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다만 사울은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보았다.
비록 한 번 실패했다지만, 왕국에는 큰 해를 끼치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질타를 받을지언정 사울이 쌓아 온 모든 것을 무너뜨릴 정도는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형님과 만나 봐야 알겠군.”
아이나가 물었다.
“조나단 왕자님께서 언제 오신답니까?”
“조만간 오실 것 같아요. 연락이 오면 한 번은 만나러 가 봐야겠지. 그렇게 알고 모두들 준비하도록 해요.”
“네, 전하.”
“문제는 형님이 오기 전, 그리고 온 다음 어떻게 하느냐인데…….”
조나단이 놀러 온 게 아닌 이상 그의 존재는 사울의 계획에 있어 방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함부로 움직였다 무언가 어긋나면 이후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고.
형님이 도움은 안 될지언정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쓸 필요가 있었다.
“형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대기하도록 해요. 당분간 대신전이 혼란스러워 질 테니 도울 일이 있으면 돕도록 하고.”
“네, 전하.”
그때껏 입을 다물고 있던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전하.”
“할 말이 있어요?”
“전에 전하께서 얻은 마법 보석 말입니다.”
“아.”
꽤나 고생을 하며 얻었던 마법의 힘이 깃든 토파즈.
물론 잊지는 않았지만, 잠시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편지에는 마법 보석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전하께서도 아직 어떻게 가공 할 것이라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그래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보석을 이용해 위기 탈출용 아이템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위기 탈출용 아이템?”
위기 탈출용 마법 아이템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강력한 빛을 분출하여 잠시 적의 눈을 멀게 만드는 간단한 물건부터,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힘을 분출시켜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박살 내거나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물건까지.
그런 도구가 있다면 주변이 불바다가 된 상황에서도 안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런…….’
카스텔의 속내를 읽은 사울은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한 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 보기로 했다.
“그래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때요?”
그레이가 물었다.
“그런 도구가 있으면 전하의 안위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겁니까?”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레이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런 물건을 만들어야지요. 가뜩이나 위험한 일만 하시는 전하께 그러한 물건이 있다면 제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는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반면에 아르멜과 아이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사울의 뜻이라 생각한 것인지, 의견이 다르지만 카스텔이나 그레이와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사울이 본심을 밝힐 차례였다.
“선생님과 그레이의 뜻은 알겠지만, 난 반대야.”
“전하? 어째서입니까?”
눈을 휘둥그레 뜬 그레이에게 사울은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보다는 좀 더 가치 있게 쓰고 싶어.”
“전하의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게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드물게도 카스텔도 그레이와 의견이 일치했다.
확실히 잘못된 의견은 아니다.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다.
사울이 원하는 것도 살아 있은 뒤에야 이룰 수 있다.
이번에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덕분에 한 번 죽음이 끝이 아닐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다음 번에도 마찬가지란 보장은 없다.
어디에서도 사울 같은 예를 찾을 수 없는 것을 볼 때, 두 번째 기회는 없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하지만 사울은 마법 보석에 대해 달리 생각했다.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는 방법도 말이다.
“당연히 내 목숨은 소중하지요.”
“그럼 전하, 카스텔 씨의 말대로 하십시오.”
“선생님의 말뜻은 알겠어요. 당장 이번에 큰일을 당할 뻔했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생길지 몰라요. 하지만 이번에는 양보할 수 없겠어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이 정색했다.
“제 뜻에 따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미안해요.”
“…….”
“다시 말하자면 선생님과 그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요. 이번 일도 있었으니 날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최고의 위기 탈출용 아이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애초에 위기를 겪지 않을 만큼 실력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카스텔이 반론했다.
“아무리 실력을 키워도 위기를 겪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요?”
“전장에서는 누구나 위기를 겪게 마련입니다. 아시겠지만 저 역시 전장에서 죽을 뻔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카스텔이라 설득력이 넘쳤다.
하지만 사울은 카스텔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선생님 정도의 실력자가 죽을 뻔했다면, 아무리 훌륭한 위기 탈출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도 빠져나갈 수 없었을 거예요.”
“…….”
“그렇다면 차라리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을 줄이고 싶어요. 이번에 불길 속에 죽을 뻔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위험했지만 선생님 개인은 위험하지 않았지요. 나와 다른 사람을 지키느라 고생했을 뿐. 나나 다른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강했다면 죽기는커녕, 위기를 겪지 않았을 테지요. 그러니 마법 보석으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위기를 벗어나는 데 급급한 물건을 만들 게 아니라, 근본적인 힘을 키우고 싶어요.”
사울의 반론에 그레이는 카스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그로서는 반론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카스텔의 반론을 기대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카스텔은 그레이의 기대를 저버렸다.
“전하의 뜻이 그렇다면.”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울은 마법 보석에 대한 부분까지 결정지었다.
* * *
보름 후.
대신전에 머무르고 있던 사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조나단 형님이 도착했다고?”
“네, 하루빨리 전하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국경 지대에 도착한 조나단이 휘하 기사를 보내 사울을 초대한 것이다.
조나단을 만나는 건 크게 거부감이 없었지만, 대신전을 떠나, 중립 지대를 지나 왕국령 국경 지역에까지 오가는 시간이 조금은 아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모처럼 형님이 초대해 주었는데 거부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지금은 초대를 거부할 만큼 중요한 일정도 없었고.
