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신전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마차는 그렇게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다.
말 두 마리가 끄는 중형 마차.
많아야 대여섯 명 정도가 타는 게 고작일 것이다.
하지만 작고 검소한 마차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마차가 바로 가멜다 왕국의 구국 영웅이자 율렌 섬의 최강자로 거론되는 강자.
가르시아 남매의 마차였으니까.
마차 문이 열리고 하인으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먼저 내렸다.
그리고 두 남녀가 뒤따라 내렸다.
가르시아 남매였다.
둘 다 회담보다는 싸우러 온 차림이었다.
갑옷을 차려입고 무기까지 찬 채 살벌한 기세로 마차에서 내리는 그들의 모습에 마중 나온 신관도, 성기사들도 얼굴이 굳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 신관이 나서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베일은 냉소를 흘렸지만 마리안은 인사를 받아 주었다.
“고마워요.”
일단은 두 사람 모두 싸울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가르시아 남매가 데려온 자들은 모두 수행원들이었다.
그 흔한 호위병 한 명 없었다.
“들어오십시오. 잠시 휴식을 취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울 왕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회담장으로 가겠어요. 괜찮지?”
마리안의 질문에 베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내를 맡은 신관은 곧바로 그들을 회담장으로 안내했다.
“저 사람들이 그 가르시아 남매……?”
“쉿, 조용히 해.”
존경이나 경외의 눈빛을 보내는 자는 거의 없었다.
모두들 겁먹은 표정과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런 주변의 눈길에도 마리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반면에 베일은 즐기기라도 하는 듯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우리가 좋은 구경거리인 모양이군.”
베일의 말에 안내하던 신관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걱정 마시오. 기분 나쁘다는 게 아니니까.”
자신의 악명을 꺼려하는 게 아니라 즐기고 있다.
실로 오만한 태도였지만, 베일에게는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지금 회담장에는 누가 있소?”
베일의 질문에 신관이 대답했다.
“사울 왕자와 그 일행 분들 그리고 대신관님이 계십니다.”
“대신관이?”
듣고 있던 마리안이 신관에게 물었다.
“대신관님도 회담에 참여하시나요?”
“중재를 하실 생각이라 들었습니다.”
그 대답에 마리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는 볼 수 없다는 건가… 늙은 신관이 머리를 굴렸군.’
대신관의 의도를 바로 이해한 마리안과는 달리 베일은 대신관이 회담에 참석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다.
이에 마리안이 몇 마디 귓속말을 했고, 베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래서?”
“약속대로 해.”
“신호가 있기 전까지는 누나가 이야기를 주도하겠다고?”
“그래.”
베일은 별말 없이 마리안의 뜻에 수긍했다.
그렇게 가르시아 남매는 회담장으로 향했다.
* * *
가르시아 남매가 회담장에 가까워지면서 사울 일행도 그 기척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가르시아 남매 정도의 실력자라면 자신들의 기척을 숨길 수도 있을 것이건만, 그들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내뿜는 막강한 기운이 멀리서도 똑똑히 전달되었다.
‘정말 대단하군.’
사울은 혀를 내둘렀다.
실로 막강한 힘이다.
가르시아 남매는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해서 마나의 기운을 내뿜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의 힘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느껴지는 기척 중 아마 조금 약한 쪽이 마리안이고, 더 강한 쪽이 베일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약한 쪽’도 사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했다.
‘더 강한 쪽’은 말할 필요도 없었고.
‘둘 중 약한 쪽이 마리안이겠지. 그 마리안도 카스텔보다 강한 기운을 내뿜는군’
상대적으로 약한 마리안도 몸이 성치 않은 지금의 카스텔보다 강한 기운을 내뿜는다.
그것만으로도 베일이 얼마나 괴물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껏 사울이 만나 본 자들 중 최강자는 아마도 대족장 세네카일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베일은 세네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사울은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저들의 막강한 존재감에 가슴이 제멋대로 뛰려고 했다.
하지만 겁먹고 물러날 수는 없다.
왕자로서 그리고 뚜렷한 삶의 목적을 가진 이로서 이 자리를 무사히 헤쳐 나가야 한다.
마침내 가르시아 남매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조금만 있으면 닫힌 회담장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사울은 회담장을 둘러보았다.
상석에 자신이 앉았고, 그 곁에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이 함께 앉았다.
맞은편에는 가르시아 남매와 수행원들이 앉을 의자가 놓여 있다.
그리고 오른쪽 옆에 마련된 중재인의 자리에는 콜리타와 그를 수행하는 몇몇 신관과 성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콜리타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꽤나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였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난데없는 소란에 신관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나갔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요?”
사울의 질문에 신관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게… 두 자작 분께서 무장 해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전에 무장을 하지 않고 만난다고 통보를 하지 않았나요?”
“물론 미리 통보를 하였습니다. 두 분도 분명 통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무장 해제를 하지 않겠다?”
“그렇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신관은 난처한 표정으로 사울과 콜리타를 번갈아 보았다.
둘 중 한 명이 나서지 않으면 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것 같다는 뜻이었다.
