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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92화 (92/232)

92화

산 넘어 산이다.

사람이든 이종족이든 목숨을 거두는 일을 가능한 피하고 싶은 건 사울도 마찬가지다.

전생의 원수라면 모를까 원수가 아닌 자들은 적이라 해도 죽이지 않고 일을 끝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날 죽이려 한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피닉스는 미친놈들의 집합체다.

생포를 하려 해도 스스로, 혹은 다른 누군가가 손을 써 모조리 죽어 나가지 않았는가.

오스펠이라는 드워프를 어떻게 생포하려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정말 어렵군. 어떻게든 대족장과 입장을 잘 조율해 봐야겠어.”

“그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나저나 카스텔 님은 대족장을 만나러 간 겁니까?”

“그래. 내가 만남을 주선해 줬어.”

“그분이 먼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맞아. 정말 드문 일이지. 그만큼 선생님이 대족장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대라면 역시……?”

“그래. 과거 검은 마녀로 불리던 전성기의 힘을 되찾아 가르시아 남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 * *

세네카는 이틀 전 사울과 영혼 이야기를 했을 때처럼 카스텔과 단 둘이 만남을 가졌다.

악명 높은 검은 마녀와 단 둘이 만나면서 호위 병력마저 물리치려는 세네카의 모습에 호위병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세네카는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모두들 물러가세요.”

그렇게 모두들 물러가고, 카스텔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

“절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받을 일은 아닙니다. 저도 당신에게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제게요?”

“네. 당신과는 이틀 전 처음 만났지만,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조국에서는 검은 마녀, 적국에서는 검은 흉성이라 불린다고.”

“제 이름은 카스텔입니다.”

“별칭을 좋아하지 않으시군요. 알겠습니다.”

세네카는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저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바깥세상에서 명성을 떨치는 당신에게 궁금한 것이 많으니까요.”

세네카의 호기심에 카스텔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

“이미 알아보셨을 지도 모르겠군요. 제가 평범한 마법사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보았습니다. 당신이 명성대로 막강한 존재이자 보통 마법사와 다른 존재이며, 지금은 족쇄를 차고 있다는 것을.”

세네카의 말에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입니다. 절 도와주십시오. 일방적인 도움을 구하는 건 아닙니다. 대가는 치르겠습니다.”

“대가라면……?”

“돈이라면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제 힘이 닿는 한 왕국에서 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카스텔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한때 구국 영웅으로 불린 만큼 명예는 물론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카스텔은 재산을 쓰는 데에 관심이 없어 잔뜩 쌓아 두기만 했고, 지금은 국왕의 명령을 받은 재산 관리인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런 카스텔의 말에 세네카는 피식 웃었다.

“돈이라. 확실히 카멜 산에서도 돈은 필요합니다. 외부와 거래를 해야 하고, 그 때문에 국적 불문 금화와 은화 모두 받고 있지요.”

“돈이 필요하다면 마련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나 카멜 산이나 큰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힘에 대해서 알고 싶군요.”

“제 힘이라고요?”

“네. 솔직히 지금은 돈보다는 제 지식욕이 앞서군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존재이며, 어떻게 그 힘을 손에 넣었는지.”

말과 함께 세네카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주변 마나가 진동했다.

카스텔도 본능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세네카의 힘에 의해 진동하던 마나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손조차 맞닿지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두 마법사가 충돌한 순간이었다.

문밖에서 놀란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족장님, 무슨 일입니까?”

“별일 아닙니다. 제가 부를 때까지는 무엇이 느껴져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 것인지 상황은 금방 수습되었다.

세네카는 다시 카스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제가 지금껏 본 최강의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굉장히 강한 분이십니다. 명성이 헛되지 않았군요.”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역시 지금은 과거보다 약해진 건가요?”

“그렇습니다.”

“어쩌다?”

“비겁자들에게 당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세네카 역시 6년 전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카스텔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들었다.

“가르시아 남매와의 전투 말이군요.”

“네.”

“그 전투에서 당신은 패하고 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이나는 엘프를 예의 바르지만 직설적인 종족이라 설명했다.

예의 바른 것과 직설적인 것은 상반된 것이라 생각했는데 카스텔의 면전에서 과거 패배 이야기를 정중하게 묻는 세네카를 보니 절로 이해가 갔다.

패배 이야기를 들은 카스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직설적으로 말한 세네카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네. 저는 패했습니다. 그리고 큰 상처를 입었지요. 비겁한 술수에 당한 탓이었지만.”

“비겁한 술수라면…….”

“자세히 듣고 싶으십니까?”

날카로운 카스텔의 눈빛을 마주한 세네카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바깥세상의 전쟁과는 가능한 거리를 두고 싶습니다.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사양하고 싶군요.”

“그럼 필요한 이야기만 하지요. 저는 그때 비겁한 수단에 의해 패했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독화살에 맞고, 마법에 맞고, 검에 베였지요.”

“독이나 상처가 심각했습니까?”

“보통 인간이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 들었습니다.”

세네카는 카스텔이 말하는 ‘보통 인간’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저 남들보다 강해서 살아남았다는 말이 아니다.

