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보고 있던 집사가 숨을 멈췄다.
예의 모르는 놈이나 정신 나간 놈들이라면 수없이 봐 왔지만, 이런 미치광이는 처음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안소니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둘 모두 죽였다는 말이지.”
“네, 백작님.”
“이미 죽었다면 할 수 없지. 시체는 확실히 처리했지?”
“걱정 마십시오, 저는 그쪽도 전문가입니다.”
“알았다, 정 네 뜻이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붙여 주지. 몰래 너를 감시하는 게 싫다면 당당히 그의 감시를 받으면 되겠지. 이제 만족하나?”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킬리안은 몇 장의 문서를 내밀었다.
보고 있던 집사가 냉큼 문서를 받아 들고 확인했다.
“백작님, 이건…….”
“가져와라.”
백작은 킬리안이 가져온 문서를 확인했다.
꽤 잘 정리된 문서는 킬리안이 누구를 어떻게 죽였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였다.
“누굴 제거한 뒤 보고서를 받는 건 처음이군.”
“일을 단축시키려고요. 문서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안소니는 대답 대신 문서에 불을 붙였다.
책상에서 타오르는 촛불을 쓴 것도, 벽난로에 던져 넣은 것도 아니다.
그저 손을 쥐었을 뿐인데 불꽃이 피어올라 한순간에 문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종이 몇 장을 태우는 건 대단한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킬리안은 백작의 솜씨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빠르고 정교하게 마력을 조율하여 종이만을 태운 솜씨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껏 죽인 백작 부하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자가 아닐까.
그렇게 문서를 잿더미로 만든 안소니가 말했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다, 킬리안.”
안소니는 킬리안이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누굴 죽이라는 명령 같은 건 문서로 남기지 않는 편이다.
이런 문서를 작성하고 남기는 것 자체가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
안소니가 볼 때 킬리안의 이 행동은 자신을 ‘감시’한 데 대한 자그마한 복수였다.
부하 노릇은 해 주겠지만 함부로 건드리면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참으로 불손한 태도지만, 안소니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킬리안 역시 아랫사람답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태도는 정중했지만, 겁을 먹은 건 아니다.
오히려 조롱을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안소니는 다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지만, 참기로 했다.
행동거지는 기분 나쁘지만, 분명 솜씨는 쓸 만했으니까.
킬리안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정적을 열 명도 넘게 처리했다.
왕국 어디에서도 이 정도의 인간 백정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 용무가 없으면 이만…….”
킬리안을 물리려던 백작은 바깥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말을 멈췄다.
“백작님.”
들어온 건 백작가의 시녀였다.
입도 무겁고 믿을 수 있는 시녀로서, 킬리안이 백작가에 드나든다는 것을 잘 아는 극소수의 인물이었다.
“무슨 일인가? 지금 백작님이 누굴 만나고 계시는 지 잘 알지 않은가?”
집사의 타박에 시녀가 황망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시녀의 속삭임을 들은 집사는 크게 놀랐다.
집사는 백작에게 작게 속삭였고, 백작 역시 놀랐다.
“사실인가?”
“네, 백작님.”
“아무런 언질을 들은 바 없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그 무례한 자들이 약속도 없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킬리안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킬리안.”
“네, 백작님.”
“조용히 숨어 있어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르시아 남매가 찾아왔다.”
안소니의 말에 킬리안은 물론, 말 한마디 안 하고 있던 칼립소까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가르시아 남매.
가멜다 왕국의 구국 영웅이자 카스텔을 이긴 자들이 아닌가.
“가르시아 남매와 약속도 없이 만날 만큼 친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
안소니는 대답 대신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킬리안은 일이 어찌 돌아가는 지 대강 눈치 챘다.
가르시아 남매는 분명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그리고 안소니는 그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만남을 거절할 처지가 못 된다.
냉철한 안소니마저도 당장 불편함을 감추지 못할 만큼 그 가르시아 남매를 마뜩잖아 한다.
‘흥미롭군.’
상대가 가르시아 남매라면 킬리안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가르시아 남매가 마음만 먹으면 오늘이 킬리안의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안소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완벽하게 꾸며진 미소와 함께 저택 응접실로 향했다.
저택 응접실에 앉아 있는 건 정말 가르시아 남매였다.
마검사 베일 가르시아와 마궁수 마리안 가르시아.
검과 활로 가멜다 왕국을 구한 구국 영웅.
그리고 가멜다 왕국 상당수의 귀족들이 누구보다 두려워하고 또 혐오하는 존재.
안소니는 꾸며 낸 미소를 유지하며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안소니의 정중한 인사에 베일과 마리안도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백작님.”
현재 베일과 마리안이 가진 작위는 자작.
안소니에 비해 작위가 낮은 것은 물론 나이도 적다.
보통 안소니는 자신보다 작위와 나이가 적은 자들은 하대했다.
무례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
가멜다 왕국은 특히 귀족 간의 우열을 따지는 데 엄격했다.
하지만 눈앞의 가르시아 남매는 예외였다.
백작은 물론 후작이나 공작도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졌고, 엄청난 공을 세웠으며,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으니까.
지금껏 가르시아 남매가 열 명도 넘는 가멜다 왕국 귀족을 살해했음에도 무사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본인들의 무력, 또 하나는 구국 영웅이라는 점. 마지막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
가멜다 왕국이 다르센 왕국에 비해 왕실의 권력이 약하다지만, 어떤 귀족도 ‘왕실이 감싸는 구국 영웅’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이번 가르시아 남매의 방문은 안소니도 예상치 못했다.
