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가르시아 남매가 대신전에 올 계획이다.
소식이 전해지기 무섭게 대신전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대신관 콜리타는 소식을 듣는 즉각 사울을 찾았다.
“전하께서 그들을 대신전에 부르셨습니까?”
“네.”
사울의 대답에 콜리타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이번 일은 저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설마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지대에 올 줄이야.”
“그들이 온 이유에 전하 혹은 카스텔 씨가 관련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다른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렇겠지요.”
“가르시아 남매가 중립 지대까지 온 이상 한 번은 부딪쳐야 합니다. 칼로 부딪치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또 대신전이나 카멜 산에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요. 그래서 대신전에서 그들과 회담을 가질 생각입니다. 말이 통할 상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보아야지요.”
다시 한숨을 내쉰 콜리타가 말했다.
“전하 말씀대로 그들과 말이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콜리타도 가르시아 남매의 악명을 들은 모양이었다.
사울은 콜리타가 무엇을 가장 걱정할지 생각해 보았다.
사울 본인의 안위도 걱정되겠지만 무엇보다 대신전의 안위가 걱정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전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의 말에도 콜리타의 안색은 밝아지지 않았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전하처럼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
콜리타가 근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가르시아 남매의 조국인 가멜다 왕국에서도 그들의 악명은 대단했다.
영웅으로서의 명성도 높았지만 악명은 그 이상이었다.
중립 지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르시아 남매를 증오하는 자는 많지 않았지만 악명 높은 존재로서 두려워하는 자는 많았다.
콜리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가르시아 남매라도 대신전 안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신전 밖에서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문제를 막기 위해 그들을 대신전으로 부른 겁니다. 지금은 저도 선생님도 그들과 싸울 마음이 없다는 걸 확실히 알릴 겁니다.”
“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걱정됩니다. 워낙 소문이 좋지 않은 자들이라…….”
“소문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이유 없이 소문이 나는 법은 없지요.”
사울도 콜리타와 생각이 같았다.
소문도 소문이거니와, 카스텔이 직접 증언했다.
가르시아 남매는 둘 다 위험한 자들이다.
그나마 누나인 마리안은 상식이 있지만, 동생 베일은 상식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다른 방법이 없다.
싸워 보지도 않고 싸움에 진 개처럼 도망칠 수는 없다.
게다가 사울이 가르시아 남매를 부른 것도 하다못해 유인한 것도 아니다.
사울은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최대한 대신전에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그들과 회담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가르시아 남매와 얼마나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화는 시도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
한참 고민하던 콜리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지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하, 기억해 주십시오. 만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저로서도 전하 나아가 다르센 왕국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로 많은 것을 내포한 콜리타의 말에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지요.”
“네, 그럼…쿨럭!”
대화를 끝내려던 콜리타가 갑자기 기침을 했다.
평범한 기침이 아니었다.
거의 피를 토할 듯 거센 기침을 반복했다.
“대신관님?”
“쿨럭! 쿨럭!”
“지금 바로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사울이 사람을 부르기 직전 콜리타의 기침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다행히 피를 토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심상치 않았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기침이 이어졌고, 얼굴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 후.
기침이 잦아든 콜리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작은 병을 열어 안에 있던 약을 마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여파가 남은 듯 안색이 좋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시는 대로입니다. 요즘 건강이 좀 좋지 않습니다.”
“그럼 잠시라도 쉬시지 않고요?”
“네, 이번 일만 끝나면 좀 쉬어야겠습니다. 앞으로 전하를 자주 뵙지 못해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그럼 몸조리 잘하십시오.”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리타의 방을 나서자 신관이 급히 뛰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방 밖까지 기침 소리가 들린 것이리라.
사울은 밝지 않은 표정으로 방에 돌아왔다.
사울을 맞이한 그레이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내 문제가 아니야. 아니, 내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콜리타 대신관 말이야.”
“대신관님이?”
사울은 자신이 본 콜리타의 모습을 알려 주었다.
말을 다 들은 그레이도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런, 연로하신 분이 그렇게까지… 잘못하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울은 그레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누구보다 예의를 중시하는 그레이가 이렇게 말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란 뜻이다.
“그레이, 설마 대신관이…….”
“제가 의사가 아니니 뭐라 말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분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골치 아프군. 좋은 사람인데.”
좋고 나쁨을 떠나 적이나 원수가 아니라면 죽는 건 바라지 않는다.
하물며 콜리타는 적이나 원수는커녕, 아군에 가깝다.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사울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사울은 콜리타의 건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문제는 콜리타 본인과 주변 신관들이 처리할 일이다.
지금 중요한 건 가르시아 남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직접 가르시아 남매에게 보낼 친서를 작성했다.
비굴하지는 않지만 정중한 어조로 대신전에서 회담을 가지자고 다시 한번 친서를 써 보냈다.
그리고 편지를 받은 가르시아 남매는 사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새벽부터 대신전 전체에 긴장된 분위기가 가득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가르시아 남매가 대신전에 방문하는 날이었으니까.
“드디어 오늘입니다, 전하.”
아르멜의 말에 사울도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지?”
