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중립 지대는 다르센 왕국 영토도 가멜다 왕국 영토도 아닌 곳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 나라가 중립 지대를 완전히 내버려 둔다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중립 지대 곳곳에 첩자를 보내고 작게나마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했으니까.
중립 지대의 가멜다 왕국의 영역이라고 해 봐야 대단한 건 없었다.
작은 마을에 위치한 몇 채의 건물이 전부였다.
몇 채의 건물은 바로 중립 지대의 가멜다 왕국 외교 공관이었다.
가멜다 왕국과 대신전, 카멜 산이 교류를 할 때 이 공관을 거치고는 했다.
가멜다 왕국 병사 몇 명 그리고 외교관 한 명이 전부인 초라한 외교 공관.
가르시아 남매는 이 초라한 곳에 보기 드문 거물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작님.”
외교관과 왕국병이 가르시아 남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하나같이 나라의 영웅을 맞이하는 경외 그리고 일말의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베일은 그런 모두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그렇게 두려워할 것 없다. 너희들을 잡아먹으러 온 게 아니니.”
“…….”
농담에도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두들 가르시아 남매의 명성은 물론 악명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협상 경험이 있던 외교관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모두들 명망 높은 남작님들의 위엄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하하.”
외교관의 아부에 베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가?”
“무, 물론이지요.”
“내가 보기에는 마치 날 역병 걸린 사람처럼 취급하는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때 마리안이 끼어들었다.
마리안은 베일에게 작게 귓속말을 했고, 이어 외교관에게 말했다.
“실례해요. 모처럼 오랜 여행을 한 것이라 좀 피곤하군요.”
“아,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외교관은 마리안이 자신들을 돕는 것을 깨닫고 즉각 모두들 처소로 안내했다.
베일과 마리안.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두 부하를 위해 집 한 채를 배정했다.
외교관은 직접 그들을 위해 준비한 집에 데리고 간 뒤 덧붙여 말했다.
“집이 누추한 건 사죄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워낙 가난한 마을이라 이보다 좋은 집이 없습니다.”
가르시아 남매에게 배정된 집은 오두막 수준을 간신히 벗어난 집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이었다.
외교관 등이 머무르던 집은 말 그대로 오두막 수준이었으니까.
다행히 베일은 거처가 초라한 데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집이 초라한 건 상관없다. 하지만 방해받고 싶지는 않다. 우리들의 일은 우리들이 알아서 할 테니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누구도 집 근처에 접근시키지 마라.”
“경비병도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필요 없다. 허락 없이 우리 남매의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놈이 있으면 일단 목을 벤 뒤 따져 묻겠다. 그리고 왕궁에서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우리가 머무는 곳에 아무도 접근하지 마라. 용무가 있으면 우리 쪽에서 사람을 부르겠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외교관은 가르시아 남매가 머무는 곳을 지키려 배정한 병력을 급히 뺀 뒤 마지막으로 물었다.
“데려오신 두 분은 남작님의 부하입니까?”
눈치 빠른 외교관이 굳이 겁먹은 목소리로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다.
가르시아 남매가 데려온 둘 모두 특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매로 보아 한쪽은 남자, 다른 쪽은 여자로 보인다.
둘 다 얼굴에 투구를 썼다.
머리 전체를 빈틈없이 가려 주는 투구를 쓴 탓에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몸도 조금의 속살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촘촘한 옷과 장갑 등으로 완벽하게 가렸다.
성별을 제외하면 저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심지어 인간인지 이종족인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외교관은 그런 두 명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저 정도로 정체를 감춰야 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외교관의 당연한 의문에 베일은 짧게 대답했다.
“여긴 에드, 또 여긴 사라다.”
“아… 네.”
“둘 다 내 부하다. 너희들에게 통보할 게 있으면 이들에게 시킬 테니 기억해 둬라.”
“알겠습니다, 그럼.”
‘에드’와 ‘사라’에게서 수상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외교관은 모른 척 했다.
외교관이 가르시아 남매와 부하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려 할 때, 한 병사가 달려왔다.
“무슨 일이냐?”
“대신전에서 서신을 보내왔습니다!”
