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잠시 후.
무너진 폐허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거미였다.
조금 전 원정대가 상대했던 거미와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구체의 몸에 긴 다리 여덟 개가 달린 건 조금 전 상대한 거미와 흡사했다.
하지만 조금 전 거미들이 매끈한 금속 같은 몸을 가진 것과는 달리 돌과 흙 등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괴상한 몸을 가졌다.
게다가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조금 전 거미들이 사람만 하다면 지금 나타난 거미는 구체의 몸뚱이만 사람의 몇 배는 되었으니까.
또 여덟 개의 다리 하나하나가 사람 키의 열 배는 되어 보일 만큼 길었다.
“저, 저게 뭐야?”
“괴물이다!”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는 물론, 막대한 마나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저건……!”
사울은 거대 거미의 몸뚱이에 솟아오른 형상을 놓치지 않았다.
지하에서 본 검은 받침대였다.
지하에서 본 것처럼 검은 받침대 위의 하얀 빛 덩어리도 건재했다.
저 막강한 마나의 에너지가 유적 주변에 마나의 기운을 흘리고 나아가 저 괴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보였다.
깨닫고 보니 움직인 건 거대 거미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 몬스터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기어 다니는 놈, 걸어 다니는 놈, 날아다니는 놈.
여러 종류의 동물을 닮은 마법 몬스터들이 여러 형태로 움직이며 원정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유적이 다 파괴되었는데도 우릴 공격하려는 것인가?’
고대 유적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이 때문에 종종 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침입자를 퇴치하기 위한 함정이 작동하여 유적 자체가 완전히 파괴된 사건.
이미 폐허가 된 유적을 지키던 마법 몬스터가 난동을 부려 마을을 파괴한 사건.
사전에서 이런 사건들을 찾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금 전 거미 떼가 나타난 것도, 지금 눈앞에 나타난 거대 거미도 마찬가지다.
고대 유적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와중에도 사울은 거대 거미 몸 꼭대기에 붙어 있는 마법 구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구체가 거대 거미를 움직이는 동력원일 것이다.
저렇게 거대한 괴물을 움직이게 만드는 마법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재능의 벽에 부딪친 자신이 더 강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결심한 사울은 명령했다.
“저 괴물을 잡는다.”
놀란 성기사가 반론했다.
“전하, 저 괴물과 싸우실 겁니까?”
“그래요. 괴물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미 움직이는 괴물을 놓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위험합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고 저 괴물이 우릴 놔준다는 보장은 없지요. 어쩌면 우릴 따라 대신전 까지 쫓아올 지도 모르고.”
사울의 말에 성기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법 몬스터는 살아 있는 생물보다 더 끈질긴 존재로 알려졌다.
짐승이나 살아 있는 몬스터는 적이나 먹잇감을 쫓다가 지치면 추격을 그만둔다.
하지만 마법 몬스터는 한번 적을 포착하면 자신이 파괴될 때까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적을 놓치면 목표를 잃고 폭주하는 괴물이 되어 파괴될 때까지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집채만 한 거대 거미가 후퇴하는 원정대를 끝까지 쫓아오거나 목표를 잃고 폭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언젠가 미개척지를 빠져나와 사람이나 이종족이 사는 마을을 파괴할지 모른다.
이미 마법 몬스터가 움직이고 목표를 포착한 이상, 저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곧 원정대는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사울 역시 전투 준비를 하면서도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희생은 가능한 피해야 한다.
희생이 나오는 건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성기사들 쪽에서 희생자가 나온다면, 그를 이유로 대신전 쪽에 지분을 나눠 줘야 할 수도 있다.
저 괴물과 싸워 이기면 무엇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가능한 독점하고 싶다.
그를 위해서라도 아니, 가능하면 희생을 내지 않아야 한다.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아르멘에게 말했다.
“선생님과 우리들이 저 거미를 맡고, 나머지는 다른 녀석들을 상대하도록 하지.”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저 집채만 한 괴물을 상대하신다면…….”