“그렇게 하지. 나는 내일이나 모레 출발할 테니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하도록.”
“네, 전하.”
지금 대신전에서 사울이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콜리타의 사망으로 대신관 자리가 빈 가운데, 아직 새 대신관을 뽑지도 못 했다.
콜리타는 특별히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다.
정해진 후계자가 없을 때는 신전의 원로와 간부들이 모여 새로운 대신관을 정한다고 했다.
일반 신전에서는 신전의 우두머리를 정한 뒤 대신전의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대신전에서는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대신 정하는 과정이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새로운 대신관이 정해지기 까지 몇 달은 걸리리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 동안은 사울도 대신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새 대신관을 뽑는 일에 간섭할 수는 없었으니까.
어차피 지금은 할 일이 없으니 형님 얼굴을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다음 날.
사울은 대신전을 떠나 다르센 왕국령으로 돌아갔다.
목적지는 제르넬 요새였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그리고 중립 지대가 맞닿은 곳 근방에 위치한 요충지이며 현재 조나단이 머무르는 곳이다.
사울 일행은 이틀의 여정 끝에 별 일 없이 요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전하.”
“음, 수고가 많다.”
사울을 맞이한 기사들의 갑옷, 그리고 요새 곳곳에 휘날리는 깃발에 새겨진 하얀 매가 눈에 띄었다.
현재 조나단이 이끌고 있는 하얀 매 기사단이다.
하얀 매 기사단과 기존에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이 함께 주둔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존 병력에 새로운 병력이 합류한 탓인지 요새가 꽤나 북적였다.
사울은 기사의 안내를 받고 조나단을 만나러 갔다.
그런 사울을 바라보며 기사와 병사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저분이 사울 왕자님이신가?”
“그 뒤를 따르는 건 검은 마녀겠지.”
“요즘 저분들이 그렇게 유명하다면서.”
“그래, 홉킨스 가문 영지와 중립 지대에서 이런저런 활약을 많이 하셨다는 모양이야.”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최근 사울의 실패에 대한 건 전해지지 않았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새의 호의적인 반응에 사울은 한편으로는 안도했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조나단이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왜 자신을 불렀는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울은 조나단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요새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방이었다.
“전하! 사울 왕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커다란 문이 열리고, 화려한 방 안 풍경이 드러났다.
도에 지나칠 만큼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검소하지도 않았다.
사울 기준에서는 집무실 치고는 다소 지나치게 화려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형님과 오랜만의 재회에서 흠잡을 만한 일도 아니니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사울과 조나단은 서로 포옹을 나누었다.
일단 조나단은 사울을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이에 사울도 조나단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곧 마주 앉았다.
사울을 따라온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은 그의 뒤에 시립했다.
조나단 뒤에도 측근으로 보이는 몇 명이 시립했다.
조나단의 측근 중 한 명은 사울도 아는 얼굴이었다.
매버릭 스타우트.
왕국의 명문 스타우트 가문의 차남으로서 왕국의 젊은 기사들 중에서도 꽤 유명한 실력자다.
실력이나 가문으로 따지면 조나단이 아니라 차기 국왕 자리를 두고 다투고 있는 1왕자 실베스터나 2왕자 카리스 밑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인물.
그 정도의 인재를 용케 측근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훌륭한 부하들을 두셨습니다, 형님.”
사울의 칭찬에 조나단이 웃었다.
“매버릭을 알아 본 것이냐? 그래, 훌륭한 녀석이지.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다 훌륭한 녀석들이다.”
“물론 그렇겠지요. 형님께서 직접 곁에 둘 정도라면 보통 인재가 아닐 테니까요.”
“그래, 아쉬운 건 검은… 아니 카스텔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것이지.”
조나단은 카스텔이 검은 마녀라는 호칭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곤 말을 바꿨다.
사울의 형씩이나 되는 사람이 카스텔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 테니.
동생 부하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만들려는 작은 배려일 것이다.
‘아직은 별문제가 없군.’
사울은 일단 안도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아직 본론은 나오지도 않았으니까.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얼마 후.
마침내 조나단이 본론을 꺼냈다.
“슬슬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왜 너를 불렀는지 말이다.”
“네, 형님.”
“요즘 네 소문을 많이 들었다. 나만 듣는 게 아니다. 왕국에서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들을 게다. 한 번 실수를 했다고 네 명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과찬이세요.”
“과찬이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네가 대외 활동에 나설 때, 네가 미쳤다는 말이 돌았다. 나야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네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닌지 걱정했지.”
조나단이 이렇게 말하는 건 당연했다.
사울의 첫 번째 대외 활동은 막 성인식을 치른 왕자가 홉킨스 가문으로 가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니까.
다행히 첫 번째 단추를 잘 꿰었고, 덕분에 지금에 이르렀다.
“너는 그동안 홉킨스 가문 영지와 중립 지대 등을 다니며 여러 공을 쌓았지. 나도 마찬가지다. 기사단을 이끌고 각종 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또 몬스터 토벌 등을 성공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가 힘을 합치면 누구도 우릴 무시할 순 없을 게다. 설령 실베스터 형님이나 카리스 형님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