“대신전에서?”
“네, 그런데 보낸 자가 다르센 왕국의 사울 왕자라고 합니다.”
외교관도 듣고 있던 가르시아 남매도 놀랐다.
마리안은 외교관을 내버려 두고 병사에게 물었다.
“이 편지를 누가 가져왔나?”
“대신전에서 보낸 성기사가 가지고 왔습니다. 신분은 확인했습니다.”
외교관은 자신도 이 문제에 끼어들려 했다.
어쨌든 중립 지대를 관장하는 외교관으로서 마냥 가르시아 남매에게 주도권을 다 빼앗길 수는 없었으니까.
“편지를 가져와라.”
“…….”
병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교관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느냐? 편지를 가져오래도.”
“그게… 이 편지는 두 자작님들께 보낸 것입니다.”
“뭐라고?”
병사의 말을 증명하듯 서신 봉투에는 받아야 할 사람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베일 가르시아.
마리안 가르시아.
외교관의 이름은 없었다.
보고 있던 베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적국 왕자님은 우리에게 용무가 있는 것 같군.”
이어 마리안이 명령했다.
“편지를 가져와.”
병사는 잠시 눈치를 보다 결국 마리안에게 편지를 가져갔다.
편지를 받은 마리안은 외교관에게 말했다.
“그만 물러가세요. 편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를 할 테니.”
“아, 알겠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버텨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외교관은 별 수 없이 물러났다.
* * *
가르시아 남매는 오두막 수준을 간신히 면한 작은 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때껏 편지를 들고 있던 마리안은 데려온 두 부하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를 알아보지는 못 한 것 같다.”
에드, 곧 킬리안이 대답했다.
“이 정도로 철저히 정체를 숨겼으니까요. 저희와 친하거나 싸워 본 자가 아니라면 저희를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가면이 아닌 투구로 완벽하게 얼굴을 가린다. 정체를 숨기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방법이지. 익숙해 보이던데 전에도 이런 일을 한 적 있나?”
킬리안은 사라 곧 칼립소를 바라보며 투구 속에서 미소를 지었다.
“네, 저희들은 물론 사울 왕자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지요.”
“사울 왕자가?”
“그렇습니다. 투구로 정체를 감추고 투구 전사라 지칭하며 제 일을 방해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사울 왕자와의 악연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지요.”
베일도 마리안도 킬리안에게 어느 정도 이야기는 들었다.
사울과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이다.
“베일.”
“음?”
“사울 왕자 일은 이들과 함께 의논하는 게 좋겠어.”
“그런가? 알았어.”
베일이 수긍하자 마리안은 일단 편지를 다시 확인했다.
베일과 마리안, 두 명의 수신인이 똑똑히 기록된 편지는 다르센 왕국 왕실 문양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 문양을 쓸 수 있는 사람은 국왕이 아닌 왕실의 일원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성기사까지 포섭한 게 아니라면 실제로 사울 왕자가 보낸 편지라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마리안은 봉투를 뜯어 서신을 꺼냈다.
정갈한 필체로 기록된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가르시아 남매와 사울 왕자의 회담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과연.”
마리안은 베일에게도 서신을 보여 주었다.
서신을 다 읽은 베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사울이라는 놈. 무슨 속셈이지?”
“짐작은 가. 우리와 정면 대결을 할 용기는 없지만 쥐 죽은 듯 가만히 있고 싶지도 않다. 우리와 만나 말이라도 붙여 보겠다는 뜻이겠지.”
“검이나 마법으로는 못 당할 것 같으니 말로 어떻게 해 보겠다?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왕자가 생각할 법한 일이군.”
베일의 말을 들은 킬리안이 다른 의견을 냈다.
“사울 왕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왕자가 아닙니다.”
“뭐라고?”
“그를 마냥 얕보지는 마십시오. 저를 이긴 자이니.”
“운이 좋았거나 왕자 곁에 검은 흉성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겠지.”
“아닙니다. 저는 그를 만났고, 또 싸워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작님처럼 생각했지요.”
