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뜬눈으로 밤을 지샌 사울은 피로를 참으며 오늘의 일정을 준비했다.
몸도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편치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사울은 피로함을 숨기고 천막을 찾아온 아르멜의 인사를 받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현재 상황은?”
“이번에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로터스에게서 들은 증언들도 충분히 기록했습니다.”
아르멜의 보고를 받은 사울은 따로 기록한 서류 몇 장을 내놓았다.
“전하, 이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놈에게 새로 들은 이야기들이야. 유용한 것이 있을지 모르니 참고해 봐.”
사울이 내놓은 서류는 로터스의 자백 내용 중 ‘롤랜드’와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아르멜이 미처 질문할 생각을 하지 못한 가르멜 왕국의 시시콜콜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유용한 정보가 될 가능성은 낮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네, 전하.”
“다른 일은 없나?”
“특별히 보고드릴 만한 일은 없습니다.”
“알았어. 이곳 일이 다 수습되면 곧바로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르멜의 표정이나 말투는 크게 특별한 게 없었다.
속으로는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당장은 특별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르멜이 물러가고, 사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문제는…….’
로터스는 절대 살려 둬서는 안 될 놈이었다.
그를 죽인 것, 나아가 참혹하게 죽인 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문제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머리를 써서 죽였고, 특별히 실수를 저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울도 지금 상황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의심의 많은 녀석이라면, 혹은 사울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의심을 할 수도 있다.
‘아르멜은 당장 내게 무언가 따질 생각은 없어 보였어. 누님께는 뭐라 보고를 할지 모르겠지만 뒷일은 충분히 준비할 수 있고. 지금 문제는 아이나나 카스텔인가.’
아르멜 쪽은 당장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낮다.
설령 이번 일로 의심을 품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의심을 품고, 그 의심이 루시아에게 전달되면 골치 아프겠지만 대비할 시간은 있다.
하지만 아이나나 카스텔은 다르다.
그들이 의심을 품으면, 아마도 직접 풀려고 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행동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는 법.
언젠가 이번 일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어쩌면 이미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
‘각오를 해야겠지.’
복수는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각오를 굳힌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막 밖으로 나가보니 바깥 분위기는 분주했다.
철수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피고, 정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주변을 살피는 사울의 눈에 병사들에게 무언가 명령을 내리는 아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나도 사울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고, 이내 달려와 예를 표했다.
“전하.”
아이나도 밤새 잠을 못 이룬 모양이었다.
피곤하다고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전하께서는…….”
“그대나 나나 잠을 못 잔 것 같군요.”
“…….”
아이나는 쉽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언가 숨길 게 있는 사람이 저런 태도를 취하기 마련이다.
‘역시 어제 일을 의심하고 있는 건가.’
아이나는 순진한 면이 있지만, 결코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다 눈썰미도 좋으니 어제 일에서 무언가 이상함이나 어색함을 느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도 각오했다.
이 일 때문에 사이가 어색해지고 또 멀어져도 할 수 없다.
전생의 복수는 현생에서 꼭 이뤄야 했으니까.
일단 사울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생이 많았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도 어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전하께서야 말로 큰일을 겪을 뻔 하셨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딱딱한 목소리에 어색한 미소.
사울은 자신 또한 아이나처럼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전하.”
마침 카스텔도 사울을 찾아왔다.
항상 그렇듯 카스텔의 표정이나 눈빛에서 감정을 읽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검은 마녀’는 감정이라는 게 없는 인간이라는 소문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울은 카스텔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지금 카스텔이 감정적으로 다소 불안정하다는 사실도.
“선생님도 고생 많았어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은 고개를 숙이며 짧게 대답했다.
“저는 언제나 전하를 따를 뿐입니다. 전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
“…….”
때가 때인 탓인지 카스텔의 말이 꽤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하지만 사울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카스텔도 더 말하지 않았다.
사울은 카스텔이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할 말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 일로 이래저래 생각하는 게 많은 모양이군.’
역시나 로터스를 그렇게 죽이고 모른 척한 건 다소 무리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울은 후회하지 않았다.
* * *
사울 일행이 외교 공관으로 돌아오는 길은 별 문제 없었다.
미리 ‘로터스’에 대한 소식을 받은 외교관과 그레이가 호들갑을 떤 것을 제외하면 공관에서도 큰일도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공관에서도 아이나나, 카스텔이나, 아르멜이나, 로터스 일은 다시 꺼내지 않았다.
사울도 로터스 일은 모른 척하고 앞으로의 일에 신경 쓰기로 했다.
로터스 덕분에 복수의 대상을 확실히 알았다.
롤랜드의 죽음과 가문을 몰락시킨 주범은 안소니 백작이다.
안소니 백작은 물론, 관련 있는 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려야 복수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안소니 백작이 대단한 거물이라는 거야.’
과거에도 안소니 백작은 상당한 거물이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더더욱 노회한 거물이 되었다.
왕실보다 귀족 세력이 강한 가멜다 왕국에서도 한 손에 꼽는 권력자였다.
