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다르센 왕국 외교 공관으로 돌아간 사울은 승전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업무에 매진했다.
예정대로 포로들은 모두 다르센 왕국으로 보냈고, 또 중립 지대의 가멜다 왕국 세력 잔당을 정리하는 데 전념했다.
가멜다 왕국 잔당들도 생각보다 끈질겼다.
쉽사리 중립 지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숨어 있다 적발되는가 하면, 사울을 암살하려 한 자들이 적발되어 죽거나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울어진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오래잖아 사울은 중립 지대의 가멜다 왕국의 잔당을 완전히 정리할 수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친 사울은 곧바로 제르넬 요새로 향했다.
가멜다 왕국 잔당까지 모두 정리한 덕분에 문제없이 다르센 왕국의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데 사울 일행이 국경을 넘기 무섭게 심각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전하!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국경이 돌파당했습니다! 그리고 돌파한 적의 병력이 제르넬 요새로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적 병력은?”
“5천 명 정도라고 합니다!”
“5천이라고?”
분명 제르넬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는 천 명 남짓했다.
아무리 요새를 끼고 있다지만 적 병력이 다섯 배라면 위급한 상황이다.
“적 병력의 목표가 제르넬 요새인 게 틀림없나?”
“네, 전하. 진로도 진로거니와, 공성 병기까지 갖추었다고 합니다.”
제르넬 요새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전시 상황에서는 언제 적의 공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적 병력이 공성 병기까지 동원하여 진격해 오는 것을 막지 못하다니.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아군의 실책이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하고 계시지?”
“전력을 다해 요새 방어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렇군.”
보고에 따르면 아직 사울이 요새에 들어갈 시간은 있었다.
하지만 사울이 이끄는 병력은 수십 명에 불과하다.
섣불리 요새에 들어갔다가 함께 고립되면 두 명의 왕자가 적에게 포위되는 꼴이다.
“제르넬 요새로 향할 원군은?”
“원군은 준비되는 대로 바로 보낸다 합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당장 충분한 지원군을 보내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원군을 보내는 부대는?”
“왕국 5군단에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르센 왕국의 군대는 총 8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5군단이라면 제법 정예 군단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제르넬 요새가 중요한 요충지인 데다가 왕자 조나단이 머무르고 있으니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이미 국경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 특정 지역에만 전력을 투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럼 이스마일 자작이 형님의 지원을 준비하고 있는가?”
“네, 부군단장님이 직접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모든 보고를 받은 사울은 일행에게 물었다.
“곧바로 요새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스마일 남작을 찾아 원군과 함께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반대 의견은 없었다.
요새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요새에 들어가면 결국 포위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함께 포위되느니 원군과 함께 움직이는 게 좀 더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 * *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군단의 구조와 운영 방식은 비슷했다.
먼저 군단의 우두머리로 군단장이 있고 그 아래 부군단장을 두 명씩 두고 있다.
두 부군단장 중 한 명은 군단장과 함께 움직이며 참모 역할을 하고, 또 한 명은 군단장을 보조하며 필요할 경우 독립적으로 움직인다.
사울이 찾아간 로타 이스마일 자작은 참모가 아닌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역할을 맡은 부군단장이었다.
그래서 군단장 스웨인 백작에 이어 사실상 5군단의 2인자나 다름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반가워요, 이스마일 자작.”
부군단장 로타 이스마일 자작은 단단한 체구에 험상궂은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눈빛이나 행동거지만 봐도 도적이나 깡패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진짜 군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부족하지만 총 2천 명의 원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제르넬 요새에 천 명이 있으니 아군 병력은 총 3천 명이군요. 그리고 적군은 정예이면서 공성 병기까지 갖춘 5천이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군이 크게 열세인 건 아닙니다. 제르넬 요새는 튼튼하고, 방비 태세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렇지요. 전투는 언제 벌어질 것으로 예상하나요?”
“아마 적들은 사흘 안에 도착할 겁니다. 공성 병기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해도, 늦어도 5일 안에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최대 5일이라면 결코 시간이 많지는 않다.
사울은 본래 이 지역에 있던 쿠루굴 부족을 떠올렸다.
“코볼트 족장 쿠루굴을 알고 있나요?”
“네, 전하께서 그를 포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이종족 특유의 능력이 있고, 또 이 지역에 대해 잘 알고 있어요. 그들도 합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인데.”
“안타깝지만 그들이 도착하려면 보름은 있어야 할 겁니다. 보름이라면 전투가 끝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렇겠지요.”
장기전은 성이나 요새를 공격하는 쪽은 물론, 방어하거나 지원하는 입장에서도 피곤한 일이다.
가능한 빨리, 그리고 아군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 피해는 최대한 입히는 게 바람직하다.
“가멜다 왕국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르넬 요새를 손에 넣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무리해서 저 정도의 전력을 데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겠지요.”
“말씀대로입니다. 제르넬 요새를 지켜 낸다면 그만큼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분명 아군이 불리해 보인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가멜다 왕국도 크게 무리했다.
주변 전선이 무너지더라도, 제르넬 요새만 점령할 수 있으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무리하여 국경을 돌파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공세만 막아 내면, 최소한 이 주변에서는 다르센 왕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걱정이 되는 건, 적 전력은 물론 지휘관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적 지휘관이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라지요?”