베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사울 왕자에게 패할 것이라 생각하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력으로 따지면 저는 사울 왕자보다는 강했고, 검은 마녀보다는 약했지요. 하지만 자작님은 검은 마녀보다 강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직 그 계집의 몸 어딘가에는 나에게 당한 흉터가 크게 남아 있을 거다.”
“그렇겠지요. 저는 검은 마녀를 죽일 능력은 없어서 사울 왕자에게 겁을 주거나 피를 좀 보면 물러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틀렸습니다. 그는 전장에서 저를 상대하면서도 겁먹지 않았고 나아가 굳건히 버티며 저를 패배시켰습니다. 만만한 어린 왕자라 생각하면 큰 코 다칠 겁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들었는데, 벌써부터 호감이 사라지려 하는군.”
보고 있던 마리안이 제지에 나섰다.
“베일, 참아.”
“누나도 이 녀석이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잖아?”
“물론 들었어, 무례한 말이지. 하지만 저 녀석은 사울 왕자와 전장에서 맞붙었고 또 직접 겨뤄 보았어. 반면에 우린 카스텔과는 싸워 봤어도 사울 왕자는 본 적이 없지.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들을 만한 충고야.”
“…….”
베일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런 베일의 모습에 킬리안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실히 파악했다.
‘동생은 힘을, 누나는 머리를 주로 쓰는 입장인가. 다루기 까다로운 건 누나 쪽이겠군.’
킬리안은 남에게 예의 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예의를 차려야 한다면 최대한 좋은 결과를 낼 필요가 있다.
“저라면 사울 왕자를 한번 만나 볼 겁니다.”
킬리안의 조언에 마리안은 다른 의견을 냈다.
“본래 우리는 카멜 산에 갈 생각이었다. 그에 앞서 사울 왕자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나?”
“카멜 산? 대족장과 만나려고 하십니까?”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눈에 보이는 활동은 있어야 하니까.”
“저는 대족장 세네카는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사울 왕자는 세네카를 만난 적이 있다더군요.”
“그렇다더군.”
“그렇다면 사울 왕자와 만나 세네카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적국 왕자가 쓸 만한 정보를 곧이곧대로 내놓지는 않겠습니다만.”
마리안은 조언을 하는 킬리안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대신전에 간다면 너도 함께 갈 건가?”
“그건 어렵습니다. 사울 왕자도, 검은 마녀도 저를 압니다. 얼굴을 완전히 가려도 어떻게 저나 제 부하를 알아볼 가능성이 있지요. 그럼 두 자작 분의 처지가 난감해지지 않겠습니까?”
“…….”
고심하던 마리안이 베일에게 말했다.
“베일, 역시 대신전에 한번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우리가 그 어린 왕자가 시킨 대로 따를 필요가 있어?”
“비록 적국이라지만 그래도 왕자니까. 또 사울 왕자라는 자에게 흥미가 생겼어.”
“적국 왕자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고 귀족들이 시끄럽게 떠들지는 않을까?”
“그 문제는 내가 처리할 수 있어, 그러니 한번 다녀오자. 사울 왕자를 무시해도 될지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지… 만나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어. 또 사울 왕자 곁에는 카스텔도 있으니까.”
카스텔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베일의 눈에 생기가 흘렀다.
“그건 재미있겠군.”
“그럼 대신전으로 가는 것으로 해.”
결론을 내린 마리안은 킬리안에게 명령했다.
“네게도 임무를 주지.”
“말씀하십시오.”
“대신전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가 힘을 쓸 만한 곳을 찾아봐.”
“파괴하거나 죽여도 뒤탈이 없을 만한 대상을 찾아보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남는 시간에는 네 일을 하든 사업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감사합니다, 그럼.”
그렇게 킬리안과 칼립소를 내보낸 마리안은 베일에게 말했다.
“베일, 좀 더 여유를 가져.”
“누나의 말이라면. 하지만 사울 왕자라는 녀석에게 너무 관심이 많은 것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그는 왕자야. 전시라면 모를까 지금은 그를 죽일 때가 아니야. 이 중립 지대에서는 기회도 할 일도 많을 거야. 그러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신중히 움직이자.”
결국 베일도 마리안의 뜻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