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아르멜과 매버릭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상급자를 비난하다니.
생각 없는 사람이나, 반대로 생각 많고 치밀한 사람이 상대를 대화에 끌어들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르멜은 후자라고 보았지만, 일단 모르는 척 말했다.
“당혹스럽군요. 이런 자리에서 왕자님을 비난하는 말을 들을 줄은 몰랐습니다.”
“비난이 아니라 비판입니다. 제가 모시는 분을 위한 정당한 비판 말입니다.”
“그 말을 조나단 왕자님이 들어도 납득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제 말을 전하께 전한다면 저는 그런 말을 한 것을 부인하겠지요. 증거도 없으니 전하께서는 제 말을 믿으실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우리 사이, 나아가 전하와 사울 왕자님의 사이도 벌어질 테고요.”
역시 만만치 않다.
아르멜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 드린 것처럼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길 원합니다.”
“조나단 왕자님이 사울 왕자님을 시샘하여 문제라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울 전하의 충복도 아닌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중재입니다.”
“중재요?”
“네, 두 왕자님이 사이좋은 형제로 남으려면 중재자가 필요할 겁니다. 저와 당신은 그에 적격이지요.”
중재자.
듣기만 하면 나쁠 건 없다.
아르멜이 생각하기에도 두 왕자의 사이가 벌어지거나 다투어서 좋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쪽이 서로 미워하는 건 물론, 한쪽이 일방적으로 시기하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 중재한다는 건 분명 유의미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르멜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겠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주제넘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게 제 입장이니 말입니다.”
“주제넘는 일이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지요. 형제지간의 일은 형제끼리 풀 문제입니다. 더군다나 아직 두 왕자님이 다투었거나, 장차 다툴 것이라는 근거도 없는데 우리가 그러한 일에 나서는 게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매버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
아르멜은 매버릭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더 야심만만하고, 동시에 위험한 자인 것 같다고.
“오늘 일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아르멜은 그대로 매버릭을 지나쳐 갔다.
마지막으로 매버릭이 말했다.
“그럼 저도 말한 적 없는 것으로 하지요. 다 잊으십시오. 그게 모두를 위해서 좋을 겁니다.”
* * *
조나단의 승전 기념 파티는 별일 없이 끝났다.
거나하게 취한 조나단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사울! 우리 형제가 힘을 합치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다! 너도, 나도 자리를 잡았으니 우리 앞으로 힘을 합쳐서 일 크게 해 보자!”
“네, 형님.”
조나단과는 달리 사울은 술을 거의 먹지 않았다.
원래 술을 크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또 술에 취해 정신 줄을 놓는 것도 원치 않았다.
부하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방으로 돌아간 조나단과는 달리 사울은 멀쩡히 혼자서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로 향하던 사울은 문득 아르멜에게 말했다.
“내 방으로 와.”
“네, 전하.”
사울은 누구도 들이지 않고 아르멜과 독대했다.
“조금 전에 매버릭과 자리를 비웠지?”
“네, 전하.”
“둘이 나간 시간도 달랐고 돌아온 시간도 달랐지만 서로 한 번은 마주친 것 같던데.”
“말씀대로입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어?”
사울의 질문에 아르멜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매버릭과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 이야기를 사울에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숨겨야 하나, 아니면…….
“형님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맞아?”
숨길 수 없음을 깨달은 아르멜이 실토했다.
“그렇습니다.”
“어쩐지 형님 쪽이 심상치 않더라니.”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나도 눈과 귀가 있어. 술까지 많이 먹은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사울의 말에 아르멜은 조금 전 조나단의 행동거지를 떠올렸다.
예의에 어긋나거나 사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행동은 한 적 없었는데…….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나단이 사고를 쳤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사울은 아르멜도 알아채지 못한 무언가를 조나단에게서 읽어 냈다는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나온 이상 아르멜은 더 숨길 수가 없었다.
아르멜은 매버릭과 오간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다 들은 사울이 혀를 찼다.
“그자가 그런 말을 했다고? 형님께서 호랑이 새끼를 곁에 두고 있군.”
“전하,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시지 않는 게…….”
“알고 있어. 형님도 그 매버릭을 꽤 신임하는 것 같던데 내가 말해 봐야 의만 상하겠지. 우리 둘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해.”
“네, 전하.”
아르멜은 새삼 사울에게 감탄했다.
이럴 때 사울은 정말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하고 또 영민했다.
마치 실제보다 나이를 20살 쯤 더 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형님이 술 먹고 한 이야기에 너무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하지만… 거슬리는 점도 있었어. 너는 듣지 못했겠지만, 자신이 꼭 동생보다 앞서야 한다는 식의 말을 했거든. 형님의 충복도 비슷한 것을 느낀 모양이야.”
“그런 모양입니다.”
“형님이 내게 열등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한심하긴, 나보다 대단한 자는 얼마든지 있는데.”
‘전하만큼 대단한 사람은 왕국에 얼마 없을 겁니다.’
아르멜은 속으로 생각하며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형님 일?”
“그렇습니다.”
“형님 비위 맞춰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아는 건 곧 루시아 누님도 알게 되겠지?”
“네, 전하.”
사울은 잊지 않았다.
아르멜은 자신의 부하가 아니라는 것을.
루시아 누님의 부하고, 누님에게 빌린 인재다.
당연히 이번 일도 루시아가 오래잖아 알게 될 것이다.
