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핏기가 사라진 로터스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사울이 손을 뻗었다.
주변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사일런트’ 마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외부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한 사울은 검으로 로터스를 찔렀다.
“으아악!”
팔에 검이 찔린 로터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사울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말했다.
“왜 그랬어. 왜 날 배신했지?”
“모, 몰랐소! 난 정말!”
“내가 왕자가 될 줄 몰랐다고? 당연히 그랬겠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야.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이 겪은 일일 테니까. 어떻게 내가 이러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정말 궁금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왜 날 버렸어. 왜 날 버리고 내 가족들까지 그렇게 죽게 만들었어!”
사울은 다시 로터스를 찔렀다.
로터스는 비명을 내지르며 실토했다.
“내 책임이 아니오! 난 그럴 권한도 없었습니다! 전부 안소니 백작 잘못입니다. 모두가 놈이 한 일입니다!”
“그래?”
사울은 몇 번 더 로터스를 찔렀다.
하지만 로터스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말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좋아. 믿어 주지.”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살려 달라고.”
사울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 자그마한 불길이 피어올랐다.
대단한 위력의 마법은 아니지만, 상처 입은 채 묶인 초라한 남자 한 명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불태울 듯 이글거리는 불덩어리에 로터스가 언성을 높였다.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날 살려 준다고 말입니다!”
사울의 입가에 냉소가 스쳤다.
“넌 롤랜드와 약속을 했지. 도와주고 지켜 주겠다고. 그리고 만에 하나 전장에서 나쁜 일을 당하면 가족과 가문의 안위를 책임지겠다고. 그 약속을 지켰나?”
“그, 그건…….”
“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나도 지킬 이유는 없지.”
말과 함께 사울은 불덩어리를 날렸다.
온몸이 불에 휩싸인 로터스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 후, 로터스의 죽음이 코앞에 이른 것을 본 사울은 소음을 차단하는 ‘사일런트’ 마법을 풀었다.
“으아악!”
죽어가는 로터스가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지금 문 밖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명령 없이는 절대 들어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다.
하지만 난데없는 비명 소리에, 명령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뛰어 들어 온 경비병들은 불덩어리가 되어 죽어 가는 로터스의 모습에 경악했다.
사울은 일부러 숨을 몰아쉬며 그들에게 말했다.
“저놈이 날 습격했다.”
곧 대혼란이 벌어졌다.
* * *
혼란이 가라앉고, 사울은 모두에게 준비해 둔 이야기를 꺼냈다.
개인적으로 로터스를 심문하면서 정보를 좀 더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보를 토해 낸 로터스는 스스로 이중 첩자가 될 것을 제안하며 동시에 은밀한 대화를 요구했다.
그 제안에 흥미를 느낀 사울은 로터스의 요구대로 ‘사일런트’ 마법을 시전했고, 이에 로터스는 남아 있던 힘으로 밧줄을 풀고 사울을 공격하려 했다.
이에 사울이 검으로 찌르고 마법으로 반격을 했고, 그렇게 로터스가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나는 놀란 표정으로 사울의 안부부터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좀 놀라기는 했지만…….”
아르멜은 숯덩이가 된 로터스와 사울을 번갈아보다 물었다.
“모를 일이군요.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여 포박을 단단히 확인했습니다만.”
“나도 예상치 못했어. 실수야.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일단 아르멜도 지금의 상황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의심하지 않는 것인지, 의심해도 입 밖에 내지는 못하는 것인지는 사울로서도 알 수 없었다.
“…….”
카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울은 그런 카스텔의 태도가 누구보다 신경 쓰였지만, 먼저 묻지는 않았다.
이럴 때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예정대로 로터스를 죽였으니 뒤처리도 완벽해야 했다.
사울은 많이 놀란 듯 황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멜.”
“네, 전하.”
“뒷수습을 부탁해. 난 쉬어야겠어.”
“전하, 의사를 부를까요?”
“괜찮아. 다치지는 않았으니까. 모두들 나가 줘.”
“알겠습니다. 어서 시체를 치워라!”
곧 로터스의 시체는 치워지고 모두들 방에 나갔다.
사울 또한 잿더미와 탄 냄새가 역력한 천막을 비우고, 다른 천막으로 옮겼다.
“전하.”
아이나가 그런 사울을 뒤따라왔다.
걱정스런 아이나의 표정은 지금 사울에게는 부담스러웠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워요. 난 괜찮으니 오늘은 혼자 있게 해 줘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사울은 새 천막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울은 간이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아니, 눈을 감아서인지 더더욱 로터스의 마지막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모습.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모습.
원수를 죽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 복수를 했으니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만큼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죄책감 따윈 느껴지지 않았지만, 로터스가 죽는 광경을 거듭 떠올려도 속이 시원하거나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사울은 오래잖아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진짜 원수는 살아 있기 때문이겠지.”
로터스는 따지고 보면 졸병에 불과했다.
진짜 원수는 6년 전쟁 당시 로터스의 상관이었던 안소니 백작이다.
안소니 백작, 그리고 ‘롤랜드’의 죽음에 관련이 있는 또 다른 자들.
