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교관은 가르시아 남매와 킬리안 등의 미묘한 관계를 눈치 챘는지 조심스레 말했다.
“그들은 도통 이곳에 붙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무언가 수상한 행동이라도 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붙어 있지 않은 게 수상한 행동이라면 수상한 행동이겠습니다만.”
“그럼 되었어요. 그들이 언제 돌아왔다고요?”
“바로 조금 전입니다.”
마리안은 외교관을 내보낸 뒤 베일에게 말했다.
“역시 그자들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당연하지. 나라도 얌전히 우리의 충복 노릇을 하진 않을 거야. 모처럼 여기까지 온 김에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짓이라도 다 하려 하겠지.”
“둘 다 멍청이들은 아니야. 그래서 더 위험하지.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우리 곁에 붙여 두고는 있지만.”
“바로 없애 버릴까? 아니면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즉각 없애 버릴까?”
“아직은 백작과 적대하고 싶지 않아. 일단 그들에게 물어 보자.”
“알았어.”
짧게 대화를 마친 가르시안 남매는 킬리안을 불렀다.
부름을 받은 킬리안과 칼립소는 역시나 투구를 쓴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리안은 킬리안에게 회담 결과를 이야기 해 주었다.
다 들은 킬리안이 말했다.
“역시 사울 왕자답군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최악의 결과는 피하다니.”
“너라면 어떻게 했겠나?”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으면 죽이고, 죽일 수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중립 지대에서 쫓아냈을 겁니다. 굳이 적에게 편의를 봐줄 이유는 없으니.”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우린 너와는 다르니까.”
이어 마리안은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사울 왕자가 어둠의 세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물론 킬리안은 어둠의 세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동맹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사업상 관계’를 맺은 적 있다.
동시에 킬리안은 가르시아 남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깨달았다.
들통날 가능성이 높은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관계가 없진 않다고 해 두지요.”
“역시 그렇군.”
마리안은 베일에게 눈짓을 했고, 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행동을 본 킬리안은 자신이 방금 전 위기를 넘겼음을 깨달았다.
거짓을 말했다면 분명 마리안도, 베일도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말 그대로 목숨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럼에도 킬리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저와 어둠의 세력이 연관이 있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들과 한패인 건 아니니까요.”
“연관은 있는 데 한패는 아니라는 건 무슨 논리지?”
“저와 그들은 어디까지나 사업상 관계였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마음만 먹으면 손을 끊을 수 있는 관계였지요. 사실 그들과 마지막으로 교류한 지도 꽤 되었습니다.”
“재미있군. 그런 말이 이단 심문관에게 통하리라 생각하나?”
“제가 이단 심문관에게 변명할 일은 없을 겁니다. 이단 심문관이 절 심문하기 전 없애 버릴 테니까.”
마리안은 킬리안이 투구 속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여유로운 미소.
저 여유야 말로 마리안이 킬리안을 높이 치는 이유 중 하나이며, 일말의 불안감을 가진 이유였다.
“어둠의 세력에 대해 뭘 얼마나 알고 있지?”
“정말 들으셔야겠습니까?”
“네가 이 자리에서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모두 말해라.”
마리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와 베일 모두가 살기를 내뿜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킬리안을 반 죽이거나, 완전히 죽여 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두목…….”
지금껏 말이 없던 칼립소는 둘의 기세에 눌린 기색이 역력했다.
반면에 킬리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한 상황에서 그들이 접근했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거래 관계 이상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듣기로 그 어둠의 친구들은 세상의 멸망을 바란다더군요. 멸망인지 혼돈 후 재창조인지 저는 관심 없습니다. 그 친구들의 이상에 동의하지도 않고요.”
그런 킬리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마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내일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운다면 넌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앞장서서 그들을 죽이겠습니다.”
“그들이 네 친구라도?”
“저는 친구라는 존재는 모릅니다. 제가 믿는 건 부하, 상전, 아니면 이용 대상뿐이지요.”
“그렇군.”
마리안은 베일과 눈빛을 교환한 뒤 말했다.
“지금은 네 목을 붙여 두지. 하지만 기억해라. 우리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네가 다른 일을 하는 건 간섭하지 않겠다. 하지만 우리와 일을 하면서 어둠의 세력과 접촉한다면 너희들은 물론 하얀 까마귀 전체가 우리 적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더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더 할 말이 없던 마리안이 손짓을 하자 킬리안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칼립소와 함께 유유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런 킬리안을 바라보던 베일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저놈이 범죄 왕국을 세우고, 일국의 왕자와 맞섰는지 알겠군.”
“확실히 보통 놈이 아니야.”
“사울 왕자도 보통이 아니었지만 우릴 보고 본능적으로 두려워했지. 당연한 일이야. 우린 압도적으로 강했고, 녀석은 약했으니까. 하지만 저놈은 달라. 우리가 보기엔 저놈이나 사울 왕자나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저 은 우릴 두려워하질 않아.”
마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거기에다 영리하기까지 하지. 우리가 놈을 죽이려고 부르면 낌새를 맡고 사라지겠지.”
“놈이 우릴 방해하거나 앞을 가로막지는 않을까?”