안소니는 가르시아 남매의 적도, 아군도 아니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혹은 적도 아닌데 예고도 없이 방문을 한다?
무언가 목적이 있을 게 분명했다.
일단 안소니는 내색하지 않고 두 사람을 대접했다.
다과를 대접받은 가르시아 남매는 잠시 말없이 차와 과자를 즐겼다.
그러다 남매 중 동생인 베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작님.”
“네.”
“사실 백작님을 뵙기 전 흥미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이라고요?”
“네, 사실 저와 누님은 조금 일찍 이 저택에 도착했습니다. 괜스레 시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최대한 기척은 감추고 조용히 찾아왔지요.”
“그런데요?”
“우리에 앞서 방문한 손님이 있는 것 같더군요, 상당한 실력을 가진 두 명이.”
베일의 말에 안소니는 적잖이 놀랐다.
분명 킬리안과 그가 데려온 칼립소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자신들의 존재는 철저히 숨긴 채, 킬리안과 칼립소의 존재를 눈치채고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설마 둘의 정체까지 알아낸 것일까.
“내 부하들을 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상당히 실력 있는 부하를 두셨군요.”
“그렇게 되었소. 중앙 정계는 항상 시끄럽고 실력 있는 부하는 많을수록 좋으니.”
베일과 마리안이 킬리안 비셔스를 알아보았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그 점을 이용하여 안소니까지 쥐락펴락하려 들 것이다.
안소니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마리안도 입을 열었다.
“백작님 말씀대로 중앙 정계는 시끄러운 곳이지요. 웬만하면 얼씬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요. ”
마리안의 말에 안소니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얼씬하고 싶지 않다고? 못 하는 것이지. 왕국의 귀족 절반이 너희들을 죽이고 싶어하니.’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녀석들을 상대로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도, 겉으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는 건 정치가의 기본이다.
안소니는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용무로 날 찾아온 거요?”
“네, 실은 두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 봅시다.”
“첫 번째 부탁은 제 동생이 말한 두 실력자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것이에요.”
“……!”
안소니는 하마터면 평정을 잃을 뻔 했다.
킬리안 비셔스와 그 부하를 구국 영웅이자 귀족 학살자로 불리는 가르시아 남매에게 보여 준다?
누가 봐도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제 부하들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소?”
“특별한 용무는 없어요. 그저 호기심일 뿐.”
“그렇다면 거절하겠소.”
“거절하신다고요?”
“내 부하들을 그대들에게 보여 줄 이유가 없으니.”
안소니의 말에 마리안도, 베일도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아는 듯한 미소가 적잖이 신경 쓰였다.
다시 베일이 말했다.
“백작님,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나 누님이나 백작님이 누굴 부하로 두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율렌 섬 최악의 범죄자라 해도 말입니다.”
“!!!”
“비밀은 지켜드리지요, 백작님은 우리 남매의 적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백작님이 저희 부탁을 거절한다면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의 비밀을 지킬 이유는 없지 않을까요?”
“…….”
대체 무엇을, 어디까지 아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건 아니라는 점이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말 가르시아 남매가 킬리안 비셔스를 알아본 것일 수도 있다.
‘저들이 킬리안 일로 날 쳐 낼 생각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안소니는 가르시아 남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안소니는 집사에게 귓속말로 명령을 했고, 곧 집사는 두 명을 데리고 왔다.
“데려 왔습니다, 백작님.”
명령대로 집사는 킬리안과 칼립소를 데려왔다.
둘 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말이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본 마리안이 피식 웃었다.
“어라, 이상하군요. 제가 보았을 때는 둘 다 얼굴을 드러냈던 것 같은데.”
마리안의 속내를 대충 짐작한 안소니가 모른 척 대답했다.
“그럴 리가. 이들은 큰 화상을 입어 항상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그런가요?”
마리안, 그리고 베일은 얼굴을 가린 채 불려 온 킬리안과 칼립소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둘 다 상당한 실력자로군.”
베일의 평가에 마리안도 동의했다.
“맞아, 이 정도면 왕국 군부에서도 한자리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특히 저 남자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범죄자가 아니라면 왕실에서도 탐을 낼만한 인재일 거야.”
베일과 마리안은 킬리안의 정체를 아는지 모르는 지 애매모호한 소리만 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본 안소니는 확신했다.
가르시아 남매는 킬리안의 정체를 눈치챘고, 그것을 이용하려 함을.
‘정말 운이 나쁘군. 하지만…….’
터무니없는 불운이다.
하필 오늘 킬리안이 찾아오고, 또 연락도 없이 가르시아 남매가 찾아올 줄이야.
정말 가르시아 남매가 킬리안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면 이미 약점이 잡힌 셈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가르시아 남매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 저들은 친구도 아니지만 적도 아니다.
최소한 적에게 약점을 잡힌 것 보다는 낫다.
문제는 킬리안이었다.
킬리안과 칼립소는 자신들을 관찰하는 가르시아 남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려올 때 얼굴을 가리고 가능한 입을 다물 것을 주문한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정체가 드러나면 누구보다 곤란한 건 킬리안이니까.
그러다 문득 마리안이 킬리안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상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킬리안을 빤히 바라보다 이어 칼립소 역시 코앞에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보고 있던 베일이 한마디 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우리와 친하게 지내게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아니, 사람은 한 명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