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로터스 베르카스.
가멜다 왕국의 귀족이자 피닉스와 관련이 있는 자.
그리고 사울 전생의 원수 중 한 명.
로터스의 존재를 감지한 사울은 본격적으로 놈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 사울을 당장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울 스스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다시 태어난 후 로터스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로터스를 향한 사울의 복수심은 다른 사람들로선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로터스를 노릴 이유도 충분했다.
로터스를 잡음으로써 피닉스와 가멜다 왕국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가멜다 왕국까지 곤경에 처하게 만들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사울이 로터스를 조사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전하, 이것이 로터스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아르멜이 가져온 문서들을 본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검토해 보지.”
왕국 정보부의 조사에 따르면 로터스는 6년 전쟁 이후 잠시 권력을 누렸다.
승리한 전투에서는 공을 가로채고, 패배한 전투의 책임은 타인에게 떠넘긴 결과였다.
하지만 부귀영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본래는 로터스의 후견인 중 한 명이던 안소니 백작과 갈라선 탓이었다.
로터스와 안소니 백작이 갈라선 이유는 왕국 정보부도 정확히 알아내지 못했다.
정치판에서 흔히 벌어지는 것처럼 안소니가 로터스를 토사구팽 하려 했거나, 반대로 로터스가 다른 후견인을 찾으려다 틀어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갈라섰고, 이긴 건 안소니 백작이었다.
안소니 백작은 로터스는 물론 그의 후견인까지 정계에서 축출했고, 로터스가 가지고 있던 권력과 재산은 모두 안소니 백작의 것이 되었다.
과거 ‘롤랜드’의 재산도 말이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안소니 백작이 사울의 원수인지 아닌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어쩌면 전생에 당했던 그 모든 고난의 원흉이 안소니 백작일 수도 있다.
반대로 백작은 그 일과 무관하고, 모든 건 로터스가 꾸민 일일 수도 있다.
‘역시 로터스 이자를 잡아 족쳐야 모든 걸 알 수 있을 것 같아.’
정계에서 축출된 로터스는 10년 넘게 말 그대로 은둔자에 가까운 삶을 보냈다.
그러다 약 2년 전부터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동아줄을 잡았는지 왕국의 한직을 전전하다, 최근 중립 지대 인근 지역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본래 가멜다 왕국에서 중립 지대 인근을 관리하는 건 그와 인접한 소라드 지역을 다스리는 행정관 라켈 슬리드 남작, 그리고 군사 책임자인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중립 지대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 또 한 명의 인재가 파견되었고, 그것이 바로 로터스 베르카스 남작이라는 것이었다.
‘정말 질긴 녀석이군. 한 번 토사구팽을 당하고도 다시금 정계에 기어들어 오다니. 하지만 잘되었어.’
아무리 사울이라도 적국의 귀족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뻗기는 어렵다.
하지만 로터스 같은 자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귀족 사회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녀석이 중립 지대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다지 않은가.
좀처럼 찾기 힘든 좋은 기회다.
문제는 어떻게 로터스를 잡느냐이다.
사울이 대놓고 가멜다 왕국령에 쳐들어가 로터스를 잡거나 공격할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아무리 왕자라도 뒷감당이 어렵다.
하지만 반대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저쪽에서 전쟁을 일으킨다거나, 혹은 저쪽에서 먼저 사울을 공격한다던가.
혹은 로터스를 가멜다 왕국령이 아닌, 중립 지대나 다르센 왕국으로 오도록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참 생각하던 사울은 자신이 아는 로터스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바보는 아니지만 욕심이 상당히 많던 녀석이다.
십 년 넘게 숨죽이고 살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 욕심 역시 건재할 것이다.
놈이 왜, 그리고 어떻게 피닉스와 관련을 맺었는가는 알 수 없었다.
피닉스가 그에게 돈이나 권력을 약속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그들과 접촉하여 손을 잡은 것일까.
‘어느 쪽이든, 놈을 잡으면 알 수 있겠지.’
로터스를 잡는 것.
지금의 사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 * *
킬리안은 칼립소, 그리고 제온까지 데리고 중립 지대와 가멜다 왕국령을 넘나들며 ‘사업’을 확장하는 것에 한창이었다.
율렌 섬에 전운이 높아지며 이래저래 악마 토끼풀의 수요는 높아졌고, 덕분에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가멜다 왕국령은 물론, 다르센 왕국에도 어느 정도 다시 손을 뻗쳐 나가는 데도 성공했다.
자신과 함께 움직였던 가르시아 남매와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게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킬리안은 안소니 백작의 연락을 받고는 모처럼 그의 집을 찾았다.
다른 일이 있던 칼립소 대신 제온과 함께 백작 저택에 방문했다.
“오랜만입니다, 백작님.”
킬리안은 싸늘한 냉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확실히 성품과는 별개로, 예의만큼은 크게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래. 오랜만이군.”
인사를 받아 준 안소니 백작은 킬리안과 제온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그 다크 엘프는 오지 않았나?”
“제가 자릴 비울 때 관리를 할 녀석은 필요해서 말입니다.”
“그런가.”
백작은 그 이유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킬리안 나름대로 보신책을 마련한 것 아니겠는가.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킬리안과 제온이 제거된다면 따로 움직이는 칼립소가 모든 것을 폭로해 백작을 지옥에 끌고 갈 것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백작은 킬리안을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은 말이다.