“네. 그자를 아십니까?”
“소문을 많이 들었고, 실제로 만난 적도 있지요. 위험한 인물이었어요.”
세드 메로빙거 자작은 두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책임자 중 한 명이다.
사울이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활동할 때, 중립 지대의 군사 활동 문제로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전생 때부터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평판만큼 유능한 인물이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도 힘을 보태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할 거예요.”
* * *
원군에 합류한 사울은 곧장 제르넬 요새 인근으로 이동했다.
본래는 2천의 병력 모두를 외부에 배치시킬 생각이었지만, 제르넬 요새를 지키는 조나단의 생각은 달랐다.
“전하께서 원군을 요새로 데려올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어느 정도의 병력을 원하시는가?”
“전 병력을 이끌고 요새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전 병력을? 그렇게 병력이 부족한가?”
“전하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천의 병력은 요새 안에서, 2천의 병력은 요새 주변에서 서로 의지하는 형세로 적을 상대한다.
이것이 사울과 로타 이스마일 자작의 생각이었지만, 조나단의 생각은 달랐다.
“알겠다. 곧 답변을 줄 것이니 잠시 기다리거라.”
조나단에게서 온 사자를 내보낸 로타는 곁에 있던 사울에게 물었다.
“저는 제르넬 요새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요새로 알고 있는데, 3천의 병력이 머무를 수 있기는 합니까?”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비좁겠지만 머물 수는 있어요.”
“하지만 크지 않은 요새에 3천의 병력이 모이는 건 비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맞아요. 거기에다 3천의 병력이 모였다 패배라도 한다면 3천의 병사와 왕자 두 명의 목숨을 적에게 내주는 꼴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리한 요구입니다만…….”
사울은 왜 로타가 말끝을 흐리는지 잘 알았다.
조나단은 로타의 직속 상관은 아니지만 엄연히 왕자의 몸이다.
게다가 터무니없이 떼를 쓰는 것도 아니고, 적 공격을 앞두고 병력이 부족하다는 뚜렷한 명분하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형님이 생각 없이 이런 요구를 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지. 요새 병력을 좀 더 늘리는 것도 생각할 만한 일이고.’
잠시 생각하던 사울은 로타에게 물었다.
“전략을 바꿔 요새에 2천의 병력을, 요새 밖에 1천의 병력을 두는 건 어떨까요?”
“1천의 별동대를 운영한다… 그만큼 성의 방비는 튼튼해지겠지만 반대로 성 외부에서 과감한 전략을 취하기는 어려워질 겁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형님이 이유 없이 이러한 요구를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형님 뜻만 따르다 기껏 세운 전략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은 병사를 둘로 나누는 게 최선일 것 같아요.”
고민하던 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습니다. 조나단 왕자님도 생각이 있으실 테니.”
“맞아요. 그리고 아르멜을 함께 보내는 게 좋겠어요.”
“아르멜 말입니까?”
“네. 그는 지금은 날 따르고 있지만 루시아 누님의 부하이지요. 루시아 누님이 그를 총애하고 있기에 나도 함부로 대하진 못해요. 조나단 형님도 마찬가지겠지요.”
“과연.”
병력 절반을 원군으로 보내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그 병력도 이쪽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 조치 없이 병사만 보낸다면, 원군의 통제권을 고스란히 조나단이 흡수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사울은 거기까지는 허용할 마음이 없었다.
아르멜이 함께 가면 그러한 일을 막을 수 있다.
아르멜의 뒤에는 조나단이 두려워하는 루시아가 있으니까.
결정을 내린 사울은 아르멜을 불러 현재 상황을 일러주었다.
영리한 아르멜은 순식간에 일이 돌아가는 것을 파악했다.
“조나단 왕자님이 멍청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아르멜의 불손한 말투에 로타는 놀랐고, 사울은 작게 웃었다.
“정확해. 형님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지만, 왠지 불안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제가 특별히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을까요?”
“목표는 세 가지야. 첫 번째는 형님의 목숨과 요새를 지킬 것. 두 번째는 가능한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힐 것. 세 번째는 외부에서 펼치는 우리의 작전을 형님이 방해하지 않도록 하고, 가능한 도울 것.”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문제는 세 번째군요. 아마 조나단 왕자님도 생각하시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것이 전하나 자작님의 생각과 같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너를 보내는 거야.”
아르멜은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조나단 전하를 통제하지 못할 수있다는 점은 이해해 주십시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줘.”
“네, 전하.”
그렇게 아르멜을 필두로 천 명의 병사가 제르넬 요새로 향했다.
순식간에 부대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사울은 전략을 다시 짤 필요를 느꼈다.
“2천 명의 별동대라면 적들이 쉽게 노리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천 명의 별동대라면 적들 입장에서 노릴 만한 먹잇감으로 여겨질 거예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혹시나 공격을 받게 되면 조나단 전하께서 잘 도와주셔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사울은 조나단의 성품을 잘 알았다.
동생의 곤경을 외면할 사람은 아니다.
반대로 서둘러 동생의 곤경을 구해 준 뒤, 생색을 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