“우리들이 상대 못 한다면 모를까 상대할 수 있다면 굳이 희생자를 낼 필요는 없어.”
“알겠습니다.”
거대 거미와 다른 마법 몬스터들은 무작정 공격하는 대신 시간을 끌었다.
누가 적인지, 또 어떻게 공격할지 나름대로 계산을 하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원정대는 사울의 의견대로 진형을 짤 수 있었다.
사울과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등 실력자들은 거대 거미를, 나머지는 그 외의 마법 몬스터를 상대하기로 했다.
진형이 짜임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울은 먼저 거미를 유인하기로 했다.
저 거대한 거미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쪽을 노린다면 난장판이 되고 큰 피해가 발생할 게 뻔했다.
“선생님, 거미 유인 역할을 맡겨도 될까요?”
카스텔이 대답했다.
“일단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사울은 카스텔의 대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싸울 때만은 불분명한 말을 잘 하지 않는 카스텔이다.
그런데 ‘일단 해 보겠다’라니.
아무튼 카스텔이 앞장섰다.
때마침 거대 거미와 다른 마법 몬스터 무리가 함께 이쪽으로 움직이는 참이었다.
선두에 나선 카스텔이 마법을 시전했다.
불과 물.
두 개의 속성이 동시에 몰아쳐 거대 거미와 마법 몬스터를 덮쳤다.
강력한 마법에도 거대 거미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 몬스터들은 달랐다.
카스텔의 마법에 몇 마리가 부서지고, 나가떨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모든 몬스터들이 카스텔을 주시해야 한다.
그런데 몬스터들의 반응은 달랐다.
방금 전 자신들을 공격한 카스텔은 신경도 쓰지 않고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조금 전 카스텔이 한 말을 깨달았다.
‘일단 해 보겠다고 한 게 저런 이유였나…….’
조금 전에도 지금도 마법 몬스터는 카스텔을 무시했다.
지금으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카스텔이 워낙 강대한 존재인 탓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분명한 건 거대 거미도 다른 마법 몬스터도 카스텔을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즉 그녀에게 미끼 역할을 맡길 수는 없다.
전략 수정이 필요했다.
“전하, 우리가 괴물을 유인하고 카스텔 님이 공격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르멜의 말이 지금으로서는 정론이다.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함께 움직이지.”
“조심하십시오.”
사울 곁을 아이나와 아르멜이 가로막았다.
그리고 몇 명의 정예가 사울 곁에 섰다.
사울도 마법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호위 병력이 있지만, 저 집채만 한 괴물을 상대로 방심하는 건 무덤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아이나, 우리가 함께 공격해서 저 거미의 시선을 끌어요.”
“네, 전하.”
사울이 마법 검을 뻗었다.
작은 불덩어리 여러 개가 허공에 떠올라 거대 거미를 향해 날아갔다.
아이나도 쥐고 있던 도끼를 던졌다.
도끼와 불덩어리가 함께 날아가 거대 거미를 맞췄다.
목표가 큰 덕분에 모든 공격이 명중했다.
거대 거미의 몸에 생채기 하나 입히지 못했지만, 시선을 끄는 건 성공했다.
몇 번 공격을 받은 거대 거미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사울 쪽을 바라보았다.
“…….”
눈도 하다못해 머리도 없이 큰 구체 몸뚱이만 존재하는 거대 거미.
이 괴물이 사울을 감지하는 것인지 아이나나 다른 사람을 감지하는 것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다행히 거대 거미가 사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스텔과는 달리 사울이나 아이나의 유인책은 통하는 모양이었다.
보고 있던 카스텔도 가만있지 않았다.
카스텔이 짧게 주문을 외자 그녀의 양손에 긴 채찍이 만들어졌다.
가죽이나 사슬이 아닌 마나의 힘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마법 채찍이었다.
카스텔은 검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채찍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먼저 카스텔이 거대 거미의 한쪽 다리를 공격했다.
채찍이 몇 번 휘날리고, 거미 다리가 날아갔다.
