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좋아. 내가 손을 써 줄 테니 제르넬 요새부터 중립 지대까지 샅샅이 뒤지며 피닉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도록 해.”
“네, 누님. 그리고…….”
사울은 누님이 던진 미끼를 대가로 받아 낼 것을 받아 내기로 했다.
“할 말이 있어?”
“네. 저와 조나단 형님이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요.”
사울은 이런 기회를 기다리며 지금껏 꺼내지 않은 ‘계획’ 이야기를 꺼냈다.
“코볼트 무리를 왕국 영토에 맞이하고 싶다?”
“네. 이건 중요한 일이예요.”
“그 코볼트 무리가 얼마나 되지?”
“아마 천 마리는 넘을 거예요.”
“네 말인즉, 천 마리가 넘는 코볼트 무리가 살 땅을 나더러 마련해 달라는 말이야?”
“네, 누님.”
말을 하는 사울 본인도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코볼트 무리에게 왕국의 금싸라기 같은 땅을 내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왕 왕국에서 그들을 받아들인다면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게 해 줘야 한다.
이종족이라도 기껏 자국에 받아들여서 굶겨 죽이는 건 왕국의 위상을 크게 깎아 먹는 짓이니까.
잠시 생각하던 루시아가 말했다.
“너희들은 이 정도의 일을 나나 아바마마의 허락도 없이 꾸민 건가?”
“죄송해요, 누님. 일을 서두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정 안 될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무를 수는 있어요. 하지만 이왕 시작한 일이니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 사울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아가 피식 웃었다.
“네가 일을 서두른 게 아니라 조나단이 서두른 것이겠지. 맞지?”
“…….”
역시 누님이다.
보지 않아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뭐 상관없지. 결국 너와 조나단이 함께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누님 말씀 대로예요. 그러니 저와 조나단 형님 둘 모두를 살려 주신다 생각하고 좀 도와주세요.”
루시아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 마침 괜찮은 땅이 한 군데 있어. 내기의 대가로 그 정도는 힘을 써 주지.”
* * *
누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사울에게 아르멜이 찾아왔다.
“정말 대담한 내기를 하셨습니다, 전하.”
“벌써 들었어? 소문이 빠르군.”
“왕녀 전하께서 직접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졸지에 저는 두 분의 내기의 심판 겸 전하의 도우미가 되었고요.”
“누님께서는 내게 ‘전적인 지원’을 약속했어.”
“네. 전하께서는 약속을 지키실 겁니다. 저는 물론, 회색 그림자의 유능한 요원들 여럿이 오늘부터 전하를 따를 겁니다. 필요하다면 회색 그림자를 통해 자금 지원, 병력 지원도 가능할 겁니다.”
확실히 루시아는 약속을 지킨 모양이다.
사울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그럼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지. 요원의 절반은 중립 지대에, 나머지 절반은 제르넬 요새와 그 주변을 조사하도록 해. 우리와는 별개로 움직이며 피닉스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모으도록.”
“알겠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어쩌실 겁니까?”
“일단 형님께 돌아가야지.”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루시아와 헤어진 사울은 제르넬 요새로 돌아갔다.
며칠 자리를 비운 동안 큰일은 없었다.
일단 사울은 조나단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누님은 안녕하시더냐?”
“네. 아주 건강하시더군요.”
“어련하겠나. 그래, 그 이야기는 했고?”
“네. 당분간 우리가 하던 대로 계속하면 될 것 같아요. 다만 누님이 한동안 이 주변 일들을 직접 챙기실 것 같고요.”
조나단이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내가… 아니, 우리가 활약을 좀 하나 싶더니.”
“누님은 우리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한 보장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사울의 말에도 조나단은 조금의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 말을 믿느냐? 누님이 어떤 사람인데. 보나 마나 우릴 감시하고 또 간섭하려 들게다.”
조나단이 근거 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다고 포기하는 건 옳지 않다고 여겼다.
“누님은 왕녀이고 저와 형님은 왕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잘하면 누님도 우릴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예요.”
“…그런가?”
“네, 형님. 지금은 우리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최선이에요.”
“그건 그렇구나. 아, 그 코볼트 부족이 머무를 땅 이야기는 해 보았나?”
“네.”
사울은 루시아가 알려 준 땅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루시아가 알려 준 곳은 왕국의 거대한 황무지였다.
황무지라고 하여 사람이 못 살 정도로 황폐한 땅은 아니었다.
다소 척박하고, 출입하는 지형이 불편하며, 몇 번 전란에 휩싸여 주민들이 버리고 간 땅일 뿐.
나라에 여유가 생긴다면 개척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인간이 아닌 이종족에게 넘겨준다.
물론 대가로 세금 등을 받겠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울은 걱정하지 않았고, 조나단도 마찬가지였다.
루시아가 약속했다면 분명 그대로 될 것이다.
자신들은 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조나단은 문서 몇 장을 꺼내 내밀었다.
“너도 읽어 봐라.”
문서는 코볼트 부족에 대해 기록된 것이었다.
손을 잡기로 한 코볼트 부족장이 직접 전해 준 정보가 아니라 요새 병사나 정보원을 동원해 직접 얻은 정보였다.
사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조나단 스스로, 혹은 매버릭의 조언 하에 이 일을 진행한 모양이었다.
“코볼트 부족과 피닉스가 연관되어 있고, 피닉스는 코볼트 족장 여럿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 그들의 위치가 어느 정도 파악된 모양이군요.”
“그렇다는구나. 우리가 알아냈을 정도면 그 코볼트 족장이나 다른 코볼드 놈들도 알고 있을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 힘을 빌리려는 건 피닉스의 전력이 만만찮다는 뜻이지요.”
“그 말대로다.”
