“그렇군.”
사울의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아바마마나 루시아 누님에게 이 소식이 전달되려면 최소 일주일은 걸린다.
하지만 둘 중 한 명의 허락을 받기를 기다린 뒤 움직일 만큼 여유는 없었다.
사울은 일단 대족장의 제안을 왕국에 알리고 본인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그 정도의 재량권은 있었으니까.
“모두들 조심하도록 해요. 혹시나 이번 만남으로 카멜 산과 왕국의 사이가 나빠진다면, 그 책임은 여기 모두에게 있을 테니까. 물론 성과를 거둔다면 그 공 역시 모두가 나눌 수 있을 테지만.”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공을 세우기보다는 일이 잘못되지 않길 바라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그 말이 맞아요.”
대족장 세네카를 만나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렇다고 들떠 있을 때는 아니다.
혹여나 실수라도 하면 지금껏 사울이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한순간에 무너질 테니까.
그렇다고 만남을 피할 수는 없다.
마음을 가다듬은 사울은 카멜 산에 방문하겠다는 친서를 보냈다.
* * *
며칠 후, 카멜 산에서 일단의 병력을 보내왔다.
사울을 안전히 모셔 갈 호위 병력이었다.
카멜 산으로 갈 준비를 거의 마쳤던 사울은 카멜 산에서 보낸 병력을 구경하러 갔다.
대신전 근처에서 머무르던 병사들은 사울을 보고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우두머리로 보이는 엘프가 먼저 허리를 숙이자 휘하 병력이 입을 모아 외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군기도 제대로 잡혀 있고 예의범절도 흠잡을 데 없다.
세네카가 왕자를 모시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사울은 우두머리로 보이는 엘프에게 물었다.
“반가워요. 그대가 책임자인가요?”
“네, 전하. 레덴이라고 합니다. 카멜 산으로 전하를 모시러 왔습니다.”
사울은 레덴이 데려온 병력을 훑어보았다.
기동력을 중시한 듯 전원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병 모두가 말을 탄 왕국 기병과 달리 잿빛 늑대나 커다란 멧돼지, 심지어 소를 타고 있는 병사까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이종족 거주 지역이 아니면 보기 힘든 구경거리였다.
“모두들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 소개는 할 필요가 없겠지요/?/”
사울의 말이 끝나자 사울을 뒤따르던 일행이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다르센 왕국의 기사 아르멜입니다.”
“반가워요. 홉킨스 가문의 아이나 홉킨스예요.”
“카스텔입니다.”
“모두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전하의 측근이자 각각 많은 공을 세우셨다고요.”
아무래도 레덴은 사울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한 모양이었다.
서로 간의 통성명이 끝나자 이런 일에 가장 눈치가 빠른 아르멜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
“카멜 산으로는 언제 출발할 예정입니까?”
“물론 전하의 뜻의 우선이지만, 대족장님은 가능한 빨리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사울의 뜻이 우선이라는 건 결국 인사치레고, 빨리 오라는 말이다.
어차피 마음먹은 길, 지체할 필요는 없다.
“알았어요. 오늘 내로 출발하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다시 한번 사울에게 인사한 레덴이 휘하 병력에게 소리 높여 명령했다.
“곧 대신전을 떠난다! 그렇게 알고 준비해라!”
이미 여행 준비를 거의 끝낸 사울이라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미리 꾸려 놓은 짐을 싣고 왕국군을 대동한 채로 마차에 탔다.
마차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일행은 물론, 견습 신관 데이빗도 함께 탔다.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그래.”
자연스럽게 따라온 데이빗의 표정은 항상 그렇듯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데이빗의 속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대신전의 도움이 필요 없는 카멜 산까지 따라온다는 것은 무언가 목적이 있다는 것이겠지.’
일개 견습 신관에 불과한 데이빗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카멜 산까지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무언가 목적이 있다면 데이빗 개인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콜리타, 나아가 대신전의 목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