이대로 몇 개의 다리만 날려버리면 거미는 말 그대로 팔다리가 모두 잘린 꼴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싱겁게 전투가 끝나는 듯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거대 거미는 지면을 빨아들여 다리를 재생시켰다.
지면의 흙과 돌이 거대 거미의 뼈와 살이 되어 순식간에 잘린 다리가 복구된 것이다.
그 광경을 본 사울도 적잖이 놀랐다.
처음 본 광경은 아니지만 저 집채만 한 괴물이 저런 재주를 보여 줄 줄이야.
얼빠진 채로 있을 시간은 없다.
사울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모두를 독려했다.
“모두 집중해라!”
카스텔에게 다리를 잘렸음에도 거대 거미는 여전히 카스텔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똑바로 사울 쪽으로 돌진해 왔다.
집채만 한 괴물과 정면에서 힘 싸움을 하는 건 바보짓이다.
일단 모두들 흩어져 몸을 피했다.
다리 한두 개 날리는 건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보통 이런 마법 몬스터를 상대하려면 약점을 찾아 공격해야 한다.
골렘을 파괴하려면 핵을 깨부수어야 하듯.
그렇다면 이 거대 거미의 약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몸 꼭대기에서 빛나는 빛 덩어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빛 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마나가 거대 거미, 나아가 다른 마법 몬스터를 움직이는 동력원인 것 같았으니까.
‘약점은 알았어. 문제는…….’
약점이 훤히 드러나 있지만, 집채만 한 크기의 거미 몸 꼭대기에 있어 접근하기 어렵다.
거기에 거미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에 약점을 노리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가만히 서서 심사숙고할 겨를도 없었다.
거대 거미가 계속 움직이며 사울 일행을 노렸으니까.
거미는 특정한 목표가 없는 듯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는데 때론 사울 본인이 목표가 되었고, 혹은 다른 사람이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번 공격이 오가자 마침내 피해가 발생했다.
“으아악!”
“젠장!”
거대 거미의 다리에 부딪친 성기사가 나동그라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곁에 있던 동료가 재빨리 부상을 입은 성기사를 챙겼다.
거대 거미의 후속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부딪친 성기사가 얼마나 부상을 입었는지, 목숨을 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카스텔이 다시 나섰다.
어느새 카스텔의 채찍은 두 가닥이 아닌, 몇 십 가닥으로 늘어나 있었다.
거대 거미의 후방을 잡은 카스텔이 채찍을 휘둘렀다.
수십 가닥의 채찍이 카스텔의 손에서 분리되어 일제히 거대 거미를 덮쳤다.
날아간 채찍은 사냥돌처럼 움직였다.
적의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게 아니라 팔다리를 묶어 무력화시키는 사냥돌처럼, 수십 가닥의 채찍이 거대 거미의 다리들을 묶었다.
다리 두 개, 심지어 세 개나 네 개가 한 덩이로 묶이기도 했다.
그렇게 수십 가닥의 채찍은 거대 거미의 다리를 완벽하게 얽어맸다.
“좋아! 저기 빛나는 곳을 노린다!”
모두들 거대 거미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빛 덩어리를 공격했다.
그러자 거대 거미는 다리가 묶인 채 몸부림을 쳤다.
집채만 한 괴물이 몸부림을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동시에 거대 거미의 몸뚱이를 이루는 구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몸 전체가 빛을 발하며 자신에게 날아온 무기나 마법 공격을 막아 내기 시작했다.
사울은 거대 거미가 강력한 마법 방어막을 쳤음을 알아보았다.
‘못 하는 게 없는 녀석이군. 하지만!’
적이 방패를 내밀었다면 더 날카로운 창으로 꿰뚫으면 된다.
모두들 그 사실을 깨달았고,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물러나라!”
한참 공격을 카스텔의 외침에 모두들 몸을 피했다.
카스텔이 소환한 건 거대 거미의 몸뚱이만한 거대한 불덩어리였다.
자그마한 태양이 내려온 듯, 거대한 불덩어리가 그대로 거대 거미를 직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