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도끼 대신 석궁을 든 모데아는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다.
시위 소리가 울릴 때마다 칼날 골렘의 몸에 박힌 화살이 늘어 갔다.
거기에다 아이나와 아르멜, 다른 자들의 공격도 이어졌다.
마침내 칼날 골렘이 휘청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골렘을 적당히 상대하며 틈을 노린 사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마침 발리스타 골렘은 사격에 실패한 참이다.
칼날 골렘은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이야 말로 움직일 때다.
사울은 만일을 대비해 마법을 준비하며 곧바로 카스텔에게 달려갔다.
“전하? 위험합니다!”
적극적인 사울의 움직임에 놀라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걱정하는 일행을 뒤로하고 카스텔에게 다가갔다.
발작의 고통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고 있던 카스텔은 그런 사울의 모습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아무래도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울은 그런 카스텔의 손을 붙잡았다.
보기 좋게 업거나 안고 이동할 겨를은 없다.
사울은 한 손으로는 카스텔의 손을, 다른 손으로는 마법 검을 쥔 채 전력으로 이동했다.
그때 발리스타 골렘이 카스텔을 겨냥했다.
카스텔은 물론 사울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전…하!”
카스텔이 사울에게 위기를 알렸다.
다행히 사울은 상황을 알고 있었다.
사울이 쥔 마법 검이 빛났다.
“토네이도!”
사울의 외침과 함께 동시에 사울과 카스텔, 발리스타 골렘 사이에 작은 회오리가 몰아쳤다.
말이 작은 회오리지, 사람 한두 명은 가볍게 날려 보낼 수 있을 소용돌이.
마법으로 작지만 강력한 회오리를 만들어 적을 휩쓸어 버리거나 적의 공격을 막는 ‘토네이도’ 주문이다.
토네이도는 특히 화살 등 투사체를 막아 내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는 마법이었다.
아무리 빠르고 강한 화살이라도 회오리에 휩쓸리면 힘을 잃거나 엉뚱한 데 날아갈 수밖에 없다.
발리스타 골렘의 쇳덩이도 마찬가지였다.
사울과 카스텔을 노리고 발사된 쇳덩이는 위력도 강력했고, 조준도 정확했지만 한 발 앞서 생겨난 회오리 앞에서 힘을 잃었다.
무엇이든 박살 낼 기세로 날아오던 쇳덩이는 회오리 속에서 힘을 잃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때.
뒤늦게 몸을 추스른 칼날 골렘이 사울과 카스텔은 노렸다.
사울이나 카스텔이나 몸이 자유롭지 않았기에 공격을 당했다면 위태로울 상황이었다.
깡-
이번에는 일행들이 사울과 카스텔을 지켜 주었다.
모데아가 석궁으로 칼날 골렘의 시선을 끌 동안 아이나는 적들에게 다가가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칼날 골렘은 아이나를 노리곤 칼날을 휘둘렀다.
그때 다시 모데아와 일행들이 골렘을 공격하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일행들의 협공 덕분에 사울과 카스텔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전하…….”
카스텔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울은 긴말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몸을 추슬러요.”
사울은 아군에게 카스텔을 맡긴 뒤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
코앞에서 카스텔을 빼앗긴 두 골렘은 목표를 잃은 탓인지 혼란에 빠졌다.
새로운 목표를 잡기 보다는 마구잡이로 모두를 상대하려 했다.
그 결과 누구도 효과적으로 상대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사울이 명령을 내렸다.
“지금이다! 놈들을 몰아붙여!”
시간을 끌면 두 골렘 모두 혼란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 전에 혼란에 빠진 놈들을 한 놈이라도, 가능하면 둘 다 잡는 게 최선이다.
먼저 목표가 된 것은 끝없이 칼날을 휘두르는 칼날 골렘이 아닌 발리스타 골렘이었다.
지켜 주는 골렘이 있다면 위협적이지만, 지켜 주는 역할을 하던 칼날 골렘이 혼란에 빠진 지금은 크게 위협적이지 않다.
모두들 그 사실을 깨닫고는 발리스타 골렘에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이어지는 공격 속에 발리스타 골렘의 몸이 점점 깨져 나갔다.
몸이 깨지는 속도가 복구되는 속도를 뛰어넘었을 때 마침내 핵의 위치가 드러났다.
