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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23화 (123/232)

123화

사울은 전생의 조국에 대해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지만 가멜다 왕국민으로서 살았고, 여러 상황을 피부로 느꼈다.

막강한 왕실이 주도하는 다르센 왕국의 정치 체계와 유력 귀족 가문 여럿이 주도하는 가멜다 왕국의 정치 체계.

둘 중 어떤 체계가 더 우수한가라는 질문은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사울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느 쪽의 경쟁이 좀 더 치열하냐는 질문에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주도 세력이 확정되지 않은 가멜다 왕국은 권력 지키거나, 쟁탈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했다.

그 때문에 유능한 귀족 인재가 더 많이 나오는 구조라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왕실과, 또 자기들끼리 경쟁하느라 바보짓을 하거나 미친 짓을 하는 자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킬리안과 가멜다 왕국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0은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손잡을 가능성은 없지만, 몇몇 욕심에 눈이 먼 귀족이라면 손을 잡으려 할 테니까.

“가멜다 왕국과 킬리안이 연관이 있을까.”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대답했다.

“제가 알기로 그러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건 알아.”

“킬리안이 가멜다 왕국 쪽으로 움직였다고 둘이 서로 연합했다는 말을 하시면 오히려 가멜다 왕국 쪽에 약점을 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알아.”

아르멜은 잠시 주저하다 조언했다.

“전하,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셔야…….”

사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다.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이미 놈들을 쫓기는 늦었어요. 조금만 더 흔적을 따라가 보고 철수해요.”

모데아도 사울의 의견에 찬성했다.

* * *

이어진 수색에도 큰 소득은 없었다.

킬리안 일당이 가멜다 왕국의 영역 쪽으로 향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더 시간을 보내 봐야 의미가 없다고 여긴 사울은 돌아가기로 했다.

그렇게 카멜 산으로 돌아가는 사울 일행의 분위기가 무거웠다.

절반 가까운 인원을 잃었다.

그것도 제대로 싸운 것도 아니고 함정에 빠져 적잖은 병력을 잃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데아나 엘프 병사들이 사울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누굴 원망한 일이 아니라 생각한 건지 아니면, 원망을 하고 있지만 내비치지 않는 것인지.

누구는 동료를 잃고, 누구는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돌아가는 와중에도 사울을 향한 원망의 목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사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온 이래, 이 정도의 실패를 겪은 적은 없다.

그래서 더욱 비참했다.

‘빌어먹을…….’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 카멜 산도 멀지 않았다.

내일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곧바로 세네카와 만나야 할 것이다.

세네카는 사울에게 뭐라고 할까.

사울의 신변을 위협하지는 않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무슨 수모를 겪어도 받아들일 수밖에.’

머리로는 지금 상황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이제부터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

카멜 산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캠프에서도 사울은 쉽게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 사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찾아온 건 아이나였다.

“무슨 일인가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와요.”

사울과 마주앉은 아이나가 조용히 말했다.

“상심이 크시지요.”

“네, 하지만 모든 게 내 잘못이니까요.”

“.…전하.”

잠시 주저하던 아이나가 말했다.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무슨 이야기인가요?”

“제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아이나가 무언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 함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유 없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을 터.

사울은 아이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사냥감을 잡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사냥감? 아아, 그대가 날 처음 만났을 때 걸쳤던 그 늑대 가죽 말이군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사울과 처음 만날 때, 아이나는 드레스나 정장을 입고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커다란 잿빛 늑대의 가죽을 걸친 채 사울을 맞이했다.

아이나의 고향에서는 그것이 상대에게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였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나의 모습을 보고 경악한 그레이의 모습까지 뚜렷이 기억났다.

“사실 그 늑대는 저의 첫 번째 사냥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그보다 작고 약한 늑대였습니다. 어린 저로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녀석이었지요. 그래서 도전했고… 패했습니다.”

“…….”

아이나의 고향에서 첫 번째 사냥은 큰 의미를 가졌다.

전사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모를까, 전사의 길을 걷는 자라면 꼭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첫 번째 사냥에서 실패했다.

그것도 영주의 딸이.

그런 일을 겪은 아이나가 겪었을 좌절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시에 아이나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도 짐작이 갔다.

“그랬군요, 그대 역시 그러한 일을 겪었군요.”

“네, 전하.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땐 제 삶이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정도로 그대의 고향에서는 첫 번째 사냥이 중요한가요?”

“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 스스로에게 실망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실패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무서웠고… 첫 번째 사냥감을 변변찮은 것으로 삼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습니다.”

실패를 각오한 사람도 실패를 마주하면 좌절할 수 있다.

하물며 각오하지 않은 실패라면, 좌절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사울은 아이나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동시에 자신을 위해 본인의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꺼낸 아이나가 고마웠다.

그래서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아이나의 말을 들어 주었다.

“첫 번째 사냥에 실패하고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땐 그 실패로 제가 변변찮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버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뭐라고요?”

“제 목숨과 홉킨스 가문이 살아 있는 한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다고.”

“과연, 그 말이 그대에게 위로가 되었나요?”

“네,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다시 사냥에 도전했습니다. 저에게 좌절을 안겨 준 녀석은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잿빛 늑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전 그 녀석을 선택했지요.”

