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이히힝!”
이 지역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희미한 독 기운을 감지한 것인지 말들이 울고 날뛰기 시작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더 이상 마차가 들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럼 내리지요.”
아무래도 더 이상 말을 타고는 진입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사울은 일행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바깥 공기를 쐬니 마차 안에서도 느껴지던 심상찮은 분위기가 더욱 강해졌다.
“공기 냄새부터가 달라.”
시체를 태우는 연기를 맡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나쁜 건 물론 건강에 해로울 것 같은 냄새였다.
잠시 냄새를 맡았을 뿐인데 머리까지 아파 오는 게, 나무가 독기를 내뿜는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다행히 장기간 머무르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지만, 하루 이틀 머무르는 것으로는 치명적이지 않다고 들었다.
가능한 빨리 조사를 마치고 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 모두들 진형을 갖추고 움직이지.”
“네, 전하.”
왕국 측 병력에 명령을 내린 사울은 카멜 산의 병력을 이끌던 모데아에게도 말했다.
“함부로 흩어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모두들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이도록 해요. 몬스터 같은 게 나와도 전력을 다해 맞설 수 있도록.”
“네, 전하.”
가능한 피를 보지 않아야 한다고 세네카가 신신당부를 했다.
모데아 역시 세네카의 충신답게 행동했다.
그렇게 사울을 중심으로 한 왕국군과 모데아를 중심으로 한 카멜 산의 병력이 한 부대가 되어 조사를 시작했다.
데이빗이나 사울의 수행원처럼 비전투원은 숲 입구에 약간의 호위를 붙여 남겨 두었다.
“…….”
병력 사이에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적대 관계는 아니지만 복잡 미묘한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의 관계 탓이었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고, 아래에서 그에 화답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옴에도 묘하게 조용했다.
극적인 계기가 없는 한, 다르센 왕국 병력과 카멜 산 병력이 친해지는 건 어려울 듯 했다.
다행히 양측 모두 불협화음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서로 불편한 감정은 있어도 당면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전념했다.
“이런 지형이 계속 이어지는 건가요?”
사울의 질문에 모데아가 대답했다.
“네, 전하. 상당히 넓은 평원 전체에 저 회색 나무가 뒤덮여 있습니다.”
“우리가 찾는 오스펠이라는 드워프도 이곳에 머물렀고요.”
“그렇습니다.”
“정말 이곳이 독기를 뿜어내는 나무만 있는 곳이라면, 쓸모가 있어서 머무르기 보다는 은신처가 필요해서 잠시 머무른 것이겠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당시 오스펠은 정예군에게 쫓기고 있었기에 당장 숨을 곳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겠지요.”
“그리고 결국 그를 잡는 데는 실패했고요?”
“네. 위험한 곳이라 아군은 철수했고, 오스펠은 한동안 머무르다 빠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오스펠이 일당과 함께 회색 공원에 머무르는 것과 빠져나가는 것을 본 자는 없다.
하지만 이후 오스펠 일당의 행적이 목격된 적 있기에 한동안 회색 공원에서 은신하다가 빠져나갔다는 게 정설로 굳어졌다.
이 점이 카멜 산에서 굳이 무리하여 회색 공원을 조사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가 은신처로 쓰는 곳이라기보다는, 도망 중 어쩔 수 없이 들른 곳이니까.
이 정보는 사울도 카멜 산에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오스펠이 작정하고 만든 은신처가 아니라 우연히 들른 곳.
그렇다면 힘들게 조사해도 별다른 정보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무언가를 찾아낼 가능성도 있다.
아직 ‘피닉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지 않은가.
사소한 것이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정말 지독한 공기군.’
공기에 독기가 서린 탓일까.
웬만한 악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이 숲의 악취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당장 몸이 크게 나빠지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아프고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사울이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자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냉철한 아르멜도 사소한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다소 지친 기색의 아이나와 모데아, 그리고 다른 자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건 카스텔이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걷는 그녀는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역시 몸이 보통 사람과 달라서인가.’
확실히 이럴 때는 카스텔만큼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없다.
그리고 카스텔은 다시금 진가를 보여 주었다.
“전하. 무언가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몬스터인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데 마나에 민감한 카스텔이 먼저 느꼈다.
마나를 다루거나 관련 있는 몬스터라는 뜻이다.
곧 사울은 모두에게 명령했다.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다가오는 것 같다. 경계하도록.”
정체불명의 몬스터는 오래잖아 드러났다.
“저건……!”
“구울이다!”
카멜 산의 병사들이 외쳤다.
구울.
한마디로 살아 있는 시체다.
시체를 마법으로 되살리면 ‘좀비’라 불렀고, 마법이 아닌 이유로 되살아난 시체는 ‘구울’이라 불렀다.
좀비보다는 구울이 흔했다.
좀비나 스켈레톤 같은 언데드 몬스터를 인공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이유 불문 즉결 처형이었다.
이렇게 수백 년 간 엄격히 단속한 덕분에 율렌 섬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좀비나 스켈레톤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울은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마나의 흐름이 부자연스럽거나, 시체에 남은 영혼의 힘이 마나와 반응할 때 자연적으로 구울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 눈앞의 구울 무리도 그렇게 생겨난 자들이다.
쥐 같은 작은 들짐승부터 커다란 늑대까지 수십은 되는 짐승 시체들이 되살아난 것이다.
“전투 준비!”
사울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어 모데아도 외쳤다.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공격하라!”
되살아난 시체와는 대화도, 타협도 통하지 않는다.
