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엘프의 대답을 들은 사울은 카스텔과 세네카 양쪽에 모두 눈짓을 했고,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 엘프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동의한 것이었다.
“그대는 피닉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혹은 숨기고 있는 게 있나?”
“없소.”
이어진 질문에도 엘프는 연신 부인하거나, 모른다고 할 뿐이었다.
이번에도 카스텔과 세네카 두 명 모두 엘프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보증했다.
질문과 확인까지 마친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엘프는 결백한 것 같군요.”
심문이 끝나자 다시 세네카가 나섰다.
곧 엘프는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밖으로 나갔다.
자신의 기억이 일부 날아간 것까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세세하게 마법을 걸었다.
엘프 스스로도 자신이 겪은 일을 잊은 것은 물론,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 명의 조사를 마친 세네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마음이 편치 않군요.”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결백한 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조사는 계속 이어졌다.
세네카는 최대한 은밀하게 수상한 자들을 하나하나 불러 모았고, 불린 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문을 당했다.
그렇게 열 명 정도를 심문했을 때였다.
“그대는 피닉스인가?”
“그렇소.”
불려 온 오크의 대답에 모두의 눈빛이 변했다.
사울은 침착하게 심문을 계속했다.
“다시 묻겠다. 그대는 피닉스인가?”
“그렇소.”
“피닉스 휘하에서 피닉스를 위해 일을 하는가?”
“그렇소.”
마침내 한 놈 잡았다.
사울은 세네카에게 눈짓을 했고, 세네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가 드러난 피닉스 스파이를 어떻게 처리할지 합의는 끝났다.
일단 정보를 빼낸 뒤 돌려보내고, 철저히 감시하여 꼬리가 아닌 몸통을 잡기로 했다.
이에 사울은 눈앞의 오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사울의 질답이 모두 끝나자, 세네카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피닉스에 가담한 겁니까?”
오크는 상대가 대족장이라는 것도 모른 채, 곧이곧대로 털어놓았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말씀하셨다. 인간을 믿지 말라고. 평화도, 독립도 우리가 더 강해져서 쟁취해야 한다고.”
오크의 말에 세네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단. 독립이라는 건 스스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백 년 전부터 나도, 다른 동족들도 싸웠습니다. 숱한 피를 흘렸지만 노예 제도를 폐지시켰고 200년 넘게 불안하나마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겁니까?”
“그렇다.”
“…….”
세네카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심문은 끝나고, 오크는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도 모른 채 돌아갔다.
사울은 표정이 어두워진 세네카에게 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아닙니다. 계속 하겠습니다.”
그렇게 첩자 색출은 계속되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이종족이 드나들었고, 세 명의 첩자를 색출해 냈다.
첩자의 존재가 드러날 때마다 세네카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피닉스에 가담한 겁니까?’
똑같은 질문처럼 대답도 거의 같았다.
지금보다 이종족이 더 강해져 평화와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말들이었으니까.
이외에는 쓸모 있는 정보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첩자들도 서로의 존재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첩자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연락책이 있다지만, 그 연락책의 정체도 알아내지 못했다.
연락책 쪽에서 정체를 숨긴 채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환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건 이 ‘연락책’을 찾아내는 일이군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도 동의했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연락책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놈을 산 채로 붙잡는 것. 그것이 이번 조사의 성패를 가를 겁니다.”
“…….”
세네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 일이 그에게는 꽤나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전생 때 배신당했던 경험이 있는 사울이라 세네카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얌전하고 온화한 대족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지만, 이종족이 노예이던 시절에는 전사로서 인간들과 싸워 왔다고 했다.
한쪽 팔이 뼈만 남은 것도 그 전쟁의 후유증이었다던가.
그런 세네카의 이상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중립 지대의 일부를 차지하고, 카멜 산을 이종족의 땅으로 만들어 200년 동안 유지해 왔으니까.
그런데 피닉스 같은 자들이 나타나고, 날뛰고 있다.
세네카가 그동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그 때문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종족 세력이 두 인간 왕국에 큰 피해를 입힌다면, 두 왕국도 이종족의 존재를 좌시하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전쟁의 불길이 카멜 산까지 옮아 붙고, 나아가 카멜 산을 멸망시킬지도 모른다.
세네카가 좌절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아가 자신이 그동안 해 온 일을 부정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
사울은 조용히 말했다.
“대족장님.”
“네, 전하.”
“인간 왕국의 왕자인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대족장님이 해 온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이십니까?”
“네. 인간이 이종족을 노예로 삼거나 박해한 건 분명 잘못된 과거이니까요. 대족장님은 그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해 왔습니다. 이 위기 또한 잘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울의 말에 세네카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 *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사울은 일행과 조사 내용을 공유했다.
“예상대로 카멜 산에도 피닉스의 첩자가 있었군요.”
아르멜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찾아낸 것만 세 명이지. 아마 더 찾아보면 더 나올 거야.”