그들 모두에게 복수를 한다면 이 답답한 속도 풀리지 않을까.
그리고 어디 묻힌 지도 알 수 없는 어머니와 여동생도 편히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사울은 그러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끝내 잠을 이루지는 못했다.
* * *
“전하…….”
자신의 천막으로 돌아온 아이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사울이 갑작스레 로터스의 공격을 받은 것에 놀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게 아니었다.
사울은 로터스가 갑자기 자신을 공격했고, 그래서 죽였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이나는 웬지 사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 같아서는 사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묻는다고 사울이 곧이곧대로 답해 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 사울은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 줄 것 같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언제나 비밀이 많은 사울이었지만,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모습을 보여 준 적은 없다.
그 로터스라는 자와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혹시 그자가 전하를 화나게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홀로 생각을 거듭해 봐도 아무런 해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잠을 청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생각 끝에 아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소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 보아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아이나는 대충 옷을 챙겨 입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지금 의논할 만한 사람이라 해 봐야 떠오르는 건 두 명뿐이었다.
아르멜, 그리고 카스텔.
‘아르멜은 아니야.’
아이나는 아르멜에게는 속을 터놓기 어렵다 여겼다.
그렇다면 남은 건 카스텔뿐이다.
분명 카스텔은 이래저래 특별한 사람이지만, 사울을 향한 진실한 태도와 충성심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거기에다 아이나 본인이 그러하듯, 사울에게 미묘한 감정을 품은 사람이기도 하다.
결정한 아이나는 카스텔을 찾았다.
개인 천막보다는 노숙을 선호하는 카스텔이다.
또 어딘가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카스텔 씨를 보지 못했나?”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경비병의 가리킨 곳으로 간 아이나는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커다란 숯덩이를 살펴보는 카스텔의 모습이었다.
‘커다란 숯덩이’는 바로 로터스의 시체였다.
시체를 처음 보는 것도, 하다못해 불탄 시체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나는 적잖이 놀랐다.
시체를 보아서 놀란 게 아니라, 카스텔이 로터스의 시체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
시체를 살피던 카스텔도 아이나의 시선을 눈치챈 듯 움직임을 멈췄다.
“카스텔 씨.”
“오셨습니까.”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카스텔은 대답 대신 눈짓을 했다.
장소를 옮기자는 뜻임을 알아들은 아이나는 카스텔이 이끄는 대로 으슥한 곳으로 움직였다.
주변에 둘만 남게 되자 카스텔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비밀을 지켜 주시겠습니까?”
아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죽은 로터스의 시체를 살펴보았습니다.”
“어째서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물었다.
“뭘 알아냈나요?”
“전하께서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셨습니다.”
“…….”
“아가씨도 짐작했습니까?”
“전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숨기고 계신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그래, 대체 무엇을 알아냈나요?”
카스텔은 타다 남은 재가 묻은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전하께서는 용의주도한 분이십니다. 입을 막아야 할 자를 죽이고, 시체마저 태워 버렸으니 웬만해서는 흔적을 찾아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
“하지만 면밀히 조사해 본 결과 몇 가지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이 로터스라는 자는 결코 전하께 해코지를 하지 못했습니다.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했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상처 입은 자를 불태워 고통스럽게 죽이신 것 같습니다.”
실전 경험이 결코 적지 않은 아이나마저도 눈살을 찌푸렸다.
전장에서 화염 마법으로 적을 불태우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저항하지 못하는 포로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고 불태우기까지 했다?
이는 아이나의 시각에서도 잔인한 일이었다.
“전하께서… 대체 왜?”
“저도 궁금합니다만, 결코 전하께서는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겁니다.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무엇을 짐작하고 있나요?”
“상대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정보가 필요했다면 절 불렀거나, 이보다는 온건한 방법을 택하셨겠지요. 이렇게 난폭한 방법을 택하셨다는 건… 상대에게 깊은 원한이 있다는 뜻일 겁니다.”
아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외에는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대체 전하께서 왜 로터스에게 원한을 품으셨다는 말인가요?”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나요?”
“네. 전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전하에 대한 모든 것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와 원한을 품을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아이나는 사울에 대해 생각한 끝에,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사울의 아버지인 국왕 마렌 다리우스는 멀쩡히 살아 있지만 분명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혹시 전하의 모친과 관련된 게 아닐까요?”
“아닐 겁니다. 저도 전하의 모친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습니다만, 로터스와는 어떤 접점도 없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아이나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카스텔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사울은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사람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일 정도면 보통 원한이 아니다.
삶을 망치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나로서는 도무지 사울의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결국 생각을 그만둔 아이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나는 전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가요.”
“아가씨도 알고 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수수께끼가 많은 분이십니다. 어쩌면 저도, 아가씨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조금이나마 드러난 것이겠지요.”
“…….”
아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스텔도 더 말하지 않고 그런 아이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렇게 아이나는 홀로 천막에 돌아왔다.
마음을 어느 정도 털어놓고, 새로운 사실도 알았지만 조금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훨씬 복잡해 진 기분이었다.
“…….”
카스텔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아군 진지로 돌아온 카스텔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깔고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