“그리고 싸워 이기고 나와 처음 만나던 날에 그 녀석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왔군요.”

“네, 전하.”

“좋은 일이에요. 그대 같은 전사와 싸웠다면 그 늑대도 기뻐했을 거예요.”

사울의 농담에 아이나는 작게 웃었다.

농담이 웃겼다기보다는 사울이 농담을 할 만큼 회복된 게 기뻐서였으리라.

사울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나의 이야기도 이야기였거니와, 일부러 찾아와서 힘들게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고마웠다.

사울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어려운 말을 꺼낸 아이나가 정말 기특해 보였다.

이런 때에 이런 소녀와 함께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대의 말이 맞아요. 이번 일은 내가 죽는 날까지 절대로 잊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실패에 잡아먹히지도 않겠어요.”

아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는 분명 잘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요. 정말 고마워요, 아이나.”

아이나는 얼굴이 조금 빨개진 채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사울의 천막을 나왔다.

“…….”

천막 밖에 아르멜이 서 있었다.

아이나는 아르멜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아르멜이 그런 아이나에게 말했다.

“제 충고를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마음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전하께 힘이 되어 드리고 싶었을 뿐이니까.”

“…….”

할 말이 없어진 아르멜은 사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천막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사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나았다.

무엇보다 실패로 인한 자괴감을 꽤 덜어 낸 모양이었다.

“아르멜, 무슨 일이야?”

“전하, 내일 대족장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실 것인지…….”

사울과 업무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은 아르멜은 그의 천막을 나섰다.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려니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내 말이 맞지요?”

“…….”

“당신 눈에는 내가 어리고 분수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겠지요.”

아이나의 말에 아르멜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차라리 당신이 분수도 모르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면 신경을 안 썼을 겁니다. 전하는 분수를 모르고 어리석은 사람을 총애할 분이 아니니.”

“무슨 뜻이지요?”

“당신이 전하께 의지가 될 만한 능력과 인품이 있기에 문제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홉킨스 가문의 영애니까요.”

아이나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제 가문이 문제란 말인가요? 그러니 가능한 전하께 멀어지라?”

“나에겐 전하와 당신을 강제로 멀어지게 할 만한 권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권고합니다. 전하와 거리를 두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날 협박하는 건가요?”

“조언이라고 해 두지요.”

“…흥.”

아이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아르멜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가려 했다.

낯익은 그림자를 보지 않았다면.

“카스텔 님.”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 카스텔이 물었다.

“전하는 괜찮으신가요?”

“네, 아이나 아가씨의 위로가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그럼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군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가려는 카스텔을 아르멜이 붙잡았다.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인가요?”

“카스텔 님이 전하께 조언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언이라고요?”

“아이나 아가씨 말입니다. 홉킨스 가문과 왕실은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됩니다. 만에 하나 선이라도 넘는다면 전하와 홉킨스 가문 모두가 어려워 질 겁니다. 제가 전하의 친구 문제로 주제넘게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카스텔 님은 전하의 스승이 아닙니까.”

사울의 스승이자 누구보다 가까우며 연장자인 여성.

아르멜은 카스텔이야말로 이런 이야기를 하기 적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스텔은 아르멜의 뜻에 수긍 대신 반론을 했다.

“나에겐 그럴 권리가 없어요.”

“아니, 있으십니다. 전하의 스승이니 전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셔야지요.”

“올바른 길이라. 그럼 당신은 전하가 그릇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진 않습니다만…….”

아르멜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무표정한 카스텔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르멜은 카스텔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니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하거나 카스텔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뜻인데, 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면 이런 이야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아르멜은 대화를 중단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했다면 사과하겠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다시 하지 말아요.”

“네, 그럼.”

그렇게 카스텔은 아르멜을 떠났다.

“…….”

이런 자리에서는 항상 그렇듯 카스텔은 천막보다 노숙을 택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덕분에 한겨울 설원에서 나체로 잠들어도 동사는커녕 감기에 걸릴 일도 없다.

답답한 천막 안 보다는 벌판에서 하늘을 이불 삼아 잠드는 게 편하기도 했고.

오늘처럼 머릿속이 복잡한 날은 더더욱.

“…….”

사울의 천막 근처에서 대충 깔개를 깔고 누운 카스텔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주변에 수상한 기척이 느껴져서가 아니다.

마음이 불편한 탓이었다.

“전하와 그 아가씨는 분명…….”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카스텔이다.

인생의 적지 않은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시간을 세상 속에서 보냈다.

지금도 예의를 모른다거나 상식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그동안 보고 들은 건 적지 않았다.

카스텔은 아르멜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잘 알았다.

왕자 전하와 홉킨스 가문 영애가 지나치게 가까워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왜 아르멜이나 다른 자들이 불편해하는 지도 알았다.

카스텔이라면 둘 사이를 방해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카스텔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비겁해.”

스스로 비겁한 짓을 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다.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제자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게 두려웠다.

신분은 훨씬 높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온 애제자.

종종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제자.

첫 만남 때는 놀라 자빠졌던 주제에 이제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대하는 드문 사람.

그런 제자 보기 부끄러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것뿐이다.

최소한 카스텔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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