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간만에 방문한 대신전의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었다.
먼저 대신관이 바뀌었다.
우두머리가 바뀐 만큼 대신전의 행보 역시 달라질 것이다.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는 것도 변수다.
다시 두 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터진다면 중립 지대도, 대신전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대신전에 도착한 사울은 먼저 새로 대신관이 된 에스타를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에스타는 사울이 기억한 대로 사람 좋은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인품도, 능력도,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신관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훌륭한 신관이 곧 훌륭한 대신관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대신관은 대신전의 우두머리로서 권력도, 책임도 막중한 자리니까.
사울은 에스타를 만나기 전 아르멜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는 앞으로 대신전의 행보가 걱정됩니다.’
‘내 생각도 그래. 새로 뽑힌 대신관은 전만 못할 것 같아.’
‘네, 전하. 물론 에스타라는 신관이 능력이나 인품이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본인의 그릇에 비해 너무 큰일을 맡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차라리 능력이나 인품으로 따지면 아미스라는 신관이 더 뛰어난 것 같았습니다.’
신관 아미스.
신관 데이빗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한 여신관.
실제로 그녀의 평판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대신관을 역임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젊고, 본인이 정치나 권력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대신관 후보는 되지 못했다 들었다.
물론 사울은 에스타 앞에서는 철저히 속내를 숨겼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저나 왕국은 언제나 교단을 도울 것입니다.”
에스타도 푸근히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당장은 전하께 부탁드릴 일은 없습니다. 그저 항상 도와주셨듯 빛을 숭상하고 어둠을 배척하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지요.”
일단 사울은 에스타와 무난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어차피 피닉스의 뒤를 쫓기로 한 이상, 당장은 머리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대신관과 인사를 마친 사울은 예전에 쓰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짧지 않은 여행 끝에 도착한 대신전이지만, 쉴 틈은 없었다.
사울의 속내를 안 아르멜이 문서를 한껏 싸들고 왔다.
“전하.”
“그게 다 내가 요청한 정보들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새로 확보된 정보들은 모두 가지고 왔습니다.”
사울은 문서들을 한 장, 한 장 검토했다.
아르멜이 가져온 건 피닉스에 관련된 최신 정보들이었다.
정보의 질, 정확도는 가리지 않고 한동안 중립 지대 전역에서 모인 정보들 중 사울이 보지 못한 정보들을 모조리 가져왔다.
“전하.”
아이나와 카스텔도 부름을 받고 사울의 방을 찾았다.
여전히 두 사람의 표정이나 태도는 어색했지만, 일을 못 맡길 정도는 아니었다.
“피닉스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이에요. 보다시피 양도 많고, 또 모두의 의견이 필요해요. 다 같이 검토해 보아요.”
곧 사울 일행은 함께 정보 검토를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 쓸모없거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왕국 정보부에서도 점점 피닉스를 경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떤 탁월한 능력자가 조직을 이끌고 있기에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쫓는 입장에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몇 시간이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 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모두 수고했어요.”
사울의 지친 목소리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들어온 정보로는 더 이상 애써 봐야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조사하면 할수록 아직 피닉스가 철옹성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군요.”
카스텔이 동의했다.
“정말 수수께끼입니다.”
이 자리에서 카스텔만큼 산전수전 다 겪고 많은 적들과 싸워 본 사람은 없다.
아니, 다르센 왕국을 통틀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카스텔에게도 피닉스는 예측조차 어려운 수수께끼의 존재였던 것이다.
“역시 다른 각도로 접근할 필요가 있겠어요.”
아르멜이 물었다.
“다른 각도라 하시면?”
“카멜 산 말이야.”
모두들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피닉스는 이종족과 인간이 공존하는 평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이상이 진심인지, 어떤 야심가가 진정한 목적을 숨기고 겉으로만 내건 명분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피닉스는 중립 지대에서 거주하는 이종족들을 기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중립 지대의 이종족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카멜 산이다.
결국 다시 한번 카멜 산을 찾아가거나,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아이나가 다른 의견을 냈다.
“전하. 대족장이라도 피닉스에 대해 많이 알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우리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겠지요.”
“대족장이 아는 것을 순순히 말해 줄지 의문입니다.”
“그럼 더 좋은 생각이 있나요?”
“저희 가문의 영지로 가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홉킨스 가문의 영지.
그러고 보니 홉킨스 가문은 분명 이종족과 연이 깊은 자들이었다.
또한 가멜다 왕국과 중립 지대에 맞닿은 변경에 위치해 있어 중립 지대의 사정에도 밝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나가 그것만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지는 않았다.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요?”
“네. 최근 저희 가문에서 영지 내 이종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습니다. 모든 게 불분명해 지금까지는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어제 이러한 편지가 왔습니다.”