무언가 특별한 비결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참 생각하던 세네카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을 고칠 수 있다면 고쳐드리지요.”

“대가는요?”

카스텔의 말에 세네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절 고쳐 주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카스텔은 감사하기에 앞서 의아해했다.

카스텔의 의아한 눈빛에 세네카는 설명을 보탰다.

“당신이 모시는 사울 왕자님의 낯을 보아서 대가 없이 봐 드리는 겁니다. 그분은 제게 있어 흥미로운 존재니까요.”

“전하가 흥미롭다고요?”

“네. 이 이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그러자 카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 폐를 끼치는 일이라면 그만두겠습니다.”

세네카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약속하지요. 이 일로 전하께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수긍한 카스텔에게 세네카가 말했다.

“일단 당신의 몸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카스텔은 몸을 돌린 뒤 옷을 벗기 시작했다.

철저히 의사 앞 환자의 자세였다.

세네카 역시 철저히 환자를 보는 의사의 눈으로 그런 카스텔을 응시했다.

마침내 카스텔이 상반신이 드러났다.

옅은 상아색 피부에 갸름한 등.

하지만 등이 깨끗하지 않았다.

상앗빛 살결 위에 복잡한 문양이 쇄골 아래부터 엉덩이 위까지 새겨져 있었다.

옆구리 쪽에는 커다란 칼자국도 보였다.

모양을 보건대 저 칼자국은 몸 앞까지 새겨져 있을 것이다.

하나의 완성된 ‘작품’이었을 복잡한 문양 끄트머리에 새겨진 칼자국이 전체의 균형을 흐트러뜨린 느낌이었다.

“…….”

세네카는 카스텔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냥 호기심 어린 눈빛도, 그렇다고 혐오스러운 시선도 아니었다.

호기심과 안쓰러움, 동정이 뒤섞인 복잡한 시선이었다.

“이건… 마법진이군요.”

분석을 끝낸 세네카의 말에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힘을 키워 주기 위해 새겨진 게 아닌 것 같군요. 반대로 힘을 억누르고 제어하기 위해 새겨진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세네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카스텔의 몸을 훑기 시작했다.

고통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감각에도 카스텔은 신음 한마디 내지 않았다.

잠시 후, ‘진찰’을 끝낸 세네카가 말했다.

“조사는 끝났습니다. 다시 옷을 입어도 됩니다.”

세네카는 옷을 입고 몸을 돌리는 카스텔을 바라보며 한숨과 함께 물었다.

“믿기 어렵군요. 대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무엇을 알아내셨나요?”

“그러니까… 당신의 그 힘은 본래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 강제로 주입된 힘을 제어하기 위해 마법진을 새겼다는 것. 그리고… 힘을 주입하는 것과 마법진을 새기는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겪었으리라는 것.”

“모두 사실입니다.”

“대체 어쩌다가?”

“제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고 해 두지요.”

“…그렇군요.”

카스텔을 진찰한 세네카는 한참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분을 처음 보는 건 아닙니다. 과거 몇몇 동족이 비슷한 일을 겪기도 했고,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스스로 그런 일을 한 자도 있었지요.”

“…….”

“당신의 강대한 힘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닙니다. 기적과도 같은 우연이 겹쳐진 결과물에 가깝지요. 덕분에 큰 무리 없이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큰 상처를 입고 중독까지 당한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지며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저를 진찰한 의사나 마법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을 방법은 있습니까?”

“일반적인 경우라면 제가 손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니까…….”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한 세네카 대신 카스텔이 말했다.

“이미 인간의 육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깝다고요?”

“…….”

“제 몸이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겪은 고통에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절 이렇게 만든 자들은 모두 대가를 치렀으니까요.”

“…그렇습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제 몸이 나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예전의 강함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카스텔의 질문을 받은 세네카가 단호히 말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어떤 방법이든 각오하고 있습니다.”

“음…….”

세네카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절 고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까?”

“당신을 고칠 수 있다, 혹은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몸은 특별합니다. 당신의 몸을 고치려면 많은 연구와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지금의 제게는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카스텔도 이런 상황에서 세네카를 탓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세네카는 카멜 산의 대족장이며, 율렌 섬 이종족의 대표가 아닌가.

그런 그가 카스텔이라는 개인을 위해서만 행동할 수는 없다.

“사울 전하의 낯을 보아 지금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 드리겠습니다.”

세네카는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잖아 한 장의 문서를 완성한 세네카가 말했다.

“이 처방을 한 번 써 보십시오.”

문서를 받은 카스텔은 꼼꼼히 내용을 살폈다.

실력에 비해 이론적인 지식이 부족한 카스텔도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마법에 관련된 약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 약이 당신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 겁니다.”

“고통을 덜어 준다면…….”

“지금 당신은 종종 발작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의 몸은 보통 인간과 다릅니다. 보통 인간의 몸에 피가 흐르며 생명을 만든다면, 당신의 몸은 마나가 흐르며 생명을 만든다고 할까요? 본래 당신의 몸은 ‘마나가 흐르며 생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그 과정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몸속 마나의 흐름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약을 쓰면 발작은 멈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 처방이 효과가 없더라도 당신의 몸이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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