“저기다!”
“오른쪽이야!”
오른쪽 복부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핵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라면 콩팥이 있는 부위다.
조금만 있으면 두 골렘 모두 혼란에서 벗어날 것이다.
사울은 마법 검을 뻗으며 외쳤다.
“에어 블레이드!”
날카로운 칼날, 아니 송곳처럼 하나의 점으로 뭉쳐진 바람의 힘이 발리스타 골렘의 핵을 노렸다.
쨍그랑.
어마어마하게 큰 유리구슬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발리스타 골렘의 몸이 굳었다.
끈 떨어진 꼭두각시처럼 손끝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굳은 채 천천히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에 은은히 흐르던 마법의 기운도 사라졌다.
완벽하게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칼날 골렘뿐이다.
동료를 잃은 탓인지 칼날 골렘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미친 듯 칼날을 휘두르며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놈이 미쳤다!”
“물러나라!”
땅을 쿵쿵 울리며 미쳐 날뛰는 칼날 골렘의 기세에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에어 블레이드!”
사울은 다시 한번 에어 블레이드를 시전했다.
칼날 골렘의 몸 곳곳에 구멍이 뚫렸지만, 이번에는 핵의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젠장, 대체 어디지?’
미쳐 날뛰는 칼날 골렘을 두고 갈 수도 없다.
하지만 달려들어 처리하기엔 너무나 위험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바로 그때.
사울은 어마어마한 마법의 기운을 느꼈다.
그 마법의 근원은 바로…….
“저, 저건?”
놀란 사람들의 시선 끝에 있는 건 카스텔이었다.
어마어마한 마나의 힘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카스텔이 손을 뻗었다.
카스텔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마나는 두 가닥의 채찍처럼 칼날 골렘을 덮쳤다.
그 중 한 가닥이 칼날 골렘의 몸을 휘감았다.
물론 칼날 골렘도 가만있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고 칼날을 휘둘러 마나의 채찍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날뛰는 칼날 골렘보다 카스텔의 마법이 더 강했다.
그렇게 채찍이 골렘을 휘감은 가운데, 또 한 가닥의 채찍이 골렘을 덮쳤다.
아니, 채찍이라기보다는 끝이 날카로운 창이었다.
마법의 창은 먹이를 덮치는 뱀처럼 골렘을 찌르기 시작했다.
몇 군데나 찔린 골렘이 비틀거렸고, 마법의 창은 아래로 내려갔다.
창이 향한 곳은 골렘의 왼쪽 발이었다.
창이 발을 관통했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쨍그랑.
조금 전 들었던 골렘의 핵이 깨지는 소리였다.
당연히 몸이나 머리에 있을 줄 알았던 칼날 골렘의 핵이 발에 있었던 것이다.
“…….”
조금 전 발리스타 골렘처럼 칼날 골렘도 침묵 속에 허물어졌다.
그렇게 두 골렘은 파괴되었다.
두 골렘의 최후를 확인한 사울은 카스텔에게 달려갔다.
카스텔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선생님.”
사울을 올려다본 카스텔이 말했다.
“한 번의 기회를 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카스텔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직 발작이 남아 있어 지금의 막강한 공격을 오랫동안 지속하기 힘들었고, 상황을 관망하며 골렘의 약점을 찾은 뒤 단숨에 끝을 냈다는 것이다.
마나를 느끼는 데 누구보다 민감한 카스텔이라 어떻게든 핵을 찾아냈을 테고.
왜 진작 나서지 않았느냐고 탓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왜 무리했냐고 탓할 수도 없다.
덕분에 큰 문제없이 전투를 마무리 지었으니까.
사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수고했어요.”
카스텔이 작게 미소 지었다.
“몸은 괜찮아요?”
“오늘은 제가 죽을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더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으니 몸조리 잘하세요.”
“네. 전하.”
모데아가 사울과 카스텔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카스텔 님.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전투가 크게 힘들어질 뻔 했습니다.”
“나도 고마워요. 나도, 선생님도 큰 도움을 받았어요.”
“카스텔 님은 괜찮으십니까?”
“더 무리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역시 더 이상 진군하는 건 어렵겠군요.”
“그게 좋겠어요. 건진 것도 있으니.”