아이나가 내민 편지를 본 사울의 눈이 번득였다.
“이종족 사이에서 피닉스와 왕국에 반대하는 자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네. 저희 가문에서는 이종족들이 왕국과 저희 가문에 반대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전에는 없었나요?”
“이렇게 노골적인 움직임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이나가 준 편지는 아이나의 오라버니이자, 홉킨스 가문의 소영주인 칼랜드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칼랜드는 꽤 유능하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이나가 사울을 홉킨스 가문의 영지로 부르는 것도 칼랜드, 나아가 영주 던칸의 뜻일 수 있다.
‘홉킨스 가문의 영지라…….’
비록 홉킨스 가문이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 지역 또한 다르센 왕국의 영토다.
그만큼 중립 지대나, 카멜 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어차피 카멜 산에 가도, 혹은 대신전에 머물러도 무언가 결과가 나올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어. 편지를 보건대 홉킨스 가문 영지에 뭐가 있기는 한 것 같아. 그렇다면…….’
사울은 결단을 내리기 전 한 가지 확인을 하기로 했다.
“아르멜, 전에 이야기 한 안소니 백작 쪽은 어떻게 되었나?”
“백작 쪽의 조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사울은 안소니 백작의 주변을 가능한 철저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안소니 백작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킬리안은 물론, 어둠의 세력이나 피닉스까지.
명령을 내린 지 오래되지 않아 당장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별다른 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홉킨스 가문 영지로 가 볼까요? 무언가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면 움직여 볼 가치는 있을 테니까.”
“찬성입니다.”
바로 찬성표를 던진 카스텔과는 달리 아르멜은 아이나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이나, 나아가 홉킨스 가문과 왕실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르멜도 결국 반대하지는 않았다.
“모두의 의견이 모였으니 내일 홉킨스 가문 영지로 출발해요. 새로운 대신관/에게는/ 내가 말해 둘 테니.”
어차피 새로운 대신관을 비롯한 대신전 사람들에게 얼굴도장은 모두 찍었다.
이 정도면 성의 표현은 충분히 한 셈이다.
결정한 사울은 다시 대신관 에스타를 찾아갔다.
“홉킨스 가문 영지로 떠나신다고요.”
“그쪽에 공적인 일이 생겼습니다. 좀 더 대신관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군요. 저희 대신전은 언제나 왕자 전하를 환영합니다. 다음에 오시면, 데이빗도 다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한때 사울과 함께 했던 견습 신관 데이빗.
꽤 친하게 지냈으니 사울도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또한 데이빗과 함께 있다는 사람도.
“그러고 보니 데이빗은 지금 신관 아미스와 함께 있다지요.”
사울의 말에 에스타는 조금 놀란 표정이 되었다.
“아미스 신관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데이빗과 여러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에스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울은 에스타가 말을 줄인 것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최소한 아미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나올 반응은 아니었다.
‘아미스라는 신관의 존재가 불편한 건가.’
젊은 나이에도 뛰어난 능력과 인망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아미스.
머잖아 그녀는 데이빗과 함께 이 대신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새로운 대신관으로서, 그런 아미스의 존재가 불편한 건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지금 사울로서는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 * *
신전 사람들과 두루 인사를 나눈 사울은 오랜만에 홉킨스 가문의 영지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홉킨스 가문 영지인 갈레트 지방의 중심 도시 사제타였다.
사제타에서 영주와 소영주를 만나고 피닉스에 대한 일을 의논할 생각이었다.
한가로운 여행이 아닌지라 모두들 마차가 아닌 말을 탔다.
길을 서두른 덕분에 예정보다 빨리 갈레트 지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울 일행은 경비대에 잠시 방문하여 휴식을 취했다.
“환영합니다, 전하.”
“음.”
이 지역의 경비와 치안을 책임지는 경비대는 영주 휘하의 영주군이 아닌 왕국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왕국군 부대도 있어 주변의 치안 또한 왕국군이 맡는 것이었다.
목적지인 사제타까지 달리면 하루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울은 잠시 숨을 돌린 뒤 곧바로 사제타로 향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전하! 멀리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경비병의 외침에 사울도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멀리 불길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사울은 마법으로 시력을 높여 보았다.
불길과 연기만 보이던 모습이 좀 더 뚜렷해지며, 어디에서 불이 난 곳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마을인가.”
사울의 중얼거림에 아이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마을에서 불이 난 겁니까?”
“그런 것 같아요. 보통 불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마을에서 축제를 하거나 마을 사람의 실수로 불을 낸 건 아닌 것 같다.
불길이 점점 커지며 마을 상당 부분을 집어 삼키고 있었으니까.
“전하, 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이나의 말에 사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어요. 모두들! 저 마을 쪽으로 이동한다!”
“네, 전하.”
사울 일행은 불타는 마을 쪽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