“루시아 누님이라면 일을 쓸데없이 키우지는 않겠지. 매버릭의 앞날은 걱정되지만.”
“그자도 그 정도는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루시아 누님의 귀에 들어갈 것을 알고도 그런 말을 했다고?”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면 그자도 정말 보통이 아니군.”
“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까요?”
“그렇게 해 줘. 급한 건 아니지만 좀 더 알아 둘 필요가 있겠어.”
“네, 전하. 그럼 돌아가실 겁니까?”
“그럴 생각도 했지만… 좀 더 머무를까 해.”
아르멜도 사울과 생각이 같았다.
“그게 좋겠습니다. 코볼트의 모습도 마음에 걸렸고, 좀 더 조나단 왕자님 쪽을 살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 * *
사울의 부하 누구도 요새에서 좀 더 머무르겠다는 사울의 뜻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레이마저도 모처럼 형님과 만났으니 친교를 나누라며 찬성했다.
“요새에 머무르면서 놀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가능하면 코볼트 무리 문제를 확실히 해결했으면 하는데.”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물었다.
“그 문제는 조나단 전하께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귀찮은 일을 형에게 떠넘기라는 말이 아니다.
함부로 움직이면 조나단이 세운 공을 빼앗으려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울도 그 점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형님과 의논을 할 거예요. 형님이 나서겠다면 그동안 내가 요새 수비를 도울 수도 있겠지요.”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이후 조나단과 만난 사울은 정확히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은 이야기를 조나단에게서 들었다.
“코볼트 말이지. 그래, 내가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무엇보다 코볼트 기병이 있다는 건, 꽤 세력 있는 코볼트 무리가 요새 주변에 있거나 혹은 요새를 노리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이 요새 주변에는 왕국군도 잘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몇 군데 있어. 그런 곳에 숨어 있던가, 보다 먼 거리에서 원정을 오는 것일 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음, 내가 놈들을 토벌할 테니 그동안 네가 이 요새를 며칠간 맡아 주겠느냐?”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인 조나단의 말에 사울은 수긍하면서도 겸손히 말했다.
“네, 형님. 하지만 제가 요새를 잘 관리할 수 있을지…….”
“너라면 안심이지. 몇 번 토벌전을 치르기도 한 네가 아니냐. 실패도 했지만, 성공을 더 많이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알겠습니다.”
뒷말은 다소 불쾌했지만, 사울은 모르는 척 받아들였다.
다음 날 조나단은 일단의 부대와 함께 요새를 떠났다.
문제의 매버릭도 함께.
그리고 사울은 남은 병력과 함께 요새의 관리자가 되었다.
“그럼 요새를 잘 지키고 있거라, 사울!”
“조심하세요, 형님.”
그렇게 조나단은 요새를 병력이 떠났다.
주변의 코볼트 무리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뿌리를 뽑겠다는 생각으로 요새 병력 절반 이상을 데리고 갔다.
임시로 요새 책임자가 된 사울은 요새를 둘러보았다.
정예라 할 수 있는 하얀 독수리 기사단이 거의 다 조나단과 함께 떠났기에 기존에 요새를 지키던 병력과 장교 몇 명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전력만으로도 요새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틸 수는 있겠지.’
생각해 보면 이번 생은 주로 공격하는 입장에서 실전을 치렀다.
요새나 거점을 지키는 전투는 주로 전생 때 많이 치렀고.
전생에 죽음을 맞았던 전투도 1차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에서 방어 측에 속했었으니까.
총 책임자 노릇도 어느 정도 해 봤다.
책으로 얻은 지식도 있고, 중간 관리자 입장에서 실전 경험도 있다.
사울은 그 모든 것을 활용하기로 했다.
일단 요새 구석구석을 점검했다.
조나단도 놀기만 한 건 아닌 듯 요새 상태가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에 밟히는 부분이 몇 있기는 했다.
“저기 성벽은 왜 부서진 채로 방치되어 있지?”
“네, 인력과 자금을 좀 더 급한 곳에 쓰기 위해 일단 놔두었습니다.”
“그런가.”
손을 놓은 건 아니지만, 인력과 자금이 부족하여 관리가 덜 된 곳이 몇몇 있었다.
사울이라면 아마 자신의 사비를 털어서라도 요새를 완벽하게 고쳤을 것이다.
돈이야 나중에 들어올 수 있지만, 한 번 뒤집힌 전황을 먼 훗날에 뒤집는 것은 어려운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 요새의 책임자는 조나단이다.
지나치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형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다.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 사울은 일단 요새의 구조를 바꾸지는 않았다.
대신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기로 했다.
“경계 병력을 두 배로 늘리도록.”
“네? 그것은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요새 전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형님과 기사단이 거의 다 빠졌어. 코볼트나 다른 적들이 그 기회를 노릴지 몰라.”
“아, 알겠습니다.”
지금 이 요새 주변에 적이라고 할 만한 건 코볼트 정도다.
보통 코볼트는 인간보다 지능이 낮기에 고도의 전략 전술을 구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요새의 전력이 빠져나간 뒤 빈집을 공격한다’는 건 고도의 전략 전술이 아니다.
생각을 할 줄 아는 녀석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한 일이다.
조나단에게도 조언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코볼트가 요새를 덮칠 수 있다고?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널 남기고 가는 게 아니냐.’
이왕 맡은 일이니 최선을 다할 뿐이다.
별일 없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적을 격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