“정오 즈음에 도착할 예정이라 했습니다.”
가르시아 남매를 맞이하는 건 대신전의 고위 신관들이 맡기로 했다.
사울은 신전 안에서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왕자의 몸으로 적국의 자작을 맞으러 나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비슷한 이유로 다르센 왕국 측 인원은 모두들 신전 안에서 가르시아 남매를 맞기로 했다.
적국의 영웅은 곧 자국의 원수다.
그들과 회담을 할지언정 필요 이상으로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차릴 건 차려야 했다.
이 자리가 전장도 아니고, 또 그들을 불러 선전 포고를 할 것도 아니었으니까.
가능한 회담을 좋게 끝내기 위해 사울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
“회담 장소는 예정된 그곳인가?”
“네, 회의실을 회담 장소로 쓰면 된답니다.”
“참석 인원은?”
“가르시아 남매 쪽은 베일과 마리안 그리고 소수의 수행원 정도가 따라올 것 같습니다.”
가르시아 남매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때문에 지금 찾아오는 인원과 회담장에 남매를 수행하는 인원은 소수일 것이다.
상대가 소수라면 이쪽에서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머릿수로 위엄을 느끼게 하는 것도 전략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울은 그러한 전략은 쓰지 않기로 했다.
“나와 너, 그리고 아이나와 선생님은 참석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신전 쪽에 맡기도록 하지.”
“좀 더 인원을 늘리지 않고요?”
“상대는 가르시아 남매잖아? 머릿수로 기를 죽이는 게 통할 리 없어.”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다시 한번 회담 장소를 점검하고 오겠습니다.”
아르멜이 나가고, 홀로 남은 사울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준비는 단단히 했다.
짧은 준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했다.
만에 하나 가르시아 남매가 미쳐 날뛸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대신전에서 탈출할지 계획까지 세워 두었다.
말 그대로 최악의 경우까지 모두 준비했다.
아마 최악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전에서 왕자를 쳐 죽이려 할 만큼 미친 자들은 아닐 테니까.
그래서 오늘의 회담이 중요했다.
회담에서 실패한다면 그 대가는 고스란히 사울 본인이 치를 테니까.
나아가 주변 사람들에도 불똥이 튈지 모른다.
‘평생 가장 어려운 대화가 될 것 같군.’
서로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수백수천 번 생각해 보았다.
다른 사람들과도 많이 의논했다.
일이 예상대로 흐른다면 큰 문제없이 회담이 마무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정대로 흐르지 않는다면?
‘가르시아 남매라.’
사울은 가르시아 남매를 떠올리면 기분이 묘했다.
그들이 적국 영웅이라서가 아니다.
가르시아 남매는 몰락 귀족 출신이라고 했다.
사울의 전생이었던 롤랜드 역시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
아니, 가르시아 남매의 출신은 롤랜드보다도 더 좋지 않았다.
롤랜드는 가문의 이름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가르시아 남매는 가문의 이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야말로 평민과 다를 바 없던 신분이었다.
가르시아 남매는 가문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 되었고 그 결과 막대한 영광을 누렸다.
그것은 전생에 사울이 가진 꿈이기도 했다.
자신의 힘으로 큰 공적을 쌓아 가문을 복구하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
‘하지만 그 꿈은 산산조각 났지.’
산산조각 난 전생의 꿈이 지금의 삶의 목적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가르시아 남매는 사울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룬 자들이다.
동시에 율렌 섬 누구보다도 강한 괴물들이다.
자신이 가졌던 꿈을 이룬 괴물들.
적과 아군을 떠나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복잡해졌다.
“정신 차려야지.”
사울은 고개를 흔들며 상념을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건 왕자로서 회담을 잘 마무리 짓는 일이다.
한 번의 실수로 그동안 쌓아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릴 수 있다.
“전하, 계십니까?”
“들어와요.”
사울의 방에 들어 온 건 아이나와 카스텔이었다.
아이나는 물론 카스텔도 평소와는 달리 예를 갖춰 차려입었다.
상대는 적국의 거물.
얕보여서는 안 되었다.
“둘 다 아름답군요.”
사울의 가벼운 인사치레에도 두 사람의 진지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적국의 인물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과 회담을 가지는 것 아닌가.
최악의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회담 자리에는 무기를 가져가지 않을 예정이다.
가르시아 남매 쪽에도 회담 자리에 무기를 가져오지 말 것을 통보했다.
그쪽에서 통보를 들을 지는 미지수였지만.
“잘 부탁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먼저 대답했다.
“부디 조심합시오, 전하.”
카스텔도 이어 말했다.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모두 고마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긴장된 표정의 그레이가 들어왔다.
“전하, 그자들이 도착했답니다.”
“그렇군. 우리도 슬슬 회담장으로 가지.”
“…….”
“그레이, 내가 걱정되는 거야?”
“소용없는 줄은 알지만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전하, 이번 회담은 미루시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왕자의 몸으로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다녀올게.”
“그럼 회담장까지라도 수행하겠습니다.”
사울은 그레이를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안심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사울 일행은 회담장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 만난 아르멜과 함께 회담장에서 가르시아 남매를 기다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