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사울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대족장님, 솔직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입장이 있고, 대족장님은 대족장님의 입장이 있지요. 나아가 왕국의 입장과 카멜 산의 입장도 다르니까요.”
“그렇습니다. 전하.”
“서로의 입장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섣불리 좁히기도 어려울 테고요. 그런데 지금 필요한 건 양보가 아닐까요.”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세네카가 물었다.
“제가 양보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네. 물론 저 역시 양보를 할 생각입니다.”
“제가 무엇을, 또 어떻게 양보하길 바라십니까?”
“제가 직접 카멜 산의 간부들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제안에도 세네카는 놀라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쉽지 않은 제안이군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저는 전하께서 카멜 산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피닉스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하신다는 점을 압니다. 하지만 저 혼자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다른 동족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 주면 대가로 무엇을 주겠느냐’의 완곡한 표현이다.
사울은 먼저 일반적인 협상 카드를 꺼내들었다.
“재물로 이곳 주민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요?”
사울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세네카는 피식 웃었다.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카멜 산이 그렇게 빈곤한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런 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네카가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저도, 또 다른 동족들도 귀국의 도움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르센 왕국에 빚을 지는 게 내키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아직 이 카멜 산에는 아픈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는 동족들이 많습니다.”
율렌 섬에서 노예 제도가 철폐된 지 200년이 넘었다.
달리 말하자면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이종족이 율렌 섬에서 노예로 부려졌다.
200여 년 전.
사울 같은 인간에게는 머나먼 과거의 일이다.
마법이나 연금술로 수명을 늘리지 않은 이상 인간이 200년을 살 수는 없으니까.
이종족을 노예로 부린 건 분명 인간들이 기억해야 할 어두운 역사이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하지만 이종족은 인간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간다.
드워프의 경우 오래 살면 2,300년 이상 살아가며 엘프는 그보다도 수명이 훨씬 길다.
따라서 카멜 산에는 노예 생활을 직접 겪은 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세네카를 비롯하여 말이다.
사울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섣부른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사과하겠습니다.”
“전하를 탓하는 건 아닙니다. 이미 그 일은 오래 전 과거이며, 이제 되풀이되진 않을 테니까요. 다만 동족들의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대족장님은 제가 카멜 산의 간부들을 직접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세네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제가, 혹은 다른 동족이 같은 동족을 냉정하게 조사하는 건 어려운 게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저도 대족장님이나 다른 자들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무언가 결단을 내린 세네카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이 카멜 산의 간부들을 조사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그 대가는요?”
“우리가 의심하고 있는 귀국의 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우리가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 * *
세네카와 이야기를 마친 사울은 곧바로 일행을 소집했다.
사울의 말을 들은 아이나가 거세게 반발했다.
“전하, 그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사울도, 늘 아이나를 견제하던 아르멜도 지금은 아이나가 무례하다고 탓하지 않았다.
사울의 말, 정확히 말하자면 세네카의 제안이 지나친 것이었으니까.
“역시 그렇지요. 내가 카멜 산의 간부들을 조사하는 대가로 대족장이 뽑은 사람들이 홉킨스 가문 사람들을 조사한다.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저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고, 무엇보다 아버님이 그런 일을 허락하실 리 없습니다.”
“그럼 홉킨스 가문 영지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겠어요.”
아르멜이 물었다.
“우리가 카멜 산의 간부들을 조사하듯, 카멜 산에서는 자신들이 의심하고 있는 왕국 인사들을 조사하겠다고 한 겁니까?”
“그래. 홉킨스 가문 영지의 사람들, 그리고 왕국 사람들까지 모두 다 조사하고 싶다는 게 대족장의 말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대족장의 부하들이 그것을 원한다더군.”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보기에는 대족장 자신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만.”
“그렇기도 하겠지.”
“대족장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전하께서 카멜 산의 간부들을 조사하시는 것은 어렵겠지요?”
“아마도. 대족장이 우릴 좋게 봐주고 있지만 그는 카멜 산의 우두머리야. 동족보다 우리 편을 들어줄 리는 없지.”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저쪽이 움직일 만한 미끼를 던져야 하겠군요.”
사울이 일행을 불러모은 것도 아르멜이 말한 ‘미끼’에 대해 의논하기 위함이었다.
잠시 후, 아르멜이 의견을 냈다.
“카멜 산 단독으로 움직이며 왕국 인사들을 조사하는 건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전하께서 허락하신다 해도 왕녀 전하나 폐하께서 허락하실 리 없지요.”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정보부를 통하여 은밀하게 조사를 하도록 하심은 어떨까요?”
“정보부를 통해서?”
정보부를 통해 조사한다.
즉 카멜 산과 왕국 정보부가 합심하여 수상한 자들을 조사하라는 것이다.
“왕국 정보부에서 카멜 산에서 파견된 자들과 함께 조사하는 것을 받아들일까?”
“왕녀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정보부에서도 받아들일 겁니다. 그리고 왕녀 전하라면 카멜 산에서 납득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한다는 전제하에, 그 정도는 받아들이실 겁니다.”
루시아 왕녀의 충복인 아르멜의 말이라 어느 정도 신뢰가 갔다.
그리고 사울 본인이, 나아가 루시아 누님까지 이 일을 받아들인다면 아바마마께서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군. 그럼 네가 누님을 설득해 주겠어?”
“물론입니다. 제가 꺼낸 이야기이니 제가 직접 왕녀 전하를 설득하겠습니다. 다만 대족장을 설득하고 또 납득시키는 건 전하께서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겠지.”