“하는 수 없군.”
콜리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사울이 제지했다.
“대신관님, 저들은 나를 보러 왔으니 제가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중재자인 콜리타의 몫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 그가 무리하다 병세가 악화되면 큰일이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예상치 못한 건 아니다.
이쪽에는 검은 마녀가 있고, 저들은 가르시아 남매가 아닌가.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는 되었다.
사울은 모두를 대동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담장의 회담장 문이 열렸고 마침내 가르시아 남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젊군.’
가르시아 남매를 직접 본 사울이 처음 한 생각이었다.
6년 전쟁이 끝난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런 것 치고는 가르시아 남매는 꽤 젊어 보였다.
육체적으로 나이를 먹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카스텔만큼은 아니었지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긴장 어린 침묵을 깬 건 마리안이었다.
“그쪽이 사울 왕자님이신가요?”
사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마리안은 카스텔의 얼굴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물었다.
“넌 검은 흉성?”
“…그렇다.”
카스텔의 대답에 과거 그녀에게 패배를 안겨 준 장본인, 베일도 말했다.
“네 맨얼굴이 정말 그렇게 멀쩡할 줄은 몰랐군.”
“…….”
마리안도, 베일도 가면을 쓴 모습만 봤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도 가면을 쓴 모습만 보았고, 다시 태어난 뒤에도 가면을 쓴 모습을 먼저 보았다.
그때는 가면을 벗은 카스텔의 맨얼굴이 괴물 같지 않고 멀쩡하게 생긴 게 오히려 신기했다.
카스텔이 가면을 벗은 지도 몇 년.
그녀의 맨얼굴이 이렇게 멀쩡하다는 사실이 가멜다 왕국에까지 흘러간 모양이었다.
“이것 봐, 검은 흉성.”
마리안 뒤에 있던 베일이 갑자기 움직였다.
검을 찬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베일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이었다.
카스텔도 그런 베일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둘 다 무기를 뽑거나 마법을 준비하지는 않지만, 금방이라도 공격이 오갈 듯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그때 사울이 말했다.
“베일 가르시아 자작.”
이름이 불린 베일이 불손하게 물었다.
“날 불렀소?”
“그래.”
베일은 미소를 짙게 하며 그런 사울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사울의 손이 제멋대로 떨렸다.
마음이 무너진 게 아니다.
몸이 본능적으로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사울은 두 손을 강하게 맞잡아 떨림을 멈추게 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싸울 마음이 없다.”
“웃기는 소리…….”
베일이 다시 불손한 말을 꺼내려 할 때, 마리안이 나서 그의 옷을 잡아끌었다.
신호를 받은 베일은 더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베일이 마리안에게 제어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지금 가르시아 남매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베일이 아니라 마리안이다.
“동생의 무례는 사과하지요, 전하.”
베일보다는 정중한 태도로 마리안이 말했다.
하지만 정중한 건 말뿐이었다.
일개 자작이 왕자에게 사과를 한다고 하면서 고개도 숙이지 않았으니까.
최소한의 예절만을 차리겠다는 듯 말이다.
“이야기는 회담장에서 하시지요, 전하.”
사울의 시선이 마리안이 찬 활 쪽에 쏠렸다.
베일 역시 여전히 검을 찬 채였다.
“무장을 하고 회담장에 들어올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서로 칼을 차고 회담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저희는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무장을 한 게 거슬린다면 전하와 전하의 부하들도 무장을 하시지요.”
“이 자리에서 싸우겠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요. 하지만 전하 곁에는 카스텔이 있지요. 카스텔은 무기 없이 싸우는 데 전문이고, 우리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데 전문입니다. 우리가 무기를 버린다면 맨몸으로 무장한 카스텔과 맞서는 것과 다름없으니 불리한 건 우리 쪽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무장을 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요?”
마리안의 말이 억지라고는 할 수 없었다.
확실히 카스텔은 무기를 쓰지 않고 마법 실력만으로 ‘검은 흉성’의 악명을 얻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전력을 낼 수 있는 게 카스텔이다.
반면에 가르시아 남매는 무기가 있어야 전력을 낼 수 있다.
무기가 있어야 공평하다는 논리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사울이 의견을 냈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만 무장을 하는 게 어떤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둘 다 무장한다면 우리 쪽이 불리하고, 둘 다 빈손이라면 그쪽이 불리하겠지. 그렇다면 그쪽은 둘 중 한 명만 무장을 하고, 우리 쪽에서는 선생님과 나 둘이 무장을 한다면 공평한 조건이 될 것 같은데.”
사울의 제안에 마리안이 물었다.
“왜 저희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지요?”
“받아들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만 그러면 회담은 그것으로 끝이지.”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전하일 것인데요?”
“처음부터 불리한 조건 하에 회담을 강요받느니, 이 자리에서 끝내는 게 낫지.”
그러자 마리안의 눈빛이 번득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회담이 끝난다면 전하께서 무사하리라 생각하세요?”
“……!”
사울은 다시금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차원이 다른 강자가 내뿜는 살기에 몸이 계속 경고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