유일한 해결책은 안식을 주는 것 뿐.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니,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희생자를 내지 않기 위해 사울의 특명을 받은 카스텔이 움직였다.
카스텔이 맨 앞에 서자 구울 무리들이 그런 카스텔을 노리고 달려왔다.
카스텔이 양손을 펼쳤다.
왼손에는 검푸른 마나의 기운이, 오른손에는 이글거리는 불길이 피어올랐다.
어느 쪽이든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마법이었다.
빠르게 마법 준비를 마친 카스텔이 손을 휘둘렀다.
먼저 검푸른 마나의 기운이 날카로운 화살과 창이 되어 구울을 덮쳤다.
촉수처럼 뻗어 나간 마나가 적들을 베고 꿰뚫었다.
단 한 방에 절반 가까운 구울 무리가 쓰러졌다.
이어 카스텔은 불길이 피어오르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자그마한 불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번지며 남은 구울 무리를 덮쳤다.
단 두 번의 손짓으로 구울 무리를 거의 전멸시킨 카스텔이 말했다.
“거의 끝났습니다.”
남은 건 마무리뿐이라는 말이다.
마무리를 맡은 건 카멜 산 쪽이었다.
카멜 산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모데아가 나섰다.
모데아는 도끼를 들고 몇 남지 않은 구울 무리에게 다가갔다.
구울 무리 대부분이 죽거나 재기 불능이 되었지만, 멀쩡한 것들도 몇 있었다.
멀쩡한 구울은 다가오는 모데아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모데아도 그에 맞서 자신의 키만 한 도끼를 휘둘렀다.
그의 도끼는 달려오는 구울의 머리통을 쪼개지 않고 구울 앞의 맨땅에 꽂혔다.
실수한 게 아니다.
도끼가 땅에 박힌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도끼가 박힌 곳을 중심으로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도끼 주인인 모데아는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달려오던 구울 무리만이 폭발의 영향을 받았다.
폭발과 가까이 있던 구울은 충격에 날아가거나 쓰러졌고, 조금 멀리 있던 구울은 비틀거렸다.
도끼질 한 번으로 구울의 기세를 꺾은 모데아는 마무리를 지었다.
이번에는 땅이 아닌 구울을 쪼개며 마지막 남은 한 마리까지 살려 두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실력이군.”
곁에 있던 아이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입니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에요.”
대답과 함께 아이나는 자신이 쥐고 있던 도끼를 힐끗 바라보았다.
사울은 아이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갔다.
자신처럼 도끼를 쓰는 모데아와 스스로의 실력을 저울질해 본 것이리라.
사울이 보기에 모데아의 실력은 아이나보다 몇 수 위였다.
단 한 번의 큰 기술과 일방적인 학살만 구경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나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역시 세상은 넓군요.”
아이나의 분한 목소리에 사울은 위로를 해 주었다.
“그대나 나나 아직 배울 게 많으니까요. 분명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예요.”
절반은 아이나에게, 나머지 절반은 자신에게 한 말이다.
모데아에 앞서 다시 본 카스텔의 실력은 확실히 아직 자신이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실감케 해 주었으니까.
정말 카스텔만큼 강해질 수 있을까.
어렵다면 평범하게 무술이나 마법을 익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잡생각을 오래 할 만큼 여유롭지 않다.
사울은 감상을 떨쳐 내고 활약한 자들을 치하했다.
“모두들 수고했어요.”
사울의 치하에 카스텔은 고개를 숙였고, 모데아는 그런 카스텔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방금 전 아이나가 모데아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었다.
아이나가 느낀 감정을 모데아 역시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카멜 산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일 모데아에게도 카스텔은 어마어마한 강자로 보이는 것이다.
사울이 그러하듯, 모데아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내팽개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전하. 좀 더 조사를 해 보시지요.”
“그래야지요. 이 정도면 큰 문제는 없을 테니까.”
다시 진군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습격 이후에는 한동안 조용했다.
때때로 몬스터나 짐승 무리가 얼쩡거리기는 했지만, 구울처럼 공격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울이 이끄는 부대가 강적이라는 것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제법 많이 걸은 것 같음에도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황량한 평원에 드문드문 회색 나무가 서 있었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악취도 계속되었다.
‘분명 이곳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는 건 좋지 않다고 했지.’
하루 이상 머무르면 이후 치료를 받아도 후유증이 남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무언가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있다면 다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보장이 없다면, 오래 머무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몇 시간 정도 더 돌아보고, 성과가 없으면 철수하도록 해요.”
사울의 말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독기가 퍼진 곳에 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는 인간이나 이종족은 없었으니까.
이후 한 시간 정도를 더 이동했다.
주변을 꼼꼼히 살피느라 이동 속도는 빠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회색 공원에 들어온 뒤 꽤 많이 움직였다.
하지만 찾은 것이라고는 구울이나 들짐승, 몬스터가 전부였다.
슬슬 허탕이라는 생각이 들 때였다.
“전하.”
카스텔이 사울을 불렀다.
“또 몬스터인가요?”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다르다고요?”
“저쪽에 마나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몬스터라기보다는 지역 자체에 마나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특정 지역에 마나가 짙게 흐르는 건 여러 이유가 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마법 실험이나 마법 시설을 지은 결과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라면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후자라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이런 곳에 ‘마법 실험’이나 ‘마법 시설’을 지을 만한 자가 오스펠 말고 누가 있겠는가.
“그럼 그쪽으로 가보지요.”
모두들 카스텔이 점찍은 방향으로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도 카스텔이 느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마나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자연적인 게 아니라 인공적인 것이라면…….”
오래잖아 사울과 카스텔은 마나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