“정말 피닉스는 대단한 놈들입니다. 목적도, 세력도, 모든 게 불분명한데 이렇게까지 마수를 뻗치다니.”
“맞아. 하얀 까마귀니 어둠의 세력이니 하는 것들도 있지만… 피닉스는 그 이상으로 위험한 자들이라고 생각해.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들어. 하얀 까마귀도, 심지어 어둠의 세력도 피닉스에게 놀아나는 게 아닐지.”
사울은 킬리안 비셔스가 이끄는 하얀 까마귀를 직접 상대해 보았다.
또 킬리안, 나아가 하얀 까마귀와 어둠의 세력이 관련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피닉스도 그들과 어떤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울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킬리안도, 어둠의 세력도, 피닉스라는 정체불명의 세력에게 놀아나고 있을 수 있다고 여겼다.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아르멜 역시 생각이 비슷했다.
“가능성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하얀 까마귀는 세력은 크지만 범죄 조직에 불과하고, 어둠의 세력은 기껏 해야 위험한 사이비 종교 집단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위험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지요. 하지만 피닉스는 뭐랄까… 다른 자들보다 광기는 덜할지 모르나 더 강하고 위험한 자들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거야. 정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지.”
그때 아이나가 다른 것을 물었다.
“카멜 산의 조사가 끝나면 다른 곳도 조사를 하는 겁니까?”
“그래야지요. 카멜 산에 끄나풀이 있다면 분명 왕국에도 끄나풀이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사울은 아이나가 무엇을 걱정하는 지 알아보았다.
“그대의 가문에 영향이 미칠까 봐 걱정되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본의 아니게 그대의 가문에 폐를 끼치게 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해요. 내부의 적을 쳐 내지 않고 외부의 적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알고 있습니다. 전하.”
세상에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려운 일이 있다.
지금 아이나가 딱 그런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사울과 가까이 지내는 탓에 가문의 구성원, 나아가 가문에 해를 끼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런 속내마저 쉽사리 감추지 못하는 아이나의 순수함이 조금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르게 행동할 수 없다.
피닉스 문제를 하루빨리 해결해야지, 계속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당분간 피닉스 문제를 조사하면서…….”
문득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봉화가 피어올랐습니다!”
봉화가 피어올랐다.
물론 평상시에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평상시 아무 일도 없는 신호를 가지고 병사가 호들갑을 피울 리 없다.
“봉화 신호는?”
“붉은빛이 두 가닥이었습니다!”
“붉은빛? 사실인가?”
“몇 번이나 확인해 보았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과거에는 봉화 신호를 불꽃이나 연기로 보냈지만, 최근에는 마법 불빛으로 보내고 있다.
마법 불빛의 색깔과 개수를 통해 대강의 정보를 빠르게 알리고, 이후 사자를 보내 정확한 정보를 알리는 게 일반적인 정보 전달 방법이었다.
붉은 불빛은 외적의 침입을 뜻했다.
붉은 불빛이 한 가닥이면 적들이 국경을 넘어오거나 도발을 해 왔다는 뜻.
붉은 불빛이 두 가닥이면 적군과 아군이 소규모의 전투를 벌였다는 것.
붉은 불빛이 세 가닥이면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거나 아군의 성 등이 함락당했다는 뜻이다.
지금 상황에서 붉은 불빛이 두 가닥 피어올랐다면…….
“가멜다 왕국과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봉화 외에 다른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나?”
“네, 전하.”
“알았다. 언제 사자가 올지 모르니 준비하도록. 그리고 언제 이곳을 떠나야 할지 모르니 모두들 여장을 꾸리라 해라.”
명령을 내린 사울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려는 모양이군요.”
아르멜이 대답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정보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소규모의 국지전으로 그친다면 일이 더 커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 소식은 심상치가 않아. 내기를 해야 한다면 이번 전투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에 걸겠어.”
사울의 말대로였다.
지금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지금 같은 때에 두 나라 사이에 국지전이 벌어졌다는 건, 기름통에 불을 던진 것과 같다.
전투의 이유나 당장의 승패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이로써 대전쟁이 다시 시작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아졌다는 것이다.
정말 전쟁이 재개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울의 경우에는 곧바로 수도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물론 아바마마가 사울의 복귀를 원하거나, 다른 이유로 소환령이 떨어진다면 수도로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사울이 수도로 불려 갈 가능성은 낮았다.
이미 사울은 많은 능력을 보여 주었다.
정말 전쟁이 터진다면면 그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후방에서 일 없이 대기하는 게 아니라 전쟁에 직접 기여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모두에게 말했다.
“어찌 되었든 곧 이곳을 떠나야겠군요.”
이견은 없었다.
전쟁이 시작되는데 왕자의 몸으로 카멜 산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다.
사울은 곧바로 세네카를 찾았다.
“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 같다는 말씀입니까?”
“네, 대족장님.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네. 상황이 상황이니 저도 조만간 이곳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당장 떠나는 건 아니니까요. 떠날 때까지 정보를 모았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