백작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무슨 일입니까?”
“오래 살려 두면 안 될 놈이 있다.”
킬리안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굴 제거하면 됩니까?”
“로터스 베르카스 남작.”
목표의 이름을 들은 킬리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제온에게 물었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두목. 저는 아는 이름입니다.”
“그래? 뭐 하는 놈이지?
”최근 가멜다 왕국에서 새로 중립 지대 인근에 파견한 녀석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그랬지. 그놈 이름이 로터스였나?”
목표의 정체를 파악한 킬리안이 백작에게 물었다.
“그 정도면 문제없습니다. 조용히 암살 할까요, 아니면 피바다를 만들고 목을 베어 백작님께 선물로 드릴까요?”
“둘 다 곤란하다. 사고나 재난, 혹은 전쟁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야 한다.”
백작의 말뜻을 알아들은 킬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과연. 그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일 뿐, 백작님이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가능하겠나?”
“그냥 목을 따는 것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백작님의 말씀을 들어 보니 공작이 필요하겠군요. 그 정도의 일을 하려면 노력과 시간, 자금이 필요할 겁니다.”
“어느 정도의 자금을 원하나?”
킬리안은 일반적인 살인 청부 금액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막대한 액수를 말했다.
돈과 권력을 가진 백작에게도 큰돈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백작이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이자 킬리안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중요하신 일인가 봅니다.”
“그래. 놈의 목숨값은 확실히 지불할 테니 빈틈없이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의뢰를 받아들인 킬리안은 백작의 저택에서 나오며 제온에게 말했다.
“똑똑한 네가 보기엔 어때?”
“백작의 진의가 궁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숨기는 건 있지만 두목을 속이는 낌새는 없었습니다.”
“함정을 파서 내 목을 베려는 건 아니다?”
“네, 두목. 아직은 우리나 백작이나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살인 청부를 받고 그 사정을 시시콜콜 캐묻는 건 안 될 일이다.
그렇지만 킬리안은 금기를 깨기로 했다.
“역시 뭔가가 있다.”
“두목. 설마 그 로터스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곧바로 실행하도록.”
“하지만… 너무 일을 지체하면 백작이 화를 낼 겁니다.”
“그 남작 놈을 처리하는 건 나나 칼립소가 할 수 있다. 그 일은 이쪽에 맡기고, 넌 그 로터스라는 놈에 대해 알아봐라.”
제온은 더 말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았다.
또 킬리안이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만으로 명령을 한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무서울 만큼 뛰어난 동물적 감각.
특별한 배경이 없는 킬리안을 율렌 섬의 거물로 만들어 준 비결 중 하나다.
그 동물적 감각이 무언가 냄새를 맡은 게 틀림없었다.
예를 들면 백작의 약점을 잡을 만한 무언가를.
* * *
사울은 피닉스의 연락책에게서 정보를 다 얻은 뒤, 루시아에게 넘기곤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대신전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지금쯤이면 대신전에 ‘신관 실종 사건’이 보고되었을 것이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울 쪽에서 신관 한 명을 납치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자신감을 얻은 사울은 본격적으로 로터스에 대한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전하. 여기 로터스에 대한 정보입니다.”
“피닉스와 로터스의 연결 고리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럼 피닉스 조직원을 좀 더 찾아봐야겠군. 다른 쪽으로 계속해서 알아보도록.”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현재 로터스의 상황은 썩 좋지 못한 듯했다.
그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중립 지대에서 공을 세워 가멜다 왕국의 정계에 복귀하느냐, 평생 잊혀지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안 사울은 로터스가 피닉스 같은 놈들과 손을 잡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는 일을 잘하는 것만으로는 권력을 되찾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피닉스 같은 자들과 손을 잡은 게 아니겠는가.
‘여전히 그놈은 권력에 눈이 멀었군.’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사울 역시 ‘롤랜드’였던 시절에는 부와 권력을 위해 노력하며 살았으니까.
하지만 롤랜드는 자신을 믿는 자를 먼저 배신하거나 저버리지는 않았다.
그것이 사울이 로터스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롤랜드와는 달리 로터스는 롤랜드를 저버렸고, 그 때문에 롤랜드 개인은 물론 가문과 가족들이 모두 비참하게 몰락했다.
그 대가는 목숨으로도 부족하다.
얻을 정보를 다 얻은 사울은 다시 피닉스 사냥에 나섰다.
사냥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미 여러 번 공격당하고, 조직원을 잃은 피닉스에서 사울을 요주의 대상에 옮겨 놓은 게 분명했다.
그 결과, 이제 피닉스는 사울이나 다르센 왕국의 주변에서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장거리 원정을 감수해야 했고, 그러자 반대하는 자도 나왔다.
“그렇게 멀리 나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사울의 원정 계획을 들은 외교관들이 손사래를 쳤다.
“위험합니다, 전하.”
“위험하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왕국을 위해서 그 정도는 감수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약속하지요. 만에 하나 일을 실패하거나 내가 다쳐도 그대들에게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어요. 그러니 날 지원해 줘요.”
어릴 때부터 돌봐 온 그레이도 꺾지 못하는 사울의 고집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외교관들이 꺾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