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전하.”
들어온 건 아이나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정작 안부를 묻는 아이나는 썩 괜찮지 않아 보였다.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개중에는 이미 피로 젖은 것도 있었다.
“나보다 그대가 더 걱정이군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부상을 입었어도 무작정 쉴 수는 없다.
중상이 아닌 한 다시 전장에 서야 한다.
그만큼 처절한 싸움이다.
보는 눈이 있는 탓인지, 아니면 막 싸우고 돌아온 탓인지 평소보다 아이나의 행동거지가 좀 더 엄격했다.
“다른 사람들은요?”
“요새를 살피고 또 파괴된 곳의 복구를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전투는 어떠했나요?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가 보고 느낀 그대로 들려주었으면 해요.”
미리 사울이 말하지 않았다면 아이나는 가능한 낙관적으로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이 못을 박았기에, 가능한 냉철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치열하고 쉽지 않은 싸움이었습니다. 아군도 적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요새 상황은?”
“당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일주일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주일.
일주일 뒤에 요새가 깨지거나 목이 날아간다고 생각하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그대에게는 정말 미안하게 되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홉킨스 가문의 일원인 그대를 여기까지 끌고 와 위험에 빠트렸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어디까지나 전하… 아니, 왕국을 위해 하는 일일 뿐입니다.”
“홉킨스 가문에는 빚을 졌어요. 그대 같은 사람을 곁에 두게 해 주었으니.”
아이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렇게 아이나는 물러갔다.
얼마 후,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카스텔이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그보다 전황에 대해 듣고 싶어요.”
아이나의 말을 못 믿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썩 좋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인가요?”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아이나가 최소 일주일은 버틸 수 있다고 했다면, 카스텔은 일주일을 버티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가능하면 아이나의 의견을 믿고 싶었지만, 카스텔의 의견 쪽에 좀 더 신뢰가 갔다.
아이나가 거짓말을 하거나 대책 없이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는 게 아니다.
카스텔이 아이나보다 전장 경험이 많기에 그만큼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주일 안에 지원군이 오거나, 무언가 특별한 전략이라도 세우지 않는 한 위험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요새가 깨지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전하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겁니다.”
“형님은?”
“조나단 왕자님은 다른 자들이 챙겨야겠지요.”
듣고 있던 치료 마법사가 놀란 눈빛을 했다.
이 요새의 우두머리는 사울이 아닌 조나단이다.
그런데 대놓고 조나단보다 사울을 우선시하겠다니.
이 불온한 언사를 상부에 고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울은 작게 웃으며 치료 마법사에게 말했다.
“형님도 알고 계실 거야. 선생님이 원래 이런 분이시라는 걸.”
“네, 네.”
카스텔은 치료 마법사를 난처하게 만든 장본인이 본인임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 순수하다 해야 할지, 순진하다 해야 할지.
“알겠어요. 선생님도 피곤했을 테니 이만 물러가도록 해요.”
“네, 전하.”
그렇게 카스텔도 물러갔고, 더 이상 손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가 된 사울은 밤새 누워 계속 치료를 받았다.
내일은 전장에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 * *
잠들었다 눈을 뜬 사울은 바깥 창으로 하늘이 밝아오는 광경을 보았다.
조만간 해가 뜰 것이고, 오늘도 하루 종일 전투가 이어질 것이다.
사울은 몸을 일으켜 보았다.
어젯밤보다는 좀 더 가뿐했다.
몸 곳곳에 감긴 붕대를 벗겨 내니 겉보기에는 상처가 거의 다 아문 게 보였다.
통증은 남아 있지만, 이 정도면 크게 무리하지 않는 한 문제없지 않을까.
그런 사울의 눈에 또 교대된 마법사가 꾸벅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밤새 전력을 다해 사울을 치료하고 지친 것이리라.
사울은 굳이 치료 마법사를 깨우지 않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몸 이곳저곳을 움직이고 점검해 본 결과, 확실히 거의 몸이 회복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꼬박 하루 동안 치료 마법사들이 돌아가며 힘을 쓴 덕분이다.
사울이 문밖으로 나가자 놀란 경비병이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그래. 밤새 별일 없었나?”
“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행이군. 형님을 만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조나단 왕자님께서는 조금 전 쉬러 들어가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조나단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뒤늦게 휴식을 취하러 간 모양이다.
곧 일어나야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자게 놔두는 게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스마일 자작님이 요새를 점검하고 계실 겁니다.”
“자작에게 안내할 수 있겠나?”
“네, 전하.”
사울은 경비병의 안내를 받으며 이스마일 자작이 있다는 곳으로 향했다.
“진흙을 마저 덮어라!”
“언제 적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
밖으로 나가니 어제 전투의 참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요새 곳곳이 파괴되고 무너졌으며, 부서진 곳을 수리하기 위해 병사들이 바삐 움직였다.
밤새 요새를 수리하고 청소했을 것임에도, 아직 치우지 못한 시체가 눈에 띄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자가 아니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처참한 광경.
전생부터 저런 광경을 신물 나게 본 사울도 무덤덤하게 넘기기는 어려운 처참한 광경이었다.
곧 사울은 로타가 있다는 지휘부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지휘부에는 로타 대신 아르멜이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여긴 이스마일 자작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작 님은 조금 전 요새 수리를 감독하러 나가셨습니다.”
자작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르멜이 지휘부에서 별동대 병력을 관리하게 된 모양이다.
아르멜은 사울 휘하이고, 능력도 출중하니 문제 있는 인선은 아니었다.