사울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코볼트 족장이 우리와 싸우는 척하기로 한 건 어떻게 되었나요?”
“놈들 병력이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다. 약속한 것도 있으니 일단은 놔두고 있지.”
“그렇군요.”
“조만간 코볼트 족장이 연락을 취해 올 게다. 이왕 우리가 정보를 손에 넣었으니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어떻겠느냐?”
사울은 조나단 곁에 있던 매버릭을 살폈다.
그가 생각하기에 문제가 있다면 벌써 조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버릭은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매버릭과 의논을 끝낸 사항일 것이다.
‘다소 위험하지만 나쁜 전략은 아니야. 코볼트 쪽에 아군을 만들어 두면 이래저래 도움이 될 테고. 또 우리 쪽에서 큰 빚을 지우면 이후 그들을 활용하기도 쉬울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말이 옳은 것 같아요.”
“좋다. 그럼 코볼트를 돕고 그들을 최대한 이용하자꾸나.”
“하지만 형님, 얼마 전에 요새에서 코볼트와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곧바로 그들을 도우면… 요새에서 반발하는 자가 생길 겁니다.”
조나단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걱정 말거라. 그 정도는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
조나단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사울은 일단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 * *
이틀 후.
코볼트 족장이 제르넬 요새를 찾았다.
사절을 보내지 않고, 직접 요새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대가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군.”
“일이 시급해서 급히 왕자님을 뵈러 온 것이오.”
“일이 시급하다? 그대들의 병력도, 우리들의 병력도 예정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쪽은 문제가 아니오. 놈들에게 붙잡혀 있는 다른 족장들이 문제요.”
“무슨 뜻이지?”
“아무래도… 피닉스가 다른 족장들을 모두 죽일 생각인 것 같소.”
조나단에게도, 곁에서 듣고 있던 사울에게도 크게 놀랄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
단지 예상보다 좀 빨랐을 뿐.
“근거는 있는 말인가?”
“그렇소. 아직 다른 족장들은 무사한 것 같지만 부족의 간부들에게서 이상한 움직임이 엿보이고 있소. 기존의 족장을 몰아내고 피닉스와 손잡은 간부가 새로운 족장이 되려는 듯하오.”
사울이 한마디 했다.
“전형적인 ‘꼭두각시 만들기’ 수법이군요.”
“그 말대로요.”
“피닉스가 새 족장을 박아 둔다면, 그 부족 전체가 피닉스의 완전한 노예가 될 거예요. 그 전에 움직일 필요가 있겠어요.”
“그렇소.”
다시 조나단이 물었다.
“협상 따위로 놈들과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테고. 병력이 필요하지 않나?”
“병력은 준비했소.”
“어떻게?”
“우리 부족의 병력들, 그리고 다른 부족과 접촉해서 일부 병력을 숨겨 놓았소.”
“전면전을 펼치겠다는 말이군. 작전은 세웠나?”
코볼트 족장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냈다.
간략하게 그려진 지도지만 대충 지형이나 병력의 배치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가 모은 병력이 주가 되어 싸울 계획이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하오.”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아직 많지는 않지만 이미 그들의 충복이 된 동족이 여럿 있소. 그리고 피닉스라는 자들은 개개인이 실력자들이지. 실력자를 상대하려면 압도적인 머릿수나 그들 못지않은 실력자가 필요할 것 같소.”
결국 병력이나 실력자 둘 중 하나, 혹은 양쪽 모두를 빌려 달라는 뜻이다.
조나단도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겼는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한편 사울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실체조차 불분명한 피닉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다소 위험해도 위험 부담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했다.
‘문제는 내가 지나치게 돋보이면 조나단 형님이 묻힐 수 있다는 것인데…….’
사울 본인이 나서기도 해야겠지만, 조나단 역시 공을 세워야 한다.
이것은 그냥 싸워 이기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문제다.
조나단을 챙기려다 정작 작전에 실패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사울은 방법을 찾아냈다.
“형님, 좋은 생각이 있어요.”
“말해 봐라.”
”제가 카스텔 선생님을 비롯한 소수의 실력자들과 함께 코볼트와 움직이겠습니다. 형님은 우리가 그들과 싸울 때 요새의 병력을 이끌고 저들을 포위한 뒤 쓸어 버리시는 거예요.“
전장에서 눈에 띄게 움직이며 통쾌하게 싸우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조나단에게 맡긴다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작전에 성공한다면 그만큼 조나단의 화려한 전공이 눈에 띌 테고, 실제로도 한 일이 적지 않으니 누가 뭐래도 큰 공을 세웠다고 인정할 것이다.
그 사이 사울은 코볼트와 함께 움직이며 피닉스에 대한 정보들을 제대로 모을 계획이었다.
“으음…….”
조나단은 쉽사리 알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을 하다 조용히 사울에게 물었다.
“괜찮겠느냐? 위험할 수 있다.”
그래도 형제라고 동생 걱정을 해 주는 조나단의 모습에 사울은 안도했다.
형님이 생각만큼 욕심에 눈이 먼 건 아닌 모양이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괜찮습니다, 형님.”
사울의 말에 조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버릭 역시 조나단에게 무어라 조언을 했다.
매버릭의 조언까지 들은 조나단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좋다. 이왕 약속한 것. 나 또한 확실히 도와주지.”
“감사하오.”
“이번 일이 성공한다면 약속대로 너희들은 안전한 거주지를 얻게 될 것이다.”
“그 일이 정해졌소?”
“그래. 수천의 코볼트가 머무를 수 있는 땅을 확보했다.”
조나단은 루시아가 알려 준 황무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코볼트 족장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감사하오.”
“나는 약속을 지킬 준비를 다 했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도록.”
“물론이오.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서 이번 일을 준비하겠소.”
그렇게 코볼트 족장이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