사울은 두 골렘 쪽을 돌아보았다.
카멜 산의 이종족이 골렘의 파편과 무기를 조사하는 광경이 보였다.
“저 골렘은 오스펠이 만든 것일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오스펠은 마법과 기계 기술 모두에 능숙한 자였습니다. 마법으로 만든 골렘에 튼튼한 칼날을 부착하거나 병기를 장착해 더 강하게 만들다니… 오스펠이 할 만한 일입니다.”
“칼날은 그렇다 쳐도 발리스타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골렘에 공성 병기를 부착해 스스로 움직이는 공성 병기로 삼을 줄이야.”
골렘도, 골렘의 발리스타도, 모데아의 석궁까지 하나같이 인상적이었다.
전부 왕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나는 당분간 대신전에서 머무를 거예요. 그러니 골렘 잔해의 절반은 우리가, 나머지는 당신들이 가져가서 각각 조사를 하도록 하지요.”
사울의 제안에 모데아가 멈칫했다.
사울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사울과 카스텔이 아니었다면 동족의 피를 많이 보았을지 모른다.
반대할 만한 명분은 없다.
그럼에도 모데아는 무리해서 다른 의견을 냈다.
“저 골렘은 저희가 가져가고 차후 정보를 알려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전하께 지나친 수고를 끼쳐 드릴 수는…….”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바마마도 나도 카멜 산과의 우정을 깨는 건 원치 않으니까. 무엇을 알아내든 대족장님과 꼭 의논을 할 테니까요.”
한 발 앞선 사울의 말에 모데아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에 세네카가 있다면 모를까, 모데아로서는 명분도 없이 사울의 말을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고마워요.”
합의를 끝낸 사울은 골렘의 잔해가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골렘의 몸, 골렘의 핵, 골렘의 무기가 각각 분리되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골렘의 핵은 보통 수정으로 만들어진다.
마법으로 강화된 수정이 골렘 몸 어딘가에 박힌 채 심장 노릇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깨진 골렘의 핵은 수정 혹은 유리 조각 같았다.
언뜻 보면 별 가치 없는 조각처럼 보이겠지만, 희미한 마법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어 사울은 골렘의 무기를 살펴보았다.
발리스타 골렘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발리스타.
칼날 골렘이 휘두르던 두 칼날.
골렘이 죽을 때 영향을 받은 듯 몇 조각으로 부서졌지만 산산조각이 난 골렘 몸뚱이나 핵보다는 상태가 온전했다.
비교적 온전한 무기들은 다시 봐도 범상치 않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칼날은 보통 인간이 휘두르는 검보다 두 배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면서도 굉장히 단단하고 또 예리했다.
발리스타 역시 마법과는 별개로 기계적인 완성도가 뛰어났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몸체에 곳곳에 박힌 톱니바퀴까지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였다.
‘오스펠이 버리고 간 물건이 이 정도였어. 버린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 만든 물건이라면…….’
오스펠.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살아 있다면 반드시 잡아야 할 위험한 자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생각하던 사울은 문득 두통이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다 기침까지 점점 심해졌다.
사울만 겪는 현상은 아니다.
곳곳에 기침을 하거나 머리를 부여잡는 자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더 이상 머무르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게 좋겠어요.”
사울과 모데아는 각각 부대를 이끌고 검은 공원에서 빠져나갈 길을 잡았다.
* * *
격렬한 전투 때문에 예정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사울이 검은 공원을 빠져나온 건 해가 떨어지고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다행히 길을 잃지는 않았고, 또 다른 습격도 겪지 않았다.
무사히 빠져나온 사울은 천막에서 보고를 받았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 전하.”
“저쪽도 마찬가지지?”
“물론입니다.”
“좋아. 대족장도 뭐라 하지는 않겠지.”
피해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사울 본인도 싸울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니까.
거기에다 하루 종일 독기를 쐰 탓인지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적절히 치료를 받으면 후유증 없이 나을 수 있지만, 며칠은 몸이 정상이 아닐 것이라던가.
“특별히 보고할 게 없으면 그만 돌아가도 좋아.”
“네, 전하. 그럼.”
아르멜이 돌아가고 사울은 가벼운 휴식을 취하려 했다.
또 다른 방문자만 아니었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