더 골치 아픈 건 안소니 백작은 결코 전면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죽은 로터스처럼 어느 날 국경 지대, 나아가 중립 지대로 나올 만큼 경솔한 작자가 아니다.
당장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사이에 전면전이 터져도 일단은 사태를 관망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놈을 찾아가거나, 반대로 놈을 끌어들이는 건 불가능할 거야. 그렇다면…….’
사울은 자신이 아는 안소니의 약점, 정확히 표현하면 약점이 될 만한 사항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겪은 것을 종합해 보면 안소니는 킬리안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로터스의 죽음 또한 안소니카 킬리안을 시켜 그를 죽이려 한 것일 가능성마저 있다.
또 킬리안은 어둠의 세력, 그리고 피닉스와도 관련이 있다.
어둠의 세력과 피닉스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들 역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안소니 역시 킬리안은 물론 어둠의 세력, 나아가 피닉스 등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놈이 가멜다 왕국의 실권자라 해도 킬리안 같은 범죄자와 한패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겠지. 한 발 더 나아가 어둠의 세력이나 피닉스와 관련이 있다면…….’
권력은 얻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려운 법이다.
큰 권력을 쥔 자의 주변에는 언제나 그 권력을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안소니 백작은 왕도 아니고 거물 귀족일 뿐이다.
그가 가진 권력과 재물을 빼앗고 싶어 할 사람들은 가멜다 왕국에 우글거릴 터.
안소니와 킬리안이 관련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도 안소니의 권력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물며 어둠의 세력이나 피닉스와 관련이 있다고 드러난다면?
율렌 섬 어디에서든 이단자는 반역자만큼 엄격하게 다루어진다.
안소니 또한 어둠의 세력과 관련이 있거나, 한패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다.
사울은 거기에서부터 안소니 백작을 공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어. 이제 안소니 쪽에서도 날 경계할 테니까.’
사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 * *
“뭐라고!”
자신을 직접 찾아온 킬리안의 보고에 안소니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킬리안은 가멜다 왕국의 실권자의 고함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다르센 왕국의 사울 왕자 때문에 실패했다고!”
“그렇습니다. 백작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것이냐!”
백작의 분노에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도 무기를 움켜쥐었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여 최고의 실력을 가진 경비병들을 모았다.
이 자리에서 다툼이 벌어진다면 킬리안이라도 무사히 벗어나리라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킬리안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제 힘이 부족했던 것은 인정합니다. 그것은 사죄드리지요. 하지만 제 책임은 절반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절반은 백작님의 책임이지요.”
“뭐라고?”
“백작님은 가뜩이나 어려운 주문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어려운 주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습니다. 사울 왕자가 병력과 함께 나타나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큰 변수는 저 같은 일꾼이 아니라 백작님 같은 분이 미리 알고 알려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저도 데려간 병력의 절반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목숨값이라면 제 실수에 대한 책임으로 충분하겠지요.”
안소니는 머리를 조금 식히기로 했다.
화만 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당장 킬리안을 죽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머리를 식힌 안소니는 확실히 냉정할 필요를 느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황 파악이 더 중요하다.
“대체 왜 사울 왕자가 우리 일을 방해한 거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네놈은 사울 왕자와 몇 번 부딪친 적이 있었지. 혹시 사울 왕자가 네놈을 노리려다 일이 그렇게 된 것 아니냐?”
“그럴 리 없습니다. 굳이 사울 왕자가 아니라도 제 목을 노리는 놈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움직일 땐 항상 믿을 수 있는 자들만 데리고 다니고, 정보도 최대한 통제합니다. 만에 하나 제 부하 중 첩자가 있었다 해도 사울 왕자가 직접 나서지는 못했을 겁니다. 행선지는 작전 당일에야 알려 주었으니까요.”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고 킬리안 곁에 붙어 있던 칼립소도 한마디 보탰다.
“맞아요, 백작님. 저도 작전 당일 아침에야 두목에게서 행선지 이야기를 확실히 들었어요.”
“…….”
백작은 킬리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킬리안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첩자가 있었다 해도 행선지를 작전 당일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이후 사울 왕자에게 전달하고, 사울이 움직여 일을 방해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그럼 대체… 왜 사울 왕자가 일을 망쳤다는 것이냐?”
“정보가 미리 새어 나간 건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건 그렇지.”
안소니는 이번 일을 킬리안에게 위임했다.
안소니마저도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작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안소니 주변에 첩자가 있었다 해도 이번 작전을 방해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사울 왕자가 나타나 자신이 죽이려 한 로터스를 채 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우연일리는 없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너도, 나도 아니라면 로터스 놈과 관련이 있겠지.”
“그렇겠지요. 사울 왕자가 로터스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 일을 방해한 건지, 아니면 제거하기 위해 우리 일을 방해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거’라는 킬리안의 말을 들은 순간 안소니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킬리안.”
“네, 백작님.”
“사울 왕자는 지금 중립 지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제가 들은 정보에 따르면 어둠의 세력과 피닉스라는 조직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어둠의 세력과 피닉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