“오늘도 전투는 계속되겠지?”
“네. 시간을 끌수록 유리한 건 우리 쪽이니까요.”
“지원군도 오지 않고, 특별한 전략도 세우지 않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일주일 정도가 아닐까요.”
결국 일주일이 고비다.
그 안에 지원군이 오거나 특별한 전략이라도 세워 적을 무너뜨려야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 ‘특별한 전략’은 ‘도박’과 동의어라는 것이다.
“지원군이 시간 맞춰 올 수 있을까?”
“뭐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가.”
도박을 하느냐 마느냐.
어느 쪽이든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고, 사울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고 보니.’
초조한 가운데 사울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직접 검을 마주하며 본 마검사 베일의 모습을 말이다.
마지막으로 본 베일의 모습은 결코 여유롭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지금의 자신처럼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금의 전황은 베일로서는 예상치 못한 형태였을 것이다.
자신과 카스텔의 목을 베고 단숨에 요새를 휘몰아쳐 점령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고, 결국 대규모의 공성전이 펼쳐지고 있다.
공성전은 베일 정도의 실력자 한두 명이 있다고 전황이 뒤집히지 않는다.
사울이 전생 때 사망했던 ‘볼페르트 요새 공방전’만 해도 그랬다.
그때 사울의 전생이었던 롤랜드를 죽이고, 요새를 점령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카스텔이었다.
하지만 카스텔 혼자서 요새를 깨뜨리지는 못했다.
대규모의 병력이 요새를 몰아치고, 카스텔 등의 강자가 쉴 새 없이 요새를 두들긴 끝에 외성이 무너지고 내성까지 무너졌다.
자신이 죽은 것도 내성까지 무너진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지경까지 몰고 간 건 카스텔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요새의 전력 자체가 적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악전고투 끝에 요새가 넘어갔다.
달리 말하면, 요새의 전력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면 카스텔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제르넬 요새는 어떠한가.
당장 요새가 깨어질 기미는 없다.
최소한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적이 인내심을 가지고, 냉정하게 계속 두드리면 위태로운 건 이쪽이다.
하지만 과연 적이 냉정하게 장기전을 펼칠 수 있을까.
최소한 사울이 본 베일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요새 밖의 가멜다 왕국군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휘관인 세드 메로빙거가 베일을 마음대로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베일과 세드는 같은 자작이다.
거기에다 베일은 구국 영웅이자 가멜다 왕국의 최강자가 아닌가.
그가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결코 세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대로 며칠만 버티면…….’
사울은 생각을 정리한 뒤, 자신의 의견을 아르멜에게 밝혔다.
아르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전하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좋아.”
얼마 후.
“와아아아!”
“적들이 몰려온다!”
해가 떠오르기 무섭게 전투가 재개되었다.
일단은 오늘도 무사히 요새를 지켜 내야 한다.
“전하, 괜찮으시겠습니까?”
“무리하지 않도록 하지.”
사울은 지휘부에서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지휘부는 성벽 안 곳곳에 만들어진 망루 꼭대기에 위치했다.
위치상 비교적 안전한 편이며, 요새 전체를 살펴볼 수 있어 지휘를 하거나 마법 등으로 지원을 하기에도 유리했다.
물론 운이 나쁘면 화살이나 마법에 맞을 우려도 있다.
하지만 전장에서 그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알겠습니다, 전하.”
“음.”
그렇게 사울은 지휘부에 눌러앉았다.
얼마 후, 조나단이 휘하 병력과 함께 지휘부에 도착했다.
“사울, 몸은 좀 괜찮으냐?”
“네. 형님. 그래서 오늘은 저도 이곳에서 형님을 보좌할까 합니다.”
“날 보좌하겠다고?”
조나단은 말리고 싶은 눈치였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상황이 급했던 것이다.
“알았다. 몸조심하거라.”
“네, 형님.”
성벽 안 망루에 위치한 지휘부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안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 적의 화살이나 마법, 혹은 다른 형태의 공격이 날아올지 모른다.
조나단도, 사울도, 그리고 휘하 병력도 모두들 무기를 빼 들고 만의 하나를 대비했다.
“좋아, 쏴라!”
“한 놈도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아직은 요새를 지키는 병사들의 숫자도 충분했고, 상태도 괜찮았다.
수비병들은 기세를 잃지 않고 다가오는 적들을 공격했고, 날아오는 공격에도 빠르게 대응했다.
“사울! 너는 서문 쪽을 경계하며 마법으로 지원해라!”
“서문 말입니까?”
“그래, 어제 베일 놈이 요새의 서문 쪽을 공격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게다!”
베일이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남문이 아닌, 방비가 튼튼한 서문을 노리고 있다.
이유는 분명했다.
남문은 깨져도 적이 요새에 완전히 진입에 시간이 걸리고, 사울 등이 탈출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서문이 깨지면 즉각 적 대군이 요새에 진입할 수 있다.
포위된 상태에서 서문이 깨진다는 건, 아군의 전멸을 의미한다.
“알겠습니다. 전 서문 쪽의 방어를 돕겠습니다!”
“부탁한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사울은 마법으로 서문 쪽을 살폈다.
이미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돌과 화살에 마법까지 치열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베일로 추정되는 자의 모습도 보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불과 얼음의 기운이 서린 검을 쥐고 있어 확연히 눈에 띄었다.
“@#$%@#$%”
베일이 무어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불과 얼음의 기운이 뭉쳐진 소용돌이가 성벽을 때렸다.
“으아악!”
베일의 공격에 휘말린 수비군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