“지금은 놈이 우릴 적대할 마음은 없는 것 같으니까. 우릴 두려워하진 않아도 자살 행위를 할 놈은 아니야. 당분간은 우리의 개로 쓸 수 있을 거야.”
“그렇군. 그럼 당분간은 안심하고 마음껏 날뛰면 되는 건가?”
베일의 말에 마리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좋아, 하지만 아쉬워. 내가 정말 원하는 먹잇감은 카스텔인데.”
“언젠가는 검은 흉성을 확실히 끝장낼 날이 올 거야. 그러니 그녀의 상처가 다 나아도 확실히 끝장낼 수 있도록 단련을 게을리 하지 마.”
베일은 마리안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래야지.”
* * *
얼마 전 사울은 매사를 지나치게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충고를 받았다.
그리고 본인도 그 충고에 수긍했었다.
하지만 가르시아 남매의 등장은 그 충고를 쓸모없게 만들었다.
당장은 가르시아 남매와 협상을 통해 부딪치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때문에 언제까지 사울이 중립 지대에서 머무를 수 있을지 확신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울은 다시 한번 카멜산으로 가 보기로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대신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당장 카멜 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곳에 가는 게 한정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유용하게 쓰는 방법일 듯했다.
생각 같아서는 가르시아 남매가 대신전을 떠난 즉시 카멜 산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사울은 왕자고, 상대인 세네카는 율렌 섬 이종족의 우두머리인 대족장이다.
가르시아 남매처럼 무도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사울은 카멜 산으로 편지를 보냈다.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 주로 수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럼 전하.”
“좋아요.”
대신전 수련장에서 사울과 아이나가 대련에 임했다.
무기 사용도, 마법 사용도 자유로운 대련이었다.
아이나의 도끼와 방패, 사울의 마법 검과 마법이 빠르게 교차했다.
최근 몇 달 정도 대련을 못 한 사이 양쪽 모두 실력이 올랐다.
본래 무술과 마법을 모두 쓴다면 사울이 한 수 위였다.
양쪽 모두 실력이 오른 덕분에 그 격차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하압!”
마법으로 아이나의 눈을 돌린 사울이 마법 검을 뻗었다.
검집에 싸인 마법 검 끝이 아이나의 다리를 찔렀다.
실전이었다면 다리가 꿰뚫리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윽… 졌습니다.”
아이나가 패배를 인정하며 쓰러지려는 순간, 사울이 그런 아이나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네, 전하.”
“다친 곳을 내밀어요.”
사울은 마법 검에 찔린 아이나의 다리를 살폈다.
바지를 입고 있어 부상을 입은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사도 아닌 사울이 귀족 영애의 맨다리를 보자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울은 대충 위치를 찍은 뒤 손을 뻗었다.
사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하얀 빛이 아이나의 다리로 흘러들어 갔다.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던 아이나의 표정이 점점 편해졌다.
잠시 후, 아이나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나야말로 고마워요. 항상 내 상대를 해 줘서.”
카스텔처럼 실력이 많이 차이 나는 사람과 대련을 해서 배우는 것도 있다.
반면에 아이나처럼 실력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사람과 대련을 해서 배우는 것도 있다.
확실히 지금의 대련은 두 명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익힌 지 얼마 안 되는 치료 마법까지 시험하는 기회까지 얻었다.
아직은 사울 본인도, 아이나도 실력이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는 게 기뻤다.
언젠가 재능의 한계가 찾아오겠지만, 아직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며칠 전 가르시아 남매와의 만남이 그 사실을 절감시켜 주었다.
그때 다르센 왕국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전하, 왕국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왕국에서? 누가?”
“왕녀 전하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알았다.”
카멜 산에서 소식이 올 줄 알았는데, 왕국에서 먼저 소식이 왔다.
아마도 누님께서 지난번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보낸 모양이었다.
사울은 방으로 돌아가 누님이 보낸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는 한가로운 안부 인사가 대부분이었지만, 중요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네가 보낸 보석은 잘 받았다. 상당한 힘을 가진 마법 보석으로 보이더구나. 아바마마께서는 절반은 널 위한 물건으로, 나머지 절반은 왕국을 위해 쓰기를 원하신다.’
사울은 수긍했다.
어차피 마법 보석을 제대로 쓰려면 가공이 필요하다.
제대로 가공하려면 왕실 소속 장인을 통하는 게 가장 확실하다.
사울은 아바마마의 뜻에 따르겠다고 답장을 쓰면서 생각했다.
‘이 편지의 답장은 이렇게 한가하지 않겠지.’
머잖아 가르시아 남매와 회담을 가진 게 누님, 그리고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왕실 쪽에서도 반응을 보일 것이다.
어쩌면 당장 수도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이에 사울은 편지에 가르시아 남매와의 회담에 대한 내용, 그리고 중립 지대에서 더 머무르고 싶다는 내용도 썼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누님께 보내는 답장을 다 쓴 사울은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전하, 카멜 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족장이 보냈나?”
“그렇습니다.”
대족장 세네카의 편지를 읽어 본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세력, 그리고 가르시아 남매의 일로 의논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대족장이 초대를 한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다.
사울은 곧바로 카멜 산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