쉬운 일은 아니다.
자신만만한 아르멜의 모습을 볼 때, 그쪽에서 일이 잘못될 것 같지는 않다.
일이 잘못되거나 문제가 생긴다면 사울 쪽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사울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나은 방법일 듯했다.
* * *
다시 세네카와 독대한 사울은 아르멜이 내놓은 의견을 그대로 전달했다.
세네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선히 말했다.
“역시 제 동족들에게만 그 일을 맡기는 건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족장님. 제 권한에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제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도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이런 일은 서로 양보가 필요한 것이니.”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네, 전하. 동족들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고비를 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세네카와 독대를 한 다음 날.
사울은 다시 세네카와 만난 자리에서 통보를 받았다.
“저도, 동족들도 전하를 믿기로 했습니다.”
“그럼?”
“네. 일단 전하께서 주도하여 카멜 산을 한번 조사해 보도록 하십시오. 이후 제가 파견한 동족들이 회색 그림자와 함께 귀국을 조사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대족장님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허락을 받은 사울은 곧바로 일행과 함께 카멜 산 조사에 들어갔다.
카멜 산은 율렌 섬 이종족의 총 본산과도 같은 곳.
그만큼 거주하는 이종족도 많고, 또 이래저래 복잡한 곳이었다.
먼저 믿을 만한 인재가 필요했다.
사울 휘하의 인재들만으로는 부족했고, 카멜 산 쪽의 협조가 필요했다.
세네카도 그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지원군을 보내 주었다.
바로 본인의 호위대장인 모데아였다.
‘모데아가 결백하다는 건 제가 보장합니다. 이번 일에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그와 상의해 보십시오.’
사울 역시 모데아라면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함께 움직여 본 적 있기에 실력도 잘 알았고, 또 성품이나 신분을 고려하면 피닉스 같은 무리와 한패일 가능성도 거의 없었으니까.
이에 사울은 자신의 일행, 그리고 모데아와 함께 카멜 산 조사를 시작했다.
“이 카멜 산에 피닉스의 끄나풀이 있을 가능성은 높아요.”
“…….”
“호위대장. 듣기 불편하겠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에요.”
모데아는 드워프 특유의 덥수룩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전하께서 약속을 확실히 지켜 주시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물론 지킬 거예요. 그를 위해서라도 일단 이 카멜 산의 피닉스를 색출할 필요가 있어요.”
납득한 모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일단 대장처럼 믿을 만한 내부인이 필요해요. 그리고 최대한 서둘러야 해요. 피닉스도 내가 카멜 산에 왔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나아가 내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도 눈치챘을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내일 안으로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세네카의 명령을 받은 탓인지 모데아는 사울에게 협조를 잘해 주었다.
곧 세네카가 이끄는 믿을 수 있는 내부자들, 그리고 사울 일행이 함께 본격적인 피닉스 색출 작업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사울은 카멜 산에서도 나름대로 피닉스에 대한 조사 및 색출 작업이 진행되었음을 알았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수상한 자들의 리스트가 몇 나왔으니까.
“대족장님도 이자들을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으시다는 말이지요.”
“네, 전하. 이들을 조사하는 건 별문제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 혹은 내 일행이 일일이 이들을 만나고 다닐 수는 없어요. 내가 많이 움직일수록 저쪽에서도 낌새를 눈치챌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니 대장이 대족장님께 도움을 요청해 줘요.”
“무슨 도움 말씀이십니까?”
“대족장님이 그들을 직접 부르신다면, 그들도 의심 없이 움직이겠지요.”
사실상 세네카를 이용하겠다는 사울의 말에 모데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지나친 방법 같습니다만.”
“알아요. 하지만 부작용은 최대한 줄이면서 빠르게 일을 성사시키려면 이 방법뿐이에요. 최근 카멜 산 전역에 비상이 걸렸다지요. 그렇다면 대족장님이 간부를 불러 독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니까요.”
“으음…….”
고민하던 모데아는 결국 세네카를 만나러 갔고, 오래잖아 긍정적인 대답을 가지고 왔다.
“대족장님께서 그러겠다고 하십니다.”
“고마워요.”
곧 사울이 직접 세네카를 찾아가 어떻게 조사를 할지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그럼 저와 대족장님, 그리고 선생님 이렇게 셋이 함께 조사를 하는 것으로 하지요.”
“네, 전하.”
조사 방법은 간단했다.
“부르셨습니까? 대족장님.”
“그래요.”
조사 대상인 엘프가 세네카의 부름에 찾아와 자리에 앉았다.
엘프는 세네카의 곁에 있는 사울과 카스텔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대족장님, 옆에 계신 분은 다르센 왕국의 사울 전하 아닙니까?”
“맞아요.”
“무슨 일로 전하와 함께…….”
엘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카스텔이 마법으로 엘프를 제압한 것이었다.
동시에 세네카도 움직였다.
카스텔이 주도하여 상대의 정신을 제압하고 정보를 캐낸다면, 세네카는 그 과정에서 당사자의 정신이 붕괴되거나 다치는 일이 없도록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리는 역할도 맡았다.
카스텔 혼자서는 상대 정신을 제압하고, 나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멀쩡하게 끝내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세네카와 함께라면 가능했다.
엘프가 완전히 제압당하자, 사울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
“그대는 피닉스에 